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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동물 앞에서 발가벗다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발가벗은 내 모습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빤히 바 라보던 고양이. 자크 데리다는 『그러므로 나인 동물』 (Animal que donc je suis)에서 벗은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고양이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보통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즉 그 시선의 주체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일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타인은 그 출현만으로도 내 세계를 흔든다. 새나 고양이가 나타난 것과는 다르다. 내가 어떤 못난 행동, 이를테면 열쇠구멍으로 누군가의 방을 훔쳐보고 있을 때, 복도에서 누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때 나는 메두사의 눈이라도 본 것처럼 돌덩어리가 될 것이다. 남의 방이나 엿보는 놈으로 비춰진 것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사실은 작은 소리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깜짝 놀라 문에서 눈을 떼고는 그런 내 모습에 부끄러워질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한 이 시선은 인간적인 것이 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인간만이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동물원의 고릴라에게 바나나를 던지고는 한 번 해보라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관람객은 고릴라가 본다는 것은 알지만 시선을 느끼지는 않는다. 고릴라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다. 인간에게 고릴라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 점에서 고양이의 시선에 대한 데리다의 부끄러움은 우리가 의식하는 타자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게도 데리다의 고양이처럼 나를 응시하던 동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 시선을 떠올리면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이름이 맥스였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TV시리즈 「소머즈」에서 주인공과 함께 활약한 세퍼드견의 이름을 땄다. 당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지도 작지 도 않은 개였다. 사람들은 소머즈의 맥스와 털색만 같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 맥스 이상으로 영리하고 다부졌다.

  낯선 곳에서 가족 모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 던 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데려온 강아지 맥스도 낯선 우리와의 삶을 시작했다. 도시 변두리라 논밭이 많았고 우리 집은 외진 곳에 있어서 하굣길이 멀었다. 혼자 서 책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동네 어귀에 접어들면 맥스가 먼 곳에서 논밭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왔다. 매일 보는데도 몇 년을 떠나있던 연인을 보는 듯 언제 나 맹렬히 달려와서 와락 안겼다. 그렇게 매일 껴안고 부비면서 맥스는 어른 개가 되었고 내게도 변성기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맥스가 뛰어오지 않았다.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 집 앞에는 군청색 트럭 하나가 서 있었 다. 마음은 쿵쾅거리고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왜인지 기억을 못하지만 당시의 나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 트럭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건 내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며칠 째 땅만 보고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맥스가 뛰어오지 않은 단 하루, 그날 나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짐칸에 서 있던 맥스가 목줄을 하고 있었던가, 철창에 있었던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맥스는 꼬리를 흔들지도, 짖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트럭은 너무 느리게 지나갔고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얼어붙어 있었다. 맥스는 그날 처음으로 내 발가벗겨진 몸을 보았을 것이다.

 

  다시 맥스의 눈을 떠올린 건 최근에 본 짧은 영상 때문이다. 백신 개발을 위해 작은 마카크 원숭이들의 코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강제 주입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육중한 기계에 머리와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원숭이들은 나란히 늘어서 실험자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맥스의 눈빛을 느꼈다. 나는 다시 발가벗겨지고 다시 얼어붙었다. 인간은 비인간 동물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 온갖 짓을 한다. 우리에 가둬두고 그 앞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꽥꽥거리는 것부터, 사지를 묶어두고 태연히 코에 바이러스를 주입하 는 것까지(한 해 한국에서만 공식적으로 300만 마리 의 동물이 실험에 사용된다고 한다). 동물이 보기는 하겠지만 동물에게 비춰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그때 맥스는 왜 나를 보고 뛰어내리려 하지 않았을까. 미동도 없이 왜 보고만 있었을까. 혹시 그를 포기한, 고개를 떨구는 나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혹시 내가 소리를 지르거나 최소한 엉엉 울며 쫓아가기라도 했다면 나를 향해 뛰어오지는 않았을까. 혹시 ‘나인(je suis) 동물’은 ‘내가 쫓던(je suis) 동물’, 아니 내가 쫓아가야 했던 동물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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