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122호 - [교단일기] 그리스 비극에서 저항적 운명애를 배우다 / 박정수
[교단일기]
그리스 비극에서 저항적 운명애를 배우다
박정수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두 학기 철학 수업 후 쉬고 있는 야학 교사.
최근 안양으로 이사를 와서 생애 처음으로 경기도민이 됨.
코로나19로 집돌이 생활 중.
야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읽기로 한 건 장애학 서적에 나온 ‘비극 이론’ 때문이다. 장애학에서는 장애를 생물학적 손상으로 정의하는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산물로 보는 사회적 모델을 대립시킨다. 덧붙여, 의료적 모델은 장애를 개인적 비극으로 보고, 사회적 모델은 장애를 사회적 책임으로 여긴다고 설명한다. 매우 수긍하면서도, 슬쩍 의구심이 들었다. 비극이 꼭 개인적이기만 한가? 비극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일어나며, 또한 저항을 내포하지는 않나?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로 중도 장애인이 된 후 ‘어깨꿈’(어차피 깨진 꿈)이란 별명으로 장애인 차별 철폐 투쟁의 선봉장이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그리스 비극과 닮지 않았는가?
화요일 ‘아침꽃’ 세미나 시간에 그리스 비극을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비극’의 발생지인 동시에 ‘철학’의 발생지였다.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인데 상황은 논쟁적이고 주인공의 영혼은 상식을 초월했다. 그동안 이 재미난 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그리스 비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장애인야학 철학 수업에 비극을 읽을 이유가 차고 넘치게 생겼다. 장애학의 비극 이론을 교정하기 위해, 비극의 철학을 수립하기 위해.
파괴와 재생의 신 디오니소스와 비극
‘비극’(悲劇, tragedy)의 그리스어 ‘tragodia’는 ‘산양의 노래’를 뜻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제의 합창 찬가(디티람보스)가 비극의 기원이라고 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배우들은 산양의 뿔, 긴 귀, 꼬리를 지닌 사티로스와 실레노스로 분장하여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 도취의 신, 불화와 파괴의 신, 부활과 재생의 신이다. 비극은 인간의 삶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이야기의 형태로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파괴와 도취, 불화와 재생의 이야기로서 비극을 이해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다.
에우리디케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을 통해 디오니소스 종교가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신도는 주로 여자였다. 디오니소스 자신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독히 가부장적인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은 소수자였다. 디오니소스교는 투쟁(갈등, 불화, 전쟁)과 도취의 신으로 소수자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그리스 문화를 형성한 신은 질서와 조화, 형상과 예언의 신 아폴론이었다. 동방에서 유입된 디오니소스교에 대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박코스의 여신도들」은 대표적인 디오니소스 박해자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의 몰락을 그린 이야기다. 펜테우스는 박코스(디오니소스)의 여신도가 된 어머니와 여인들에 의해 찢겨 죽고, 테베의 백성들은 모두 고국을 떠나 이방을 떠돌게 된다. 펜테우스의 어머니가 도취 상태에서 자기 아들의 왼팔을 잡고 옆구리에 발을 받치고 어깨를 뜯어내는 장면에서 학생들은 ‘으~’ 신음소리를 냈고, 일말의 자비도 없이 테베를 멸망시킨 디오니소스적 복수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중에도 한두 학생은 웃으면서 왠지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디오니소스제에 참여한 고대 그리스인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저항적 운명애와 비극
디오니소스교에서 파괴와 재생은 신적이고 자연적이다. 인간에게 그것은 ‘운명’으로 다가온다. 비극은 그런 운명에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운명에 마주한 비극적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은 ‘먼저 생각하는 자’란 뜻이다. 그는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주어진 파괴와 고통의 운명을 겪기 전에 먼저 안다. 알고도 그리했다. 독재자 제우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 때문에.
기독교 이후 운명과 의지는 대립 관계에 놓여졌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건 의지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그렇지 않다. 학생들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유 의지를 불태우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애(amor fati)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이 권력자에 맞선 저항으로 이뤄지는 것에서 장애인운동의 영혼을 보았다. 장애는 고통스럽게 닥친 운명이다. 그 운명을 받아들여 장애인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은 현실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든 권력자에 저항하는 것으로, 그런 저항의 의지 속에서 장애인의 운명애가 완성된다는 것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배웠다.
희망의 맹목성과 운명애
재미있는 건 운명과 희망의 관계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건 ‘불’만이 아니다. 온갖 기술과 함께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었다.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치료약으로. 내다보지 못하기에 그 희망은 ‘맹목적’이다. 희망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갖는 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갖는 것이란 말이 놀라웠다. 「아가멤논」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의 전리품으로 데려온 카산드라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운명을 미리 안다. 그러나 아폴론의 저주로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예언을 하는 카산드라는 운명이 지식의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말한다.
한편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자신의 승리가 신들의 투표에 의한 것이라면서 “신들께서는 양편의 주장을 들으시고는 남자들의 죽음과 토로이의 파멸을 위하여 자신들의 표를 만장일치로 피의 항아리 안에 던져 넣으셨고, 그 반대의 항아리에는 희망만이 접근했을 뿐 그 안에 표를 던져 넣는 손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피의 항아리 반대편 항아리 안에는 희망밖에 없었다는 말은,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가 보낸) 재앙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과 통한다. 희망은 승리나 행복의 예감이 아니라 항상 재앙과 파멸의 운명에 따라붙는다. 그때 희망은 예측이나 근거에 의해서 갖게 되는 게 아니라 맹목적으로 갖는 의지다.
가부장체제를 파괴하는 여자들
그리스 비극 수업 때 가장 아쉬웠던 건 학생들 중 여성이 거의 없었던 점이다.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신도들은 대부분 여자였고, 비극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불화가 남녀 간 불화로, 페미니즘이 가장 유효한 분석틀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타임네스트라 이야기다. 그녀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을 죽인 이유는 출병 제물로 친딸 이피게니아를 죽였기 때문이다. 정복욕에 눈이 멀어 친딸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에 의해 살해당한다. 남매가 공모하여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 것은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한 복수였다. 그러나 학생들 대부분은 이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문제가 아니라, 권력 문제임을 간파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핑계고, 실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빼앗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왕가의 권력을 되찾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오레스테스의 친족살해 죄에 관한 재판이 아테네의 아에로파고스에서 열린다. 오레스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쪽에는 복수와 저주의 여신들(에리니에스)이 있고, 무죄를 주장하는 편에는 오레스테스에게 복수를 사주한 아폴론이 있다. 아폴론의 변론 중 압권은 에리니에스가 주장한 ‘혈족살해’에 대해 ‘누가 혈족이냐? 어머니는 양육자에 불과하고 생산자는 오직 아버지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학생들 대다수는 이 부계혈통설을 기각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죽인 죄와 친모를 죽인 죄 중 어느 것이 무거운가?’라는 논쟁적인 물음에 선뜻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함께 서구에서 대표적인 악녀로 꼽히는 여자가 ‘메데이아’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이아」를 읽을 때는 다행히 학생들 중 여성이 많았다. 철학2반 선생님이 외국 여행을 간 2주 동안 합반 수업을 했는데, 거기에는 영애 씨를 비롯하여 활달한 여학생이 많았다. 자기가 선택한 남편 아이아스를 위해 조국과 가족을 버리고 그리스로 온 이방의 여성 메데이아는, 남편이 출세를 위해 코린토스의 공주와 결혼하려 하자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메데이아는 마법을 이용하여 코린토스의 공주와 왕을 불태워 죽이고, 남편의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 죽여 버린다. 동림 씨는 출세욕에 눈이 멀어 새장가를 가려는 아이아스의 대사를 능청스럽게 읽었고, 영애 씨는 분노의 욕사발을 퍼부었다. 그러나 메데이아가 남편의 대를 끊기 위해, 남편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것에는 다들 동의하지 못했다.
인간의 수수께끼와 다리 개수
그리스 비극 수업 중 가장 수수께끼 같은 순간은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였다. 오이디푸스가 부지중에 길 다툼을 하다 친부를 살해한 후 테바이로 들어설 때였다.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여자 머리에 사자 몸통을 한 스핑크스였다.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내 맞추지 못한 인간을 잡아먹어 테바이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다가온 오이디푸스에게 스핑크스가 물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낮에는 두 개, 저녁에는 세 개인 것은 무엇인가?” 불길한 신탁과 불운의 살인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여 괴로워하던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는 답을 내놓았고, 새로운 지혜에 진 스핑크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꼬박꼬박 조는 학생들에게 나는 재차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읊었다. “아침에는 다리가…” 그 순간 아차 싶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수수께끼를 마저 낼 수 없었다. 유년기에는 네 발로 기고, 성년기에는 두 발로 걷고, 노년기에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게 인간의 본질이라고? 평생 두 발로 걸어본 적 없는 학생들 앞에서 인간의 본질은 두 발로 걷는 거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 수수께끼가 어처구니없이 느껴졌다. 플라톤도 인간을 이족보행을 하는 털 없는 동물로 정의한 적 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털 뽑은 닭을 가져와 던지며 ‘여기 인간이 있다’고 했단다. 인간의 본질을 겨우 다리 개수에서 찾다니!
그런데 이상하게 학생들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좋아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넷, 낮에는 둘, 저녁에는 셋인 것은? 인간! 뭐지? 화를 내야할 것 같은데 왜 좋아라 하시지? 다리 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든 건가? 아니면, 그 바보 같은 수수께끼가 너무 우스워서? 아니면 지루한 강의 중의 수수께끼가 그 자체로 재미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