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 121호 - 곁불 쬐러 오시라 / 최경미
곁불 쬐러 오시라
최경미 | 사이다라고 불린다.
다시 정처를 찾기 위해 암중모색 중이다.
9년 동안 일했던 대안학교를 그만두었다. 외부 사람이 되었다. 위치가 달라졌으니 동료와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했다. 지금껏 내부와 외부를 교차하며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동지적 관계를 맺어왔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실체로 연결되지 않는 추상적인 마음에 불과했다. 다시 어디에 발을 딛고 길을 만들어가야 하나, 내 삶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사상의 거처를 잃어버린 듯하여 잠시 절망했으나 경계를 두지 않을 수 있으니 자유로워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학교를 나오고 보니 새삼스레 대안학교의 좌표가 보였다. 그동안의 궤도를 이제는 ‘탈’해야 한다는 사실.
스물여섯번째 <노란들판의 꿈>의 슬로건도 ‘나-간다’였다. ‘탈’시설, 함께 살자. 우리가 서로 ‘탈’이라는 접두어를 함께 써 왔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다. 하지만 ‘탈’학교를 지향하며 20여 년 동안 ‘대안’을 만들어왔던 실천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만들기’ 운동이 되어버렸다고 무참하게 고백한다. 20세기의 ‘탈’학교 운동은 결국 무수한 대안학교를 만들어 냈다. ‘대안’은 학교를 넘지 못했고 대안‘학교’는 바깥을 향하는 교육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되었다. 학교를 나오니 비로소 그동안 최선을 다해 해왔던 일이 바로 한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우리는 망하지 않으려고 무능력을 합리화를 하고 있고 바깥을 향하지 않고 안을 지키려고 종종 중요한 것을 놓친다. 그렇게 점점 퇴색하고 보수적이 되는 거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탈’시설을 향하는 노들은 운동의 중력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질투하고 싶었다. 그리고 26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해 온 뜻과 마음에 의지를 보태고 싶었다. 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곳을 찾아올 때마다 가장자리를 확장하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노란들판의 꿈>도 현장 안과 밖의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축제의 시간으로 광장을 만들어 왔다. 올해의 꿈은 10년 전 석암 투쟁으로 탈시설 운동의 씨앗을 뿌린 여기, 마로니에 공원에서 ‘이제 나간다. 나, 간다’를 함께 외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우리는 함께 마로니에 공원 밖으로 ‘나가’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고병권과 박정숙 선생님이 낯설게?! 안내하는 축제의 시간에 합류했다. 예상치 못한 고병권 선생님의 존재만으로도 사회는 신선했다. 쿨레칸의 오프핑은 역시 흥겨웠고 압권은 노들 피플 퍼스트로 진행된 합창 메들리였다. 그 어떤 메시지보다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만든 신명남이 우리를 들썩이게 하였다. 감동이란 이렇게 메들리로 전달되고 움직이는 것이니라. 그리고 이어진 김동림과 박경석, 홍은전의 대담은 우리가 서로 고립시키지 않고 함께 돌보는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 포기에 맞서고 외면과 싸우며 삶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불씨를 지폈다. 특히 박경석 고장의 기정 씨를 돌보는 여러 활동가들이 정성과 함께 하는 삶에 말.잇.못의 글썽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고 소문내고 싶다.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러나 그들의, 지금 여기 서로의 삶을 외면하지 않은 그 용기를 고마워하는 그 마음은 오래 따뜻했다. 바로 뒤이은 활동가들의 명랑한 춤사위는 박고장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거라 믿는다. 기정 씨의 곁에, 박고장의 곁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곁에 또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야 <노란들판의 꿈>은 서로에게 밑불이 되고 사회의 불씨가 되는 광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한 자리에서 절망도 희망도 없이 허망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조한혜정 선생님이 누군가의 말을 빌려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지금은 무얼 해도 사람들의 의지가 모이지 않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마른 장작이어서 스치기만 해도 불씨가 붙어 활활 잘 타올랐는데 지금은 다들 젖어 있어서 불을 붙이려는 사람만 무력해질 뿐이라고. 지금은 사람들이 젖은 장작을 말리고 있는 때라고. 그래서 불씨를 붙이는 일이 더 귀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노란들판의 꿈>은 여전히 밑불이고 불씨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사회가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저항하고 투쟁하는 광장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서로 의지하고 돌보는 관계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젖어 있는 사람들이여, 노들에 와 곁불을 쬐며 말리시길.
아직 못다한 말
노들은 항상 빚이 있고 올 가을에도 그 빚을 해결하기 위해 판을 벌였고 나는 노들에 진 마음의 빚을 함께 함으로 갚는다. 노들 밖 주변을 서성이다가 이렇게 접속할 수 있는 자리가 이런 <노란들판의 꿈>이었고 그 시간을 빌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이심전심한다. 누구 덕분에, 누구를 위하는, 이런 마음과 의지를 품고 살아가는 게 더 어려워진 삶 속에서 오랜만에 당신들 덕분에 뜨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서 노들을 위하여 후원하는 마음이 생기고 실천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여러분들 덕분에 노들이 좀 더 풍요로워지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