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 121호 - 이 사람들 정말 문학이 체질이다! ‘백일장이 체질’ 심사 소감 / 박정수
이 사람들 정말 문학이 체질이다!
‘백일장이 체질’ 심사 소감
박정수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이라는 멋진 직함을
갖고 있지만 연구는 안 한다.
가끔씩 <비마이너> 취재 기사 쓸 때 뿌듯함을 느낀다.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시간에 그리스 비극을 강독하고 있는데
호응이 적어 걱정이다.
가사노동으로 임금까지 받고 있으며,
대학교 교양과목 강의를 부업으로 한다.
천성호 샘이 백일장 심사위원을 제안했을 때 나는 “네? 아~ 네!” 딱 3초 만에 승낙했다. 야학 행사와 교사회의에 자주 빠져서 미안했는데, 백일장 심사위원만은 왠지 거절해서는 안 될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구석 어딘가 처박혀 있을 국문학 박사학위증 때문일까?
작년에는 참석 못해서, 상상만 한 백일장 심사는 간단하고 여유로웠다. 출품작은 대략 스무 편쯤 될까? 그 중 ‘읽을 만한’ 작품은 열편이 채 안 될 거고, 그 중에서 대여섯 편의 수상작을 고르는 작업은 간단해 보였다. 여유롭게 심사를 마치고 짙어지는 마로니에의 가을을 즐기면 될 줄 알았다.
바보 같은 선입견이었다. 그동안 나는 노들야학과 문학을 몰랐다. 출품작들은 넘나 문학적이었고, 수상작을 고르는 작업은 넘나 힘들었던 것이다. 왜 심사위원이 나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유지영(前 국어교사), 장선정(노들 공장) 두 분의 심사위원이 더 있고, 심지어 그분들은 작년에도 심사를 맡았다. 심사는 여럿이 함께해서 쉬워지는 일이 아니다. 각자의 생각들을 모아 설득과 합의에 이르러야 하기에, 대충 생각할 수 없고, 판단의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심사 방법도 만만치 않다. 무려 서른다섯 편의 작품마다 심사표를 작성해야 한다. 7개 심사 항목마다 점수를 매겨 총점을 내고, 총평까지 적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세 명의 심사위원 각각이 5명씩 후보자를 내고, 토론을 통해 학생 6명, 교사 2명의 수상자를 뽑는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2시간. 처음이라서 그런가, 전체 작품의 수준과 특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한 편씩 읽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점수는 나중에 매기고, 일단 나는 작품을 읽어나갔다.
뜻밖에(?) 한 작품 한 작품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장애인이라거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거나, 발달장애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없었다. ‘접어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문학이 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받았다. 솔직히 학생과 교사를 구분해서 심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작품에서 나는 어떤 신체적 장애도, 어떤 정신적 장애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평상시 들을 수 없던 학생 분들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설사 그분들을 모른다 해도 출품작에 표현된 체험들은 보편적인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했다.
이영애의 「끝사랑」은 연애소설적 재미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수상작에 선정되었다. 17살 때 오빠 친구와 ‘썸 타는’ 장면은 손발을 오글거리게 했고, 느닷없는 이별과 그 오빠의 결혼 소식은 ‘상투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슬픔을 자아냈다. 다시 만난 오빠와 나눈 대화 “그때 왜 이야기 안 했어?”, “상처받을까봐”, “그래도 이야기 해줘야지. 내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는 사랑이 상처보다 강하다는 작가의 씩씩한 개성을 잘 느끼게 해주었다. 다만 바로 이어진 마지막 문장 “나도 널 사랑했어. 그런데 부모님 반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는 삭제하고 싶을 만큼 느끼하고 통속적인 판타지로 느껴졌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제목 ‘끝사랑’을 되새길 때, 첫사랑이 곧 끝사랑인 아픔에 가슴이 아렸다.
장애경의 「탄진 씨에게」도 백일장 주제(친구/가을/꿈)와의 연관성을 묻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감동을 주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에 뽑혔다. 같은 시설에서 만나 탈시설해 결혼까지 한 애경과 탄진 부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 같다. 이 서간체 작품은 탈시설 장애인의 삶이 동화가 아니라 리얼리즘임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모임 약속을 잊었다고 구박하는 남편에게 자기는 활동보조인과 둘이서도 잘 노는데 왜 탄진 씨는 그러지 못하는지, 왜 매사에 아내를 데려가려고 하고, 혼자서는 아니, 활동지원사와 둘이서는 나가 놀지 못하는지 반문하며, “저한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시설에서 나와서, 결혼도 하고, 같이 시위도 나가고, 집 문제도 해결했죠. 잘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같이 시위 나가고 모임들에 같이 나가는 것 좋아요. 다만 서로에게 떨어져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나가는 그런 연습도 이제는 해 봤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이 글은, 장애인 시설만 거주시설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구속하는 가부장적 가정 역시 자유로운 삶을 위해 벗어나야(바꿔야) 할 시설임을 시사한다.
이미경의 시 「비 와도 눈 와도」는 내가 강력히 추천한 작품이다. “노들, 비 와도 눈 와도 / 학교에 간다 / 친구들도 하루 종일 있고 / 명학이 할아버지도 있다.” 이렇게 딱 4행으로 이뤄진 시다. 현대 시조 같기도 하고, 일본의 하이쿠 같기도 한 이 시는 압축적 형식미가 압권이고, 그 안에 노들야학의 즐거움을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완벽하게 녹여냈다. 특히 마지막 행 “명학이 할아버지도 있다”는 결구(結句) 특유의 반전미를 구체성의 미학으로 구현하여 유머로 응결시킨 솜씨가 놀랍다.
김희자의 「일자리」는 시(詩)의 세계에는 발달장애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시 역시 형식미가 탁월하다. “청소하는 일 하고 싶어요 / 청소하는 것 좋아해요 / 물건 나르기 좋아해요 / 집에 물건 나르는 것 좋아요 / 손님한테 커피 주는 것 좋아요 / 커피 주는 것 시험보기도 좋아해요” 구절은 2행씩 대구를 이뤄 차이나는 반복의 리듬을 창출했다. 발달장애인 특유의 언어 습관이라도 좋고, 활동지원사와의 문답으로 얻은 문장이라도 좋다. 어쨌든 훌륭한 리듬이고, 그 리듬 속에 하고 싶은 일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좋아요. 행복해요 / 일하고 돈 받고 싶어요 / 하루 일하면 3만원 받고 싶어요” 구절은 ‘행복’ → ‘일’ → ‘하루 3만원’으로 구체화되는 의미 연쇄 속에서 웃음이 터질 만큼 즐거움 리듬감을 자아낸다. “머리끈, 머리핀, 시계 사고 싶어요 / 좋아요 / 강미애 선생님한테도 선물 사주고 싶어요 / 좋아요”로 이어져 마무리되는 구절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에서 시의 천재성을 찾은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의하게 만든다.
신기하게도 심사위원들의 마음이 통해서 짧은 시간에 당선작을 고를 수 있었다. 노들야학 백일장 심사를 하면서 새삼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문학에는 장애가 없다. 문학은 정상성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 삶과 내면을 집중해서 살피고 언어로 표현하는 모습이 너무 좋고, 문학을 통해 일상에서는 잘 못 보던 서로의 내면을 공유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노들야학 사람들, 정말 문학이 체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