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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친구 이야기

 

고병권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내게는 열두 친구가 있다. 1월의 명학은 며칠 전 노들에서 환갑잔치를 열었다. 학교에는 가 본 적 없지만 올해로 25년이 된 노들을 25년간 다녔다. 노들과 연을 맺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챙겨간 것은 한 조각의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온전한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노들의 깃발도 언제나 그의 품으로만 파고든다. 지금도 사람들은 거리에서 노

들을 찾을 때마다 깃발의 둥지인 그를 찾는다. 노들에서 공부해서 좋고, 밥 먹어서 좋고, 투쟁해서 좋다는 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김명학, 노들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2월의 경남은 지적장애인이다. 복도 벽을 타고 오는 노랫소리가 언제나 그녀보다 조금 일찍 등교한다. 행사 때 음악이 나오면 그녀는 친구를 맞이하듯 뛰쳐나가 춤을 춘다. 노들에서 글자를 하나씩 익히고 있다. “야학 오기 전에 이름은 썼어요. 근데 글자들은 너무 많아요. 배워도 배워도 새로운 글자가 계속 나와요. 아는 글자는 반가운데 모르는 글자는 힘들어요.” 사귀기에는 너무 많은 글자들. 힘들면 그녀는 글자들을 오려낸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들은 종이목걸이가 되고 어떤 것들은 딱지가 된다. 또 어떤 것들은 어느 부족의 화폐였던 조개더미처럼 노들 어딘가에 수북이 쌓여 있다.

 

  3월의 수연은 반짝이는 눈과 살인미소의 소유자다. 장난기도 많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야’ 하고 불러 세우고는 ‘아니’ 하고 돌려보낸다. 누구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눈빛과 미소를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고 ‘야’ ‘응’ ‘아니’ 등의 외마디 말을 한다. 이 모든 게 등을 흠뻑 적실 정도로 힘든 일이다. 그런 그녀가 손가락에 걸린 줄을 까딱하면 작은 선풍기가 돌고 그 바람에 종이 흔들리면 노들음악대의 연주가 시작된다. 교사들은 그녀의 외마디 말과 함께 실려 온 눈빛과 표정을 읽으며 대화한다.

 

  4월의 호식은 목소리가 걸걸하고 우렁찼다. 이제 그소리는 기억 속에서만 울린다. 꽃들이 화사하게 피던 봄날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술을 좋아한 그는 언제부턴가 니체의 말들을 그만큼 마셔댔다. 그는 루쉰의 먹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카프카의 ‘빨간 피터’를 자기 이야기마냥 좋아했다. 그러나 자기 정신의 토양은 장애를 껴안고 울고 있을 때 할머니가 토닥이며 들려준 옛날이야기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꿈은 동화작가였다.

 

  5월의 선심은 온화하지만 강하다. 38년 동안 집에 갇혀 살다 생애 첫 외출한 곳이 시설이었다. “유리병에 갇힌 느낌, 그거 알아요?” 원장은 그녀의 삶 전체를 쥐고 있었다. 활동가의 도움으로 거기서 나왔다. 그 뒤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며 매달 20만원씩 8년간 모았고, 그렇게 모은 2000만원을 탈시설 운동가들에게 내놓았다. 다른 데 쓰지 말고 한 명이라도 시설에서 더 데리고 나오라고. 그들에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6월의 정숙은 시인이다. 몇몇 사람들과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같이 죽자’는 아빠 몰래 집을 나왔다. 양장 기술을 배웠고 여기저기서 일을 했다. “노들은 처음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어요.” 어디서나 사람들은 그녀를 의식했고 그녀도 사람들을 의식했다. 그런데 노들에 오면 반갑게 이름을 불러줄 뿐 아무도 그녀의 장애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종이접기에 열심이었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까봐. 그런데 이제는 혼자 남겨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은 스쿠터를 타고 멀리 나가보기도 한다. 뒤에 믿는 게 생겼을 때 사람은 앞으로도 가볼 용기를 내는 법이다.

 

  조개가 뻘에서 품어낸 진주 알갱이처럼 친구들의 보석같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죽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던 방구석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좋다는 7월의 경진, 좋을 때 제일 크게 웃고 슬플 때 제일 크게 우는 8월의 소민, 배곯고 살았던 때가 길었다며 동료의 밥을 꼭 챙기는 9월의 태종, 자유를 가져야 꿈이 생긴다고 말하는 10월의 동림, 어디서든 혼자 있기 싫다며 북치고 노래하고 수다 떠는 노들을 사랑한다는 11월의 애경, 노들이 세상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곳이라고 자랑하는 교장 12월의 경석.

 

  이들 모두가 내게는 각별한 친구다. 내게는 이 열두 친구 외에 또 열두 친구가 있고, 다시 또 열두 친구가 있다. 나의 1년은 이들과 보내는 12개월이다. 며칠 전 야학 학생들의 급식비 마련을 위해 탁상용 달력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스마트폰에 일정관리 앱이 넘쳐나는 때에 누가 그런 걸 찾겠냐고. 하지만 달력에 친구들 사연을 하나씩 옮겨 담으면서 나는 우리 달력에 채워야 할 것이 일정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가 삶의 진주 알갱이 하나 없이 일정만 가득한 날들을 찾겠는가. 게다가 이 달력은 노들에서의 내 소중한 배움을 담고 있다. 어떻게든 자율적인 연구자로 살아보려 했던 내게는 자립이야말로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립의 환상이 우리 삶의 상호의존성을 가린다는 것을. 노들의 친구들은 자율적인 삶이란 오히려 함께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은 하나다. 누구에게 우리의 발우를 의탁할 것인가. 누구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그리고 결심했다. 당신에게 탁발해보기로(https://www.tumblbug.com/nodlcalendar). 우리의 자율적 삶을 위해.

 

*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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