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여름 <노들바람> 108호 中]
[ 노 들 의 벗 , 김 호 식 을 보 내 며 ]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던 사람, 김호식
노규호│철학반 교사로 노들장애인야학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혐오담론 세미나에 늦게나마 참여해 함께 하고 있습니다.
2011년 노들야학 인문학 세미나에서 형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12년, 13년, 14년 주말에 활동보조로 형을 만났다. 간혹 빼먹은 적도 있지만 대부분 형을 만나러 갔다. 형을 만났던 그 주말에 “나는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거의 매일같이 들었다.
책을 4~5시간 읽고 나면 형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형도 나도 이불 위로 뻗었다. 형은 소주를 땄다. 그리고 진지하게 하는 말이 “니체, 얘가 진짜 골 때리는 애야. 얘가”, “이것도 좀 읽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지 되냐”였다. 공부하고 싶다는 말은 술 먹자고 하는 말 만큼 자주 들었다.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의 소리도 자주 들었다. “공부를 해야지. 사람은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데 왜 일찍이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거야.”, “(복지관에서는) 진도 못 따라오는 사람은 거들떠도 안 보는 거야.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어떤 날은 “책 좀 읽자”며 책 읽기가 소홀해졌다고 나를 다그친 날이 있었다. 또 한 번은 같이 책 읽자고 높은 해방촌 고개를 휠체어를 타고 땀 흘리며 넘어오기도 했다. 야학의 수업 시간 1시간 전에 만나 미리 책을 읽기도 했다. 물론 매일 책만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술에 밀린 날도 있었다. 그러나 힘을 냈던 날들이 쌓여 니체나 루쉰의 말을 형의 입에서 듣던 날, 나는 공부든 무슨 일
이든 정해진 능력 대신 의욕과 작은 용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형은 또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말로밖에 못하지만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있었을 때 할머니들이 모여 나눈 수다를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이야기를 쓰고 싶다고도 했다. 그렇게 형을 만나는 한 주, 한 주 “공부하고 싶다”, “이야기 쓰고 싶다”는 주문을 들었다. 그 주문들, 발걸음이 큰 선물로 남아 있다고 형의 귀에 그리고 사람들의 귀에 전하고 싶다.
생각하면 같이 지내며 지치고 회의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웃음 짓던 날들이 있었다. 평소 1시간을 못 넘기던 글 쓰던 시간이 월드콘을 먹고 4시간 넘게 집중했던 날, 못 할 것 같다던 니체의 구절 암기를 주말마다 연습해 연극으로 올렸던 날, 장애를 낫게 해준다고 하던 교회 단식원에서 안 좋았던 기억을 토로하며 스피노자에 대해 2시간 넘게 같이 이야기한 날, 야학
친구들과 함께 부산에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시위하다 뒤로 빠져 컵라면에 소주 먹던 날, 노동에 대해, 노동문제는 무엇인지 토론했던 날, 형이 내가 만든 퍼포먼스에 막간 출현하려고 비 쫄딱 맞고 온 날, 둘이 소주 먹고 누워 한 줄 시 짓기를 1시간 넘게 했던 날, 무슨 일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잔뜩 우울했을 때 형이 술 사줬던 날.
언젠가부터 내 입술은 형을 만나는 수유역에 내리면 힘이 들어갔다. “와봐라”, “그렇지 뭐!”하는 배짱 같은 것도 나타났다. 나는 그 이유가 동네가 으슥한 탓인가 싶었다. 이제 보니 그 표정은 형한테서 왔다. “해보는 거지, 뭐. 내가 한 두 번 해보냐.”, “뭘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사냐? 그렇게 신경 쓰면 피곤해서 못 살어. 내 몸 잘났다 하면서 사는 거지. 뭐.”, “내가 대담한 것 같이 보여도 엄청 소심하다. 누나도 시집갔겠다. 야학 다니면서 나도 집 나와 살아볼 수 있겠지. 뭐 그래 본거지.”, “저기요, 저기요, 이것 좀 올려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음식은 흘리면 닦아먹으면 돼. 근데 왜 내가 내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만 둬야지 되냐.”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면 내가 좋아하던 형의 일부, 그 억세면서도 환히 웃던 표정이 옮겨왔던 것 같다.
호식이형! 형이 남긴 그 표정들 이렇게 있네요. 함께 하는 동안 정말 즐거웠어요. 행복했어요. 그리고 약속한 동화 100편 쓰기 남은 97편은 꼭 완성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