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117호 - 태종의 이야기 / 한명희
태종의 이야기
2019년 달력을 준비하며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인터뷰·정리 한명희
대전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야. 내가 15살 때 소를 120마리인가 키웠어요. 셈을 못하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척 많이 키웠고, 그때 한 달에 쌀 두 가마니 값을 받았지. 큰돈이었어. 아들 둘, 딸 셋 중에 내가 둘째인데 20대에 형이 좀 일찍 죽었어. 젊었을 때도 딱히 집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형이었는데, 공장에서 다쳤거든. 지체장애 1급 판정받고 그렇게 살다가 먼저 떠났지.
가난했던 가족.
엄마랑 아빠가 글을 하나도 몰랐어. 수도 모르고. 남의 집 농사일 도와주며 다니셨지. 그렇게 일 다니고 하느라 내가 동생 세 명 다 업어 키웠어. 그때는 학교를 가려면 등록금을 내야 했거든. 난 초등학교 다닐 생각도 안 했어. 동생들이나 학교 보내야지 싶었지. (안 억울해요?) 한 번도, 그런 생각 안했어.
21살 되던 해에 (소 농장) 지겨워서 그만두고 공장에 다녔지. 그렇게 몇 년 좀 다녔나. 집에 오는 길에 교통사고 나서 다리 하나 잘랐지. 그때부터 다리 하나에는 의족 끼우고 다녀. 대전에는 돈 되는 일도 별로 없고 해서 서울로 올라왔어. 병원도 서울에서 치료받아야 더 좋을 거 같았고. 모은 돈으로 전셋집 모아서 살았는데 형이 왔지. 그냥 망나니 형이 아니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형이 돼서 말이야. 공장에서 다쳐서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왔지. 서울에 다니던 큰 병원에서 퇴원하고 서울 내 전셋집에 걍 데리고 있었어. 대전까지 오고 가기도 어려우니까. 내가 똥오줌 다 받았어. 그렇게 살다보니 형수도 와서 같이 살더라. 정말 진절 머리가 났어.
수중에 돈 20만원 있었는데 그 내 집에서 내가 나왔어. 부산에 내려갔지. 그때 부산역에서 노숙도 많이 했어. 교회 무료 배식하는 데에서 식당일 좀 하지 않겠냐 해서 몇 년 들어가서 일도 했어. 방 한 켠에 잠잘 수 있는 공간도 있었거든. 그렇게 한 2년 살았나. 주민센터에 갔더니 내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라는 거야. 나는 신청한지도 몰랐거든? 알고 보니 그 교회 목사가 내 복지카드 들고 가서 신청하고 내 수급비를 다 가져간거더라고. 교회에 데리고 있던 노숙인들 다 그렇게 했어. 나 그 교회에서 나올 때 돈 한 푼 못 받았다.
그때쯤 형수랑 엄마가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닿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지. 노인시설 가서 식당에서 일도 하고 했지. 30대 중반에는 안 해본 일 없다. 붕어빵 장사도 하고 했어. 그렇게 돈 좀 모아서 고시원 들어갔어. 가서는 총무 일도 한 6년 했어. 그렇게 서울에 좀 정착하니 장애인단체 등 소식도 좀 듣게 되고 했지. 그렇게 노들야학을 알았어.
지금은 노들야학에서 복지일자리(한 달 56시간 근무, 종로구청에서 임금 지급)로 야학 점심 급식 설거지일 해. 이거 일하는 건 암것도 아냐. 고맙지. 일을 좀 더 했으면 좋겠는데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이니까 돈을 100만원 이상만 벌어도 수급자가 탈락이 돼버려. 수급비 한 달에 80만원도 안 되는 거, 걍 줘버려도 되는데 의료급여 때문에 안 되어. 나 아직도 글도 못 읽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선생님들 참 고마워.
밥도 같이 먹고 하니 좋고. 배곯고 살았던 게 길어서인지 삼시세끼 꼭 챙겨 먹어. 밥 같이 먹어서 좋아. 반찬도 맛있고.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야학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도 지원해주고 할 텐데. 언젠가 그런 일도 한번 해보고 싶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바랄 거 하나 없어. 그리고 억울한 거 하나 없어.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