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116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길동무- 고병권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길동무
고병권│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노들야학에서 철학 수업의 첫 교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였다. 8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지난 학기 몇몇 학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이번학기에는 꼭 니체를 해달라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가장 큰 목소리를 낸 것은 지호 씨와 홍경 형이었다. 지호 씨는 지난학기에 수지 씨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어린이용 해설서를 선물했고(수지 씨는 이게 여자 친구한테 할 선물이냐고 내게 따지듯 푸념했다), 홍경 형은 『언더그라운드 니체』를 가져와서는 서명해달라고 했다.
야학에서 내가 철학 교사를 너무 오래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몇몇 학인들에게는 ‘니체’가 ‘철학’과 동급인 것 같다. ‘왜 니체를 읽으려느냐’고 묻자 지호 씨는 ‘철학 공부하고 싶어서요’라는 이상한 대답을 내놓았다. 프리모 레비를 읽었던 지난 학기 철학 수업은 철학 수업이 아니었단 말인가. 『차라투스트라』를 택한 것은 내 개인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독서가 가능할까. 8년 전에는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이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 참 아슬아슬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이번에 이 책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읽어나갔다. 『차라투스트라』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난해한 책으로 통한다. 그런데 여러 번 느낀 바 이지만, 니체를 처음 접한 사람들과 가장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때로는 깔깔거리고 때로는 신기해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 『차라투스트라』이기도 하다.
“깨달은 바 있어 십 년 동굴 생활을 접고 하산을 시작한 차라투스트라. 그는 사람들에게 ‘신은 죽었다’는 복음을 선물하려고 신나서 내려오는데…” 이렇게 이야기꾼처럼 풀어내기 시작하자 모두가 내 입을 주시했다.“그런데 하필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이 성자였어요. 매일 찬송가를 지어 신께 바치는 사람이요. ‘신은 죽었다’는 말을 선물로 들고 온 사람과 매일 신에게 선물을 지어 바치는 사람.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첫 시간이 이런 말로 끝나자 몇몇 학인이 ‘이런 게 어디 있느냐’며 뒷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TV 연속극처럼 다음 이야기를 끌어들이고는 중단하니 감질이 난 것이다. 뜻밖의 호응(?)을 보고는 이번 학기 수업을 계속 이런 식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꾼처럼 책을 읽어가기. 8년 전의 긴장감은 없었지만 그때보다는 한결 여유 있고 재밌는 시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 번째 시간에도 세 번째 시간의 이야기를 살짝 끌어들이고는 끝냈다. 머리말의 6절 첫 문장에서 끊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군중 앞에서 설법을 펴던 중, “바로 그 때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모든 사람의 눈을 얼어붙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는 문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빨리 말해달라는 원성을 들었지만, ‘누군가 크게 다쳐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예고만을 해두고는 끝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어떻든 그럭저럭 마무리가 괜찮았다.
세 번째 시간을 시작하며 지난 시간의 광고가 과하지 않았나 걱정이 됐다. ‘입을 다물게 하고 눈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어떡하나. 별 수 없었다. 시치미 떼고 글을 읽어갔다. 줄을 타는 곡예꾼을 광대가 뛰어넘는 장면이다. ‘사람을 뛰어넘는다’는 말 때문에 광대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처럼 보인다. 그러나 흉내일 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긴 여정에서 마주칠 여러 ‘사이비’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남의 머리를 딛고 기어 올라가는 시장터의 원숭이들처럼, 남을 밀쳐내고 남을 뛰어넘는 인간형이다. 위버멘쉬는 그와 반대다. 위버멘쉬가 딛고 올라서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정수리다.
그나저나 예고편은 무슨 살인 사건처럼 해놓았는데,‘위버멘쉬’니 ‘자기극복’이니 하는 말들을 꺼내면 학인들의 눈은 얼어붙기는커녕 무겁게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무슨 추리소설처럼 극적인 반전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할 텐데…. 과장 광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까지 해두었다. 두 개의 탑 사이에 줄이 걸려 있었다. 한 쪽 탑문이 열리더니 곡예꾼이 나와 줄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주춤주춤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 중간에 이르렀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뒤를보니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없었다. 나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는, 곡예꾼은 어찌해야 하느냐고 학인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탄진 형도, 지호 씨도, 홍경 형도, 영은 씨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탑문이 또 열리더니 광대가 나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곡예꾼을 쫓아왔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어서 앞으로 가지 못해, 이 절름발이야!” 이 느림보야, 이 핏기 하나 없는 놈아! 탑 속에나 처박혀 있지, 뭐 하러 나왔어? “누군가가 너를 그 속에 가두었어야 했는데. 너는 지금 너보다 뛰어난 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잖아!”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기(寒氣)를 느꼈다. 예전에 읽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차디찬 고드름처럼 매달려있는 게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책인데, 비유와 상징은 오간 데 없고, 차가운 현실이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어떻게 노들야학에서 ‘절름발이’가 비유이고 상징일 수 있겠는가.
‘이 절름발이야, 탑에나 처박혀 있지 왜 기어 나와서, 우리 시간을 빼앗는 거야.’ 이동권 투쟁에서 수도 없이 듣는 말. 꼭 투쟁의 때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언제나 접하는 말. 번잡한 길을 절뚝이며 걸을 때, 출퇴근 시간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오를 때, 때로는 눈빛으로 때로는 노골적인 혼잣말로 광대의 언어가 튀어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 펼쳐진 텍스트에서 눈을 떼고 학인들을 보았을 때 여러 사람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벌벌 떨던 곡예꾼은 앞서 학인들이 외쳤듯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소리를 지르며 광대가 그를 뛰어넘었다. 깜짝 놀란 곡예꾼은 발을 헛딛었고 보조 장구인 장대를 놓치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몇 학인이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어…’ 정숙 샘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탄진 형도 얼어붙은 듯 입을 닫아버렸다. 탈시설의 기억을 떠올리며, 줄 중간에서 머뭇거리던 곡예꾼에게 ‘앞으로 나가야 한다’며 손을 누구보다 크게 내저었는데, 사태의 끔찍한 전개에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구경꾼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진 자리, 차라투스트라는 곡예꾼 곁에 앉았다. 곡예꾼은 자신이 지옥에 가는지를 물었다. 그를 가두고 훈련시켰던 이들이 그동안 지옥에 관한 이야기로 그를 주저앉혔던 모양이다. 온갖 이데올로기와 신화, 거짓 이야기들이 장애인들을 그렇게 만들 듯이. 차라투스트라가 그에게 말했다.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곡예꾼은 자신이 짐승처럼 살았다고했다.
“사람들이 매질하고 변변치 못한 먹이를 미끼로 줘가며 춤을 추도록 훈련시키는 짐승 말이오.”곡예꾼이 줄타기를 시작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곡예꾼의 줄타기는 인간을 박탈당한 짐승에서 인간을 넘어선 위버멘쉬로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위버멘쉬를 향해 한 발씩 내딛었다. 그는 과감히 탑의 문을 열고 나왔으며, 비록 바닥에 떨어졌을지언정 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마지막 숨을 잡고 있던 곡예꾼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나는 비록 생명을 잃는다 해도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셈이오.”그의 말은 2천 년 전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죽음에 관한 온갖 신화들에 맞섰다. 죄, 심판, 지옥 같은 것은 없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은 없으며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 죽은 뒤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라. 그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지옥은 없다. 죄도 없다. 업보도 없다. 다만 삶이 있을 뿐.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존재하는 것이다. 위협과 협박으로서, 폭력과 감금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에 대한 포기로서. 그렇게 보면 곡예꾼에게 지옥은 죽기 전에 끝이 났다.
그가 자유의 여정을 시작한 순간, 다시 말해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이어진 밧줄을 타기 시작한 순간에 말이다. 엄밀히 하자면 곡예꾼은 짐승생활을 ‘끝냈다’. 물론 죽음 때문에도 그것은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그것을 ‘끝냈다’. 둘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자유를 살지 못한 채 맞은 죽음과 자유인으로서 맞은 죽음. 죽은 채로 살아있던 사람과 살아있으므로 죽지 않았던 사람. 두 사람이 맞은 죽음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곡예꾼을 몰아붙이던 광대의 말을 환기하며 정숙 샘은 말했다. “살아오면서 진짜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병신이라는 말, 세상에 왜 나왔냐는 말. 근데요. 나는 정말 잘 죽기 위해 살아요.”
나로서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죽는 건 죽는 게 아니라는 것. 말은 이중으로 꼬여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죽기 위해서는 철저히 살아야 한다고. 그동안 죽어지낸 자야말로 내 안에서 죽어야 한다고. 두려움이든 소심함이든 게으름이든 탑 속에 나를 가두었던 모든 것들과 철저히 결별해야 한다고.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몰락’에서 시작하는 이유, 그것도 ‘철저한 몰락’에서 시작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해서 첫 번째 길동무를 얻었다. 비록 죽은 사람이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파멸을 맞았던 사람,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기꺼이 삶의 길을 주춤주춤 걸어갔던 사람, 그가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길동무였다. 이번 학기 우리의 수업도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