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116호 -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10년의 기다림 / 김성진
10년의 기다림
김성진│시설 생활 26년 만에 극적으로 자립해서 살아온 지 11년...
딱히 직업은 없으나 운동선수(보치아), 배우 등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설은 감옥이었다.
아침 6시에 밥을 먹고 12시에 점심밥을 먹고 저녁 6시에는 저녁을 먹고 9시에는 잠을 자야 했다. 끼니를 거르면 개인적으로 밥을 못 먹는다. 누가 그랬던가 시설에 있으면 편하다고...., 시설은 결코 편하지 않는 곳이다. 요즘 시대에는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시설에서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일쑤였다.
그래서 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서 죽더라도 그 안에서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시설에서 죽으면 아무도 몰라준다. 무슨 말이나 하면 지금부터가 무서운 시설 얘기를 할 것이기에 놀라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공감하실 거고 또 어떤 분들은 믿기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 나는 내가 있었던 시설 이야기를 할 것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분들도 있겠고 믿기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난 2살 때 시설로 들어가서 30살에 자립을 했다. 실제로 난 2살인데 시설에 들어가는 나이는 4살부터이다. 난 사실 2살 적다.
나는 6살까지는 직원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해야 했다.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고 그 누구도 함부로 거역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직원 말이라면 잘 들었다. 7살이 될 무렵 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곳 말고 밖에서도 똑같이 하는지 내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학교에 들어가서 외부 아이들을 만나고, 수업을 같이 하면서 점점 친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생기자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시설 아이들이 직원들 말에 대꾸를 하고 자기주장도 생기고 그래서 어느 날 어떤 아이가 직원에게 자기주장을 얘기를 했는데 갑자기 그 애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나 보다.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에 시설 아이들은 그저 직원 말에 복종해야 했다. 물론 직원도 사람인데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죽도록 아이들을 패는 건 비상식적이다. 시설은 각방에 아이들이 9~10명이 있고, 그중에 1명이나 2명은 좀 똑똑한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한 아이가 그 방에 우두머리가 된다. 우두머리가 돼서 좋은 것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머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밖으로 나가면 그 우두머리와 그 아이가 직원에게 맞아야 했었다.
나도 역시 우두머리가 돼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게 되면 나 역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어느새 나도 역시 직원들이랑 똑같이 난폭해진다. 그래도 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도저히 못 참아서 직원에게 한마디 건넸다. “저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난 그날 이후로 미운털 박혀서 3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학교도 제대로 못 나갔다. 또 그 말에 소문이 안 좋게 나서 어디를 가든 욕이란 욕을 다 듣고 지냈다. 그렇게 살고 그러다가 17살이 되자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몸에 강직이 오고 강직이 오니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점점 다리가 오그라들고 바닥에 않지를 못하고 직원에게 말을 해도 듣지를 않고 결국에는 너무 아프니까 원장에게로 가서 병원에 가자고 얘기를 해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갔는데도 이상이 없다고 나오자 집으로 왔다. 계속 식은땀이 흐르고 날이 가면 갈수록 통증은 심하고 그래서 어느 날 방을 옮기게 된 날이 왔었다.
그 당시에 한 직원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원장한테 가서 그 방으로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그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계속 몸이 아프고 그러자 그 직원이 병원을 여러 군데 데리고 다니면서 병명을 알려고 수술도 여러 번하고 여러 약도 먹여보고 그래도 안 나아서 마지막으로 병원을 한 군데 더 가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시설에 가기로 했다. 그 병원은 뇌성마비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병원에 가서 상담도 하고 치료도 받고 그래서 결국에는 병명이 나왔다. 스트레스성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직원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고 편하게 놔두라고 해서 그날 이후로 직원이 나를 신경을 안 쓰게 했고 물론 강직은 안 났지만 약을 먹으면서 지냈다. 그 직원에게 자식들이 있었는데 아들 1명에 딸 1명이었다. 아들이 어느덧 군대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직원이 아들을 군대 안 보내려고 시설에서 나갔다. 직원이 나와 나보다 8살이 많은 형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다. 같이 가면 각자 방을 주고 외출도 마음대로 해주겠다고 하면서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때 당시 20살이었다.난 혼자 사는 것이 꿈이었고 아무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직원 말에 혹하는 마음에 같이 시설에서 그 직원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일주일은 집에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답답하지 않은 날이 지나자 외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외출하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뀌면서 “너를 어떻게 데리고 나가고 누가 들어서 휠체어에 태워서 앉혀주니!” 난 순간 당황했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했다. 그렇지만 서운했다.
아들도 있는데 아들이 들어주면 되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시설에서 데리고 나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며칠이 지나 직원은 아들 군대면제 서류를 넣고 아들은 면제가 됐다. 직원이 돈이 떨어지고 일을 구하려고 해도 못 구했다. 갑자기 나와 시설에서 같이 나온 형을 불러서 주간보호센터를 하자고 했다. 난 우리집도 아니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 그래서 주간보호센터를 하려고 집도 개조하고 논밭도 가꾸기 시작해서 한 달이 되자 주간보호센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맡겨놓고 안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아이들이 어느덧 10명이 되자 또 집을 개조를 하면서 넓혀갔다. 그러자 아이들이 늘면서 작은 시설이 되었다. 아이들이 늘자 당연히 자유도 없어졌고 또 다시 그 전에 살던 시설 상황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직원은 원장이 되고 아들은 목회자가 되어 교회 일로, 딸은 시설 직원으로, 시설은 점점 커졌다. 처음과 다른 성격으로 변한 직원은 짜증과 화를 나한테 풀고 더 나가서는 아이들이 잘 못하게 되면 나한테 화살이 날아와 내 마음은 상처로 물들게 되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거기에 찾아오던 나를 좋아하는 봉사자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많은 일들과 많은 사고가 있었다. 집을 비닐하우스로 만들어서 불이 나지 않나, 아이들이 화가 난다고 나의 한쪽 눈을 잃게 했고, 30살이 되도록 많은 일이 있었다.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제 나의 자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립한 계기는 시설 원장이 점점 잔소리가 심해져서 참다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시설에서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활동보조지원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 뉴스를 보고 바로 실행을 했다. 봉사자 누나, 형한테 부탁했는데 다 똑같은 말이었다.
“네가 혼자 어떻게 살 거냐”고. 그리고 “너의 마음도 알지만 그래도 참으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거절을 했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한 누나와 계속 연락을 하면서 그 누나를 졸랐다. 내가 하도 졸라대서 끝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 누나가 도와주기로 한 다음에 나는 차근차근 내 짐과, 같이 나온 형의 짐을 다른 누나에게 붙여달라고 했다. 필요한 물품을 인터넷으로 사서 시설에서 나오게 해준 아는 목사님의 교회로 붙였다. 마침내 시설에서 탈출하는 날이 되었다.
비가 억수로 내렸다. 원장과 딸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러 나갔다. 누나가 차를 끌고 와서 나를 차에 태우고 다른 누나를 만나서 그 차에 같이 타고 누나가 아는 교회로 갔다. 나와 같이 나온 형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교회까지 갔을 거다. 시설에서 나온 지가 10년이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교회로 갔다. 방이 3~4개가 있었는데 한 방이 비어있어서 그 방을 당분간 쓰기로 했다. 교회에 있으면서 활보시간과 전동휠체어를 신청했다. 물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누나가 다 알아보고 신청을 해주었다. 나한테는 너무너무 고마운 누나다. 교회가 작아서 방도 작았다. 화장실도 밖에 있었고 불편하지만 좋았다.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신다고 해서 또 다시 누나가 원룸을 알아보고 구해줬다. 그래서 원룸에서 살다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야학을 알아보고 서울에 있는 작은 야간학교로 갔다. 하지만 그 야학은 나에게 수준이 맞지 않아 야학 선생님에게 의논을 한 다음에 노들야학에 알아보고 들어가게 되었다. 노들야학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박경석 교장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극단판이 생겨 6년 동안 활동을 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든 서울에 올라오려고 도움주신 것을 하나도 안 쓰고 모아서 서울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로 이사하게 되었다.
시설에 있는 형이 나오고 싶다고 해서 오피스텔을 큰 거로 얻어 그 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시설에서 나온 형이 갑자기 나가서 혼자 살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노들에 있는 체험홈에서 지내게 되었다. 도움을 받아서 1년 동안 돈을 모았다가, 또 다른 아는 형이 도와 달라고 해서 송파구에 집을 얻어 같이 살게 되었다. 그 형이 임대 아파트가 돼서 나갔고 혼자 월세 40만원을 내려니 감당하기가 어려워 임대아파트를 신청을 했는데 당첨이 돼서 이사했다.
지금 가끔씩 힘이 들 땐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처음 마음가짐으로 항상 살아야 하고,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 자립이란 말은 무겁지만 그만큼 무거운 길을 가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 지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