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 111호 - [노들아 안녕] 노란들판에 날리는 편지
[노들아 안녕]
노란들판에
날리는 편지
이승헌 | 오래오래 전 에바다 투쟁을 계기로 노들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사)노들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다, 최근 인강원 보호작업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살고 있다.
노들을 떠나온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밀려있던 일들을 허겁지겁 마무리 하고 떠나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8월이 되었네요. 무더운 여름, 노들의 모든 상근 활동가 여러분은 안녕하신가요? 노들은 지금쯤 야학 방학이 끝나고 저녁밥 먹는 시간이 다시 북적이기 시작하겠네요.
저는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곳 인강원 보호작업장으로 옮기면서 가장 좋은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출퇴근하는 거리가 짧아졌다는 점일 거예요. 노들에서 일할 때는 두 시간 가까이 걸려 출퇴근을 했었는데, 여기는 의정부에 붙어있는 곳이다 보니 차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네요. 그만큼 여유 시간이 만들어지니 마음에도 여유가 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 문제투성이의 작업장을 어떻게 바꿔 놓아야 할지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정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가장 먼저 종사자들의 근무 시간과 형태부터 바꿔놨고, 요즘은 회계 시스템을 기존의 단식부기에서 복식부기로 변경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들을 하고 있답니다. 이건 제가 직접 처리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노들에서도 회계 입력하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네요. 그래도 필요한 일이니 해야겠지요. 회계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로 일한다는 것은 종사자들이 눈감고 일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눈을 뜨게 만들어야죠. 그 밖에도 여러 시도들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준비하고 있답니다.
한 가지 가슴 아픈 일은,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작업장에서 일하던 발달장애인 한 분이 가족들에 의해 거주시설에 입소한 일입니다. 아마 부모님들이 연로해지시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탈시설이라 하면 거주시설의 장애인들을 지역사회로 나오게 하는 것만을 고민했었는데, 사실은 보호작업장이나 복지관을 이용하는 중증 발달장애인들 역시 예비 시설 입소자들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언제든 가족들의 형편에 따라 시설에 입소해야 할 처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탈시설과 자립을 위한 노들의 여러 활동들이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답니다.
노들에서 보냈던 지난 2년 2개월의 시간들은 저에게 참으로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노들에 오지 않고 에바다에 계속 있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중요한 것들을 많이 경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탈시설에 관한 경험과 이야기들이 아닐까 생각해요.
미처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공동모금회가 지원했던 ‘나도 혼자 산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시설장애인들의 탈시설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큰 경험이었고, 앞으로 이곳 인강원에서도 이어가야 할 중요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주시설과 작업장과 인강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애 주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발달장애인들이 있는 인강재단과, 탈시설에 대한 고민과 실천의 대표적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노들이 연결되어 무언가 도모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거주시설 발달장애인들은 야학의 낮 수업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제는 범위를 더 넓혀서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 인강학교의 학생과 학부모들, 인강재단의 임직원들 모두를 대상으로 장애인권, 탈시설, 자립과 같은 문제들을 놓고 함께 고민하고 공동의 실천을 해볼 수 있다면 매우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띄우는 오늘은 무척이나 덥네요. 불과 며칠 전에는 지난 십수 년간 장애인 동지들 곁을 지켜주고, 우리 장애운동에 빛을 비추어 세상으로 하여금 장애인들의 절규를 보게 해주었던 종필이 형이 우리 곁을 떠나는 슬픈 일도 있었지요. 그래서 어쩌면 더위에 슬픔에 더 지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노들 가족 여러분, 힘내세요! 농부들이 가뭄에 애타고, 장마에 지치고, 태풍에 부대끼면서도 가을 노란들판을 꿈꾸며 이겨내는 것처럼, 우리 노들의 농부들도 이 더운 여름, 이 지독한 슬픔을 다 이겨내고 풍요로운 공동체 노란들판을 기필코 일궈낼 것이라 믿습니다. 노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