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 111호 - [교단일기] 교사, 학생이 함께 배우는 과학수업
[교단일기]
교사, 학생이
함께 배우는
과학수업
허신행 | 노들야학에서 불수레, 한소리반 학생들과 함께 과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관련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내 인생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필요성도 못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운 물리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 그 흔한 화학식도 H2O밖에는 몰랐다. 그런 내가 과학선생이 되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소리반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것, 영어수업을 그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시간표를 고려했을 때 과학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도 야학 선생님들은 문과 출신들이 많았고, 과학은 전통적인 기피(?) 과목이었다.
2016년 1학기부터 청솔 2반 과학 과목을 맡아 학생분들과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업의 목표는 ‘나의 자립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모두 아는 것(혹은 안다고 믿는 것)에서 소외되지 말아야 한다’였다. 영어를 할 때에도 그랬고, 과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영어수업에서 혜화동 동네 간판 읽기, TV광고에 나오는 단어 등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영어는 내가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영역이라는 점이라는 데 반해 과학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한 전략은 내가 알고 싶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보자였다.
첫 학기 과학수업에서는 듣기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 주제들을 잡았다(물론 나한테만 흥미 있었을 수 있다, 어느 정도는 그랬던 것으로 학기말 평가회 때 밝혀졌다). 창조론과 진화론, 한의학과 양의학의 갈등, 원자력, 무인자동차, 사회진화론, 핀테크, 특이점 등을 다루었다. 수업은 학생분들도 좋아하시고 나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학생·교사가 함께 배운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문제는 준비과정이었다. 관련 개념을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해야 해서 수업 준비에 짧을 때는 3~4시간, 많이 걸릴 때는 사나흘도 예사였다. 그중 압권은 작년 2학기 때 진행한 블랙홀이었다. 당시 소재 고갈에 시달렸고 학생분들에게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말씀해달라고 부탁했다. 비행기가 뜨는 원리와 블랙홀에 대해서 궁금하다 하셨다. 잠깐 생각에 후자가 쉬울 것 같아 다음 주는 블랙홀이라 말씀드렸다. 큰 실수였다. 만유인력, 탈출 속도, 밀도, 사건의 지평선, 특이점 등등 꼭 알아야 하는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학생분들에게 이 내용을 재가공해서 말씀드리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아마 지금은 다 까먹으셨을 거다. 나도 까먹었다. 괜찮다. 또 하면 된다. 다음 번에 들으실 땐 더 친숙하게 다가갈 것이다.
지난 세 학기 과학수업을 돌아보면서 가장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지는 주제는 핀테크1)이다. 핀테크의 개념과 성장하고 있는 핀테크 산업의 예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그중에서도 비트코인의 가능성과 투자가치에 대해서 강조했었다. 실제로 어떻게 투자하는지 알려드리고 한 번 시험 삼아 해보시라는 말씀도 드렸었다. 수업 당일 1비트코인은 79만 원 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세는 320만원이다. 4배...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해야 하는데 교사라는 자가 그러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역시나 장애와 연관이 깊은 주제들이다. 장애와 관련한 민간요법, 낙태와 장애, 사회진화론, 혈액형 성격이론 등을 다루었다. 민간요법에서는 장애를 ‘낫게’해주는 민간요법을 보았다. 특히나 정신장애나 간질 등과 연관이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낙태와 장애에서는 모성보호법을, 사회진화론에서는 우생학을 다루었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혈액형 성격이론이다. 아직도 혈액형 별로 성격이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혈액형 이론의 태생부터 인종주의와 우생학적 관점이 들어있다는 점과 비과학성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나니 확실히 이 이론이 문제가 있고 더 이상 확대·재생산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생긴 것 같았다.
우리들은 교육에서 소외받아왔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도 알지 못한 채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늘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야학 바깥에서 생활하는 비슷한 또래의 비장애인의 수준과 비교해서 야학 학생들의 배움의 수준은 이제 역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50대가 블랙홀, 인공지능, 핀테크를 공부할까? 힘들지만 매일 매일 꾸준하게 야학에 나온 학생분들의 노고의 대가일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주제를 다루고 또 토론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학생도 선생도 함께 말이다.
1) 핀테크 : 핀테크(FinTech)는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금융과 IT의 융합을 통한 금융서비스 및 산업의 변화를 통칭한다.(위키백과) 우리에게 친숙한 핀테크의 예로는 후원금을 모을 때 쓰는 소셜펀치 등의 크라우드 펀딩, 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토스,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의 코인류가 있다.
사진은 허신행 선생이 모 영화에서 열연 중인 화면을 캡쳐한 것이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