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110호 - 노들바람을 여는 창
01
제주도 곶자왈에서 본 나무와 돌들이 종종 떠오릅니다. 구멍이 송송송 뚫린 돌 사이로 뿌리를 내린 나무, 옆 나무의 몸통에 자기 가지를 돌돌 말아 올라가는 나무, 완전히 쓰러진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뿌리 내릴 곳을 찾는 나무, 그렇게 다양한 의지들이 마구 헝클어 널린 덤불 같은 숲.
02
몇 달 만에 다시 점심 급식을 먹고 낙산에 올랐습니다. 낙산공원을 산책할 때면, 매일같이 사진 찍어두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간 그날도 그 자리에서 찰칵,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음... 뭔가 빠진 것 같고,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품고 낙산을 내려오다 번득 떠오른 것은 가죽나무였습니다. 낙산공원 꼭대기에 까치집 두 동을 품을 정도로 여유롭게 서 있던 가죽나무가 베어지고 없었습니다.
03
들다방에는 작은 전자저울이 있습니다. 세상에 컵은 다양하고, 바리스타들은 컵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가 정한 커피의 맛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때 유용한 것은 ‘0set’ 버튼. 전자저울 위에 컵을 얹고, ‘0 set’을 누르면 컵 모양과 무게에 상관없이 모두 0g으로 표시됩니다. 컵 자신이 가진 고유한 무게는 사라집니다. 들다방의 아메리카노는 뜨거운 물 180g에 에스프레소 한 샷이 들어갑니다.
04
노들에서도 만난 적 있는 가수 요조의 노래 중,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라임에 맞추어, 글은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요 몇 달간 혼자 불러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써보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말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어쩜 이렇게 낯설 수 있는지. 다시 노들바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김유미입니다. ‘노들바람을 여는 창’이라는 제목의 이 글과 낯선 사람들 앞에서 짧게 해야 하는 자기소개가 너무 어려워진 탓에 노래를 자꾸 부르게 됩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점점 기억력은 나빠지고 살아갈 날들은 닥쳐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