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노들바람 110호 - [나는 활동보조인입니다] 노동에 관하여, 풀리지 않는 질문
【 나 는 활 동 보 조 인 입 니 다 】
노동에 관하여,
풀리지 않는 질문
나경 | 활동보조 5년 차. 현재 이용자로 만났던 J와 함께 다큐를 제작 중이다.
얼마 전, 친구 J와 다큐멘터리 <플레이 온>을 보러 갔다. 영화는 SK 브로드밴드 케이블 하청 노동자들이 팟캐스트를 통해 파업 소식을 알리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 속 노동자들은 단단한 안전장치 없이 전봇대나 담 위에 오르는 위험을 감수했고, 언제나 좋은 인상을 주어 고객들에게 서비스 점수를 따야만 했으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와 소모품들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동의 조건은 열악했고, 그것을 바꾸어 내는 파업은 녹록치 않아보였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투쟁을 통해 하청업체의 정규직이 되었지만, 그 여파로 일이 줄어들어 월급은 오히려 반 토막이 되었다.
사실, 나나 J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영화도 지인이 만든 게 아니었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평소 노동운동이나 노조활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J와 나에겐 ‘노동자’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J는 9년째 장애를 주제로 인권강의를 하는 강사지만 그것이 생활을 뒷받침해줄 만큼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 또한 장애인 활동보조를 하면서 4대 보험을 보장받고는 있지만, 알바 혹은 활동으로 여겼을 뿐, 그것을 진지하게 ‘나의 노동’으로 대하고 고민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우리는 노동운동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영화 속 노동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어려웠다.
영화가 끝나고 J가 내게 말했다. “이 일이… 힘든 건 알겠는데…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고… 하지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 속에 더 못 있어. 일하면서 좋은 건 없나?” 이 같은 J의 반응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다소간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영화 속 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온 질문이라기보다는 평소 일하면서 느꼈던 그녀의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J가 인권강의를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비장애인이 다수인 학생들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자, 장애에 대해 비장애인들이 가진 편견을 교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얼핏 그 일은 꼭 필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원론적인 이야기고 실제 강의를 준비하는 J에게는 즐거움보다 현장에 대한 걱정이나 피곤함이 앞선다. 게다가 들인 노고에 비해 수입이 시원찮을 때, 일이 항상 들어오는 것도 아니므로 그것을 선뜻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직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애매한 것이다.
생계와는 상관없는 강사 일, 그것을 J는 ‘노동’의 관점에서 고민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의 관점이란 뭘까? 생계를 책임질 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야만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노동은 즐거움과 동떨어져있는 개념일까? 어쩐지 노동에도 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J는 이 같은 고민을 영화관에서 감독과 출연자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언어 장애가 있는 J가 그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입말로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내가 대신 질문했다.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순간 난감했다. 아니, 그 자리에서 나는 J와 내가 처한 노동의 조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맥락은 생략한 채 뭉뚱그려서 이야기를 했다.
“영화 잘 봤다. 제가 친구를 대신해서 질문을 전달하겠다. SK 브로드밴드 기사님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되어 좋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일을 한다는 것, 노동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다. 노동자의 노동의 조건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다큐에서는 힘든 부분이나 개선되어야 하는 점이 주로 나왔다. 하지만 궁금해졌다. 일을 하시면서 진짜 어떠셨는지, 돈을 번다는 의미 외에 일 자체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자부심. 그런 것은 없는지 궁금하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이크를 받은 출연자분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인 그는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는 것이 노동의 가장 큰 의미라고 설명했다. 희망연대노조에 속해 있는 또 다른 노동자는 노조일은 권익을 주장하는 것 이상의 이웃과의 연대활동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뭔가 질문과 답의 핀트가 어긋나있는 것 같았지만, 둔탁한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고도 뭔가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다.
분명 영화를 보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긴 했다. 노동운동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수다를 떨었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에 관하여는 계속 물음표가 생겼던 것이다. 왜 우리는 그들의 노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까? J는 노동자들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소를 영화에서 보고 싶었다고 했다.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란 평소 J의 지론을 비춰보면, 그 반응은 충분히 납득이 갔다. 하지만 과연 결사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웃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나는 질문을 나에게 가져와보았다. 돈과 노동은 동떨어진 것일 수 있는가? 일은 나한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나는 지금 이 질문들에 대해 뚜렷하게 답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아마 그동안 이 일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생활을 하던 내게 일은 어디까지나 생활비를 벌기 위한 보조적 수단이었다. 활동보조 일을 시작한 지 벌써 4년, 얼마 전 공동체 생활을 접게 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이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질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실, 내가 처한 상황을 언어화시키는 게 가장 급선무인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의 행동과 노동조건을 투명하게 이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것도 사실 쉽지는 않다. 어쩌면 그동안 일은 고역이거나 타협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앞으로 난 어떤 고민들을, 누구와 나눠야만 하는 걸까? 친구와 함께 영화 한 편을 보고 생각만 많아져버렸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