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110호 - 장애인 독립진료소 5 + “3주년”을 맞아
장애인 독립진료소
5 + “3주년”을 맞아
김지민 | 장애인 독립진료소 운영위원,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 정책차장
세월호가 침몰하기 3일 전, 평소처럼 노들야학에서 장애인 진료를 하고 있던 중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악몽 같은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시설에서 살다 처음으로 자립생활을 준비하던 송국현 아저씨가, 불이 났는데 대피하지
못해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와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청한)가 장애인 독립진료소 운영을 맡게 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사고 얼마 전 송국현 아저씨는 언어장애 3급, 지체장애 5급, 중복장
애로 3급 판정을 받아 활동보조 서비스 지원 대상자(장애등급 2급 이상)에서 탈락하여 이의신청을 낸 상태였습니다. 현장으로 달려갔던 활동가들은 울먹이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체험홈은 화재가 나면 자동으로 문이 열려요. 화재가 난 지 얼마 안 되어 문 열린 방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고 집 주인이 안에 사람 있냐고 물어보았대요. 그런데 송국현 동지는 언어장애 때문에 말을 다 알아듣지만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결국 집주인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고, 자리를 떠버린 거죠. 동지가 걸을 수라도 있었다면, 아니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구조 요청조차 하지 못하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공받던 몇 달 전이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을 수 있었어요.”
여기. 사람이. 있다.
2009년 용산 참사 이후로 5년 만에 다시 이 말이 이토록 가슴을 짓누를 줄 몰랐습니다. 저에게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복지 논쟁이, 누군가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라는 끔찍한 현실과 또다시 대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보건복지부 장관 집 앞에서 해명을 기다리며 노숙과 단식 농성을 하며 세월호 분향소가 있는 시청광장 옆 국가인권위원회 앞에 분향소를 세웠지만,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의 영정 사진은 계속 늘어만 갔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무렵, 부패한 박근혜 정권은 침몰하고 세월호가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세월호가 떠오를 때 지난 3년간 억울하게,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죽거나 다쳤던 얼굴들을 같이 떠올렸던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노들야학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농성할 때 ‘한방의료활동 들풀’의 의료연대로부터 시작되었던 장애인 독립진료소가 벌써 9년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발바닥) 여준민 활동가의 말처럼 ‘벌써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노들 장애인 야학, 그 자리에 진료소는 일요일마다 있어왔습니다. 청한이 독립진료소를 이어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새삼 “5 + 3주년”의 무게를 실감하게 됩니다.
3년간 진료 기록을 정리하며 1500번 넘는 장애인 분들과의 만남, 진료소와 환자분들의 집까지 바쁘게 오갔던 연인원 500여명의 노들, 발바닥, 청한, 한의대 학생 진료팀의 노고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2015년 10월 ‘장애인 건강권 보장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고, 2017년 12월부터는 ‘장애인 주치의제도’ 시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생각해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 장애인 분들이 병원에 오지 못하는지, 왜 비장애인라면 죽지 않을 문제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평생 한의원을 해도 한 번 마주치기 힘든 장애인분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부터 시작했던 3년 전을 돌이켜보며 항상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모두가 평등한 건강권을 누리는 세상을 위해 함께 연대해주신,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노들 장애인 야학”,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 장애인 독립진료소 자원활동 학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