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가을․겨울 109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트럼프와 대의제, 지식인에 대한 단상
[고병권의 비마이너]
트럼프와 대의제, 지식인에 대한 단상
고병권 |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밥 먹고 공부해왔으며, 작년 여름부터 무소속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노들야학에서 철학교사로 지내왔고 최근에 잠시 휴직한 상태. 그동안 밀린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기 충전 중!
1.
지난 미국 대선 결과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뉴욕 타임즈』 같은 유력 신문도 개표 직전까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을 80%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의 수치라고 불렀다. 그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발언을 예사로 했고, 막판에는 음담패설을 담은 녹음파일까지 공개됐다. 주요 언론사 대부분이 사설을 통해 그를 낙선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 공화당 인사들은 지지 철회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도 그는 당선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럴 때는 결과로부터 되짚어 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는 당선되었다. 여기서 시작해보자. 우리는 왜 놀랐는가. 당선될 수 없는 사람이 당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놀람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이다. 그는 당선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식의 함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즉 우리는 그를 ‘당선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를 ‘당선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그와 클린턴의 지지율 격차는 크지 않았다. 끔찍한 막말과 추문이 터진 후에도 생각보다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일시적 충격을 받았을 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변한 게 있다면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일이 조금 부담스러워졌을 뿐이다. 막말과 추문은 실제 지지율이 아니라 표명된 지지율을 조금 낮추었던 것 같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화이트 푸어 앵그리’, 즉 빈곤에 분노한 백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로이터(Reuters)와 입소스(Ipsos)가 투표를 마친 유권자들을 상대로, 후보 선택 기준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이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75%는 “부자와 권력자들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투표했다고 한다. 또 72%는 “미국 경제가 부자와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되어 있다”고 했다. 68%는 “전통적인 정당과 정치인들이 자신은 같은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했고, 76%는 “주류 언론은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돈 버는 데 더 신경을 쓴다”고 믿었으며, 57%는 “미국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를 점점 더 알 수 없다”고 했고, 54%는 “미국에서 나 같은 사람의 삶이 개선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전체 유권자의 70%가 이런 생각으로 투표에 임했다면 누구에게 유리했을까.
2.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1848년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보나파르트’를 떠올렸다. 칼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그의 당선은 “문명인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판독하기 어려운 상형문자”였다.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그는 자기 이름에 들어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말에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할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얼치기 광대였다.
사실 새로 권력을 잡은 정통 부르주아들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르주아들은 1848년 2월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군주제를 타도했고, 이어 6월에는 노동자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순수한 부르주아 공화제를 수립하려 했다. 5월에 제헌의회를 갖추었으니 12월에 대통령만 뽑으면 꿈이 실현되고 상황이 종료될 판이었다. 물론 12월의 대통령 선거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하기도 힘든 결과가 나와 버렸다. 보나파르트라는 얼치기 광대가 공화파 부르주아 후보보다 여섯 배나 많은 표를 얻은 것이다.
집권 부르주아들은 파리 시민만 생각했지, 전체 인구의 2/3에 이르는 농민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들은 군대와 언론을 잡았고 의사당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전체 민중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완전히 제압한 뒤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농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이전 왕조를 지지하던 금융귀족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원한을 품었고 소상업자와 농민들은 분노했으며 금융귀족들은 경멸했다. 바로 그때 보나파르트라는 추억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로이터와 입소스의 여론 조사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 해프닝을 떠오르게 한다. 1845~48년 프랑스의 공황과 혁명, 선거 등은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와 2011년 월가점거, 2016년 대선 등과 닮은 느낌을 준다. 클린턴의 민주당은 겉으로는 월가 점거자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 운동이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따르면, 민주당 지도부는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월가 점거운동에 친화적인 샌더스를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다. 게다가 클린턴 자신은 2014년 월가의 금융귀족들 앞에서, 평소 유세와는 다른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는 2008년의 금융위기를 월가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했고, 자신과 남편이 누리는 부유한 생활을 언급하면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이 있다고 했다. 더욱이 그는 한 투자은행 강연에서 1회 강연료로 22만불, 약 2억 5천만 원을 받았다.
미국의 유권자 상당수가 “부자와 권력자들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미국경제가 부자와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되어있다”고 했을 때(참고로 ‘조작되었다’(rigged)는 말은 트럼프가 대선 유세 내내 했던 말이기도 하다), 또 “주류 언론은 진실을 말하기보다 돈 버는 데 더 신경을 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클린턴과 주류 언론들을 자신의 대변자로 생각했을지, 힘을 빼앗아 와야 할 적으로 생각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3.
이는 소위 ‘화이트 푸어 앵그리’가 클리턴을 지지하지 않은 이유를 말해준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는가. 따지고 보면 트럼프도 수퍼 갑부가 아닌가. 부자와 권력자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다면서 왜 대중들은 또 다른 부자를 지지하는가.
19세기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칼 맑스의 분석을 원용해보자.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노하지만 조직되지 못한 대중들, 계급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동일한 생활조건 아래 모여 있기만 한 사람들. 그저 “한 자루 분량의 감자를 모으면 감자 한 자루가 되는 것처럼” 모여 있을 뿐 “어떤 정치조직도, 계급도 이루고 있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주장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 그들은 대표되어야 한다. 그들의 대표자는 동시에 그들의 주인으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는 권위로서, 그들을 다른 계급들로부터 지켜주고 그들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무제한적 통치 권력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분할지 농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집행 권력이 사회를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데서 그 최고의 표현을 찾는다.”
맑스의 말을 다시 풀면 이렇다. 자신을 조직하지 못한 빈곤한 대중, 그래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대중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 누군가를 찾는다. 그들의 지도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적과 싸워줄 누군가 말이다. 그런 지도자는 막강한 집행 권력을 가진 사람, 말하자면 대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농민들은 보나파르트에게서 자신의 대표를 보았다. 나폴레옹 1세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위대한 프랑스의 부활’을 외치는 대통령 후보. 마찬가지로 2016년 미국의 가난한 백인들은 ‘위대한 미국 부활’을 외치며 레이건주의의 향수를 자극하는 트럼프에서 똑같은 것을 본 게 아닐까. 가난한 백인들의 질문은 후보들 중 누가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가가 아니었다. 이들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을 때 누가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가. 그 대표는 우리보다 훨씬 강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적보다 더 강해야 한다. 트럼프라는 얼치기 광대가 이때 나타났다.
4.
대중 스스로 자신의 견해와 운동을 표현할 조직을 갖지 못했을 때 그들은 적들을 끝장 내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그들은 적을 타도하고 적으로부터 권력과 부를 되찾기 위해, 자신들을 지도자에게 완전히 의탁한다. 스스로 예속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있다. ① 대중들, 무엇보다 대의조직 바깥으로 밀려난 대중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② 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의탁할 대표를 선택한다. 전자를 강하게 인정할수록 우리는 이를테면 가야트리 스피박 같은 사람이 말하는 비평가 내지 지식인의 책무 같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피박은 대중의 자율적 역량을 무한히 긍정하면서 정작 자신은 투명한 존재인 듯 빠져나가는 지식인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방기하는 지식인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평가의 한 가지 책임은 글을 읽고 쓰되, 지식인 주체에게 부여된 제도적 특권의 개인적 거부가 불가능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역시 지식인의 무색무취함을 믿지 않으며 그것을 미덕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또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무책임하게 방기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훈계하길 좋아하는 그런 ‘선생질’하는 지식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말한 ‘지식인의 책무’에서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사이에서 계몽하는 전위세력의 사명을 정의하고자 했던 레닌주의의 냄새가 묻어난다. 지식인에게 부여된 특권을 기꺼이 떠맡는 지사적 풍모는 생각보다 엘리트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대중들의 현실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신음 섞인 목소리와 뒤틀어 만들어낸 몸짓을 표현 영역에서 미리 배제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식인은 뒤로 물러나 그런 대중의 목소리가 투명하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식인, 내가 더 좋아하는 말로 하자면 연구자 대중은 대중의 일부로서 제 목소리를 내야하며, 또한 다른 대중과 함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노들야학을 찾았을 때 절망했던 것은 또렷하게 말하지 못하는 장애학생들의 현실이 아니라, 학생들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앞서 맑스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 그들은 대표되어야 한다.” 이 두 문장의 ‘사이’를 주목하면 자연스레 지식인의 책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을 때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도 물론 소중한 물음이다. 하지만 나는 두 문장의 ‘사이’가 아니라 두 문장 ‘이전’을 주목한다. 맑스가 두 문장을 말하기 직전에 했던 말, 두 문장이 생겨나는 조건이 되는 말 말이다.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어떤 경우에 대중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는가. 맑스는 “어떤 공통성, 어떤 결합, 어떤 조직을 만들어낼 수 없을 때” 대중이 그런 처지에 놓인다고 했다. 그러니 권력과 부, 여론에서 밀려나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대중의 무력함이 있기 이전에, 서로 연대하고 또 조직을 이룰 수 없는 대중의 무력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력함은 나 같은 연구자 대중이 장애 대중을 만날 때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무력함과도 관련이 있다.
내게는 지금도 노들야학의 홈페이지 어느 한편에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이 했다는 말이 소중한 화두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추기]
지난 주 한국의 급박한 정세는 미국 대선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이나 한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삼촌에 대한 향수에 기대면서 자기 이름의 신비한 기운을 믿었던 프랑스의 보나파르트만큼이나, 아버지에 대한 향수에 기대면서 우주의 신비한 기운을 믿었던 한국의 박근혜. 삼일 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백만 명의 시위가 있었다. 이제는 ‘저 나라’가 아니라 ‘이 나라’가 문제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상황을 더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어 지난 번 잡아놓은 얼개대로 원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의 권좌에 대한 집착이 여전한 가운데 의회는 우유부단하고 대중들은 강하게 분노하고 있는 터라, 상황이 어찌될지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대중들은 분노하고 있지만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스럽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맑스는 보나파르트의 어깨 위에 황제 외투가 걸쳐지는 순간 방돔 광장에 세워진 나폴레옹 동상이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폴레옹의 신화까지 깨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박근혜의 어깨에 걸쳐진 최순실의 외투가 문제되면서, 그 추종자들이 내년 탄생 100년을 맞아 광화문에 세우려했던 박정희의 동상 건립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