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108호 - 안녕하세요, 『비마이너』 기자 박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비마이너』 기자 박정수입니다
박정수 | 수유너머에서 오랫동안 밥 먹고 공부하며 생활해왔다. 올해 3월부터 『비마이너』의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2015년 가을 수유너머R이 해체되었고, 나는 무소속이 되었다. 수유너머N이나 다른 인문학 공동체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뭔가 다른 일을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2002년부터 13년 동안 달고 다닌 ‘수유너머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떼어지자, 청탁받은 원고에 뭐라고 필자 소개를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자유 연구자? 무소속 인문학자? 그렇게 무소속으로 몇 달이 지나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내가 이토록 고독에 취약할 줄이야. 짐작은 했지만 나의 ‘무리 본능’에 새삼 놀랐다. 지금과는 다른, 그렇다고 생판 다르지는 않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광화문광장 세월호 지킴이를 해. 사람 필요할 텐데,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 하는 한종선 씨를 돕든가.” ‘현장’과 결합하고 싶다는 말에 아내가 너무 세게 나왔다. 그건 너무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고,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존중해 주면서, 지금과는 다른 일과 소속감을 갖고 싶단 말이야.
문득, 몇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수유너머가 없다면 저는 노들에 있을 겁니다.” 아마 수요 현장인문학 뒤풀이 자리였을 것이다. 그래, 노들이 있었지. 노들로 가자. 그런데 뭘로? 상근자? 교사? 또 움찔, 주저한다. 『비마이너』라면? 그래, 『비마이너』 기자라면 지금까지의 공부도 써먹으면서 지금과는 다른 스타일의 연구와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김유미를 만나 의사를 전했고, 두 달 정도 ‘숙려’ 기간을 거쳐 『비마이너』 기자들과의 ‘면접’ 끝에 지난 3월부터 사무실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명함도 만들고 기자증도 받았지만, 사실 나는 『비마이너』의 ‘정식’ 기자가 아니다. 즉 다른 기자들처럼 임금을 받고 기사 작성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부분 ‘임노동’의 성격을 지닌 의무적인 일로부터 자유롭다. 대신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쓰고 싶은’ 기사를 씀으로써 『비마이너』의 컨텐츠 생산에 질적․양적으로 기여하도록 요청받는다. 수유너머R의 동료였던 고병권이 “와, 일주일에 한 편만 쓰고 이 안정된 자리와 멋진 동료와 매체를 갖게 되다니”라며 부러워했듯이, 나로서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단체 면접 때 우려했던 바와 같이 나의 어정쩡한 ‘포지션’과 ‘연륜’(?) 때문에 다른 기자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처신만 잘하면, 솔직히 『비마이너』 입장에서도 무임금으로 양질의(?) 기사를 확보할 수 있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그런 어정쩡한 위치와 자세로는 당신도 못 배우고, 그 친구들도 얻는 게 없어”라고 아내가 따끔하게 충고했지만, 지금은 좋으니까(나만?) 일단 됐다.
『비마이너』 기자가 되니 좋은 게 참 많다. 먼저 나날의 일상이 좋다. 단체 ‘텔방’에서 ‘드립질’ 하는 게 좋고, 점심, 저녁 매번 푸짐한 식사가 좋고(덕분에 뱃살이…) 낙산공원을 돌아 이화동 벽화마을까지 산책하는 것도 참 좋다. 2층 화단과 4층 로비에 화원을 가꾸는 것도 새로 찾은 일상의 재미다.
무엇보다 새로운 방식의 연구와 글쓰기가 좋다. 아내가 ‘장애계야말로 인문학 연구의 미개척 블루오션’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안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수유너머에서는 책을 통해 ‘다른 사유’를 만나고 현실에 적용시키려 했다면, 『비마이너』에서는 소수자의 현실을 통해 다른 사유를 하게 되고, 그걸 설명해줄 책을 찾게 된다. 수유너머에서는 모르는 게 있으면 또 다른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는데, 『비마이너』에서는 모르는 게 있으면 당사자, 관련자, 조사자 등 다른 사람을 탐문한다.
3월 첫째 주부터 5월 셋째 주까지 10편의 기사를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쓴 건 「시설에 갇힌 성(性), 마리스타의 집에 스포트라이트를」이다. 마리스타의 집은 충주에 있는 남성 지적장애인 거주시설로, 수년 간 반복된 거주인 간의 성폭력 및 상호 성추행 문제로 인권위로부터 폐쇄 권고를 받았다. 마리스타의 집 폐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기사를 보고 의문이 생겼다.
동성 거주인 간의 성폭행 및 상호 성추행이라는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성폭행이냐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냐’라는 이분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권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장애인부모회 소속 어머니 두 분을 비롯한 탈시설 활동가들도 만나보고, 천주교 신부들의 동성 추행문제를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도 보고, 교도소나 군대에서의 동성 간 성폭력 사건에 대한 관련 자료도 찾아보았다. 그 결과 동성 간 성폭행과 상호 성추행이 공존하는 상황을 성적 자유가 박탈된 시설 공간의 도착적 성문화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보도를 접했을 때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만 없다면 상호 간의 성행위는 괜찮지 않나 생각했지만, 탐문하고 연구한 결과 젊은 지적장애 남성들이 산골짜기 시설에서 성적 자유가 박탈된 상황에서의 ‘자의’란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동안 쓴 글 중 현장 취재 기사는 딱 한 편뿐이다. 마리스타의 집 인권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어머님이 마침 특수학교 설립 문제로 서울시교육청 점거 농성 중에 있었다. 정문에서 막아서는 공무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장애인 언론사 『비마이너』 기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직 기자증이 안 나와서 들고 간 카메라와 ‘진정성’ 어린 표정으로 기자임을 입증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음 날 오전 부모회의 기자회견 일정이 텔방에 전해졌다. 카메라도 있겠다, 농성 중임에도 면담을 해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있어서 내가 취재하겠다고 나섰다.
다음날 오전 나의 첫 번째 현장 취재는 엉망이었다. 카메라는 실수로 전원이 켜진 채 있어 배터리가 나갔고, 핸드폰으로 발언을 녹음한 건 중간에 끊겨 버렸고, 손으로 받아 쓴 글씨는 나조차 무슨 뜻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기사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신문 기사는 읽어 보기만 했지, 막상 쓰려니 쉽지 않았다. 문장의 시작과 끝, 이음매, 단어 선택에 애를 먹었다. 농성 이유, 농성 과정에서 있었던 일, 농성의 의의에 대해 다 써야 한다는 생각에 묻고 조사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다른 신문들은 관련 기사를 이미 다 발행하고도 한참이나 지난 오후 6시쯤에야 기사를 등록할 수 있었다. 그나마 등록한 기사는 편집장님이 한 3분의 1정도를 교정보고 나서야 발행되었다. 그날 밤 텔방에서 현장 취재는 다른 기자한테 맡기고 앞으로 분석 기사나 쓰시라는 편집장의 ‘배려’어린 멘트에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분석 기사도 쉽지가 않다. 원래 글 솜씨가 별로인데다, 그동안 번역 투의 문장과 학술적 문어체에 쩔어 있어서 쉽고도 간명한 기사문을 쓰기 힘들었다. 일단 초벌로 쓰고 프린트로 뽑아서 보며 몇 번을 고쳐도, 발행 후 아내의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언제쯤이면 홍은전 샘처럼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 한탄하는 날들이다. 그래도 똑똑하고 성실한 『비마이너』 선배 기자들을 비롯해서 여러 부러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얻어서 참 좋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좋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