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107호 - 앞이 캄캄해요!
앞이 캄캄해요!
어머니가 들려주는 스무 살 딸 이야기
가나 |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소민이에게는 ‘오빠’라 불린다. 요즘에는 야학에서 지민이 형과 노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 경남 누나랑 싸울 때도 있고, 주원이 형에게 면박을 줄 때도 있다. 혜운 누나한테는 종종 예쁨을 받는다.
작년 여름이 한창일 무렵이었을 게다. 나는 야학에서 흔히 ‘낮 수업’이라 불리던 수업을 맡고 있었다. 이 수업은 ‘천천히 즐겁게 함께’라는 사업명으로 진행한 발달장애 성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낮에 하는 프로그램이라 낮 수업이라고 불린다.
어느 날 ‘천천히 즐겁게 함께’ 사업을 담당하시는 한혜선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낮 수업에 새로 들어오길 바라는 학생이 있다며 상의를 하고자 하셨다. 이름은 박소민, ‘나야 장애인권교육센터’에서 활동하시는 이찬미 선생님 딸이란다. 고등학교 3학년인데 특수학교에 다닌다고도 하셨다. 내년부터 야학에 입학할 예정인데, 찬미 선생님 바람은 소민이가 먼저 낮 수업을 들으며 야학 생활을 맛보았으면 한다는 거였다. 소민이가 야학에 적응할 시간을 미리 가져보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혜선 선생님은 수업을 맡은 강사로서 내 의견은 어떤지를 물으셨다. 정원은 다 찬 상태였지만 한 사람 정도는 더 받아도 될 성 싶었다. 그런데 소민이가 ‘중증 지적장애’라는 얘기를 듣고는 약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만일 들어온다면 소민이한테 수업 보조를 할 사람을 따로 붙여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으로는 찬미 선생님이 극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정원을 채워서 굴러가는 수업에 아직 졸업도 안 한 딸을 굳이 밀어 넣으려 하시나 싶었다. 사람 수가 느는 만큼 신경 쓸 일도 늘까봐 지레 잔걱정이 되기도 해서 더 그랬다. 그러고 나서 낮 수업을 맡은 선생님들끼리 소민이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더 나눴다. 우리는 결국 소민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뒤 소민이는 활동보조 선생님과 함께 하반기부터 낮 수업에 종종 나왔다. 금요일에는 댄스반 특활 수업에도 들어갔다. 야학에 처음 왔을 때 소민이는 마냥 골을 내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랬던 소민이가 이제는 수업이 없는 날에도 엄마를 졸라 야학에 나오고 싶어 할 정도로 야학을 좋아한다.
지난 2월 5일은 소민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찬미 선생님 이야기도 들어볼 겸 소민이 졸업식을 찾아갔다. 내 얘기를 듣고 고맙게도 노들야학교사 가비(김형호) 선생님과 김지윤 선생님도 자리를 함께 해주셨다. 김유미 선생님과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최한별 기자님도 취재를 겸해서 함께 오셨다. 우리 일행은 졸업식을 지켜보고 나서 소민이네 식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아래 이야기는 그때 찻집에서 이찬미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다.
소민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고민이 많아요. 활동하면서 엄마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민이는 전공과 1년 빼고는 이 학교에서 딱히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전공과도 사회로 나가기 전에 1년 동안 준비하는 시간인데⋯. 처음에 전공과 과정을 2년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엄마들이 있어요. 저는 고작 2년 동안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겠나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공과가 이삼 년 과정이었다면, 저도 소민이를 보냈을 거 같아요.
소민이 앞날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어요. 지역사회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마음 맞는 발달장애인 부모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가느냐. 지자체에서 무언가를 만들게 하려면, 최소한 엄마 세 명이 목소리를 맞추어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요. 지자체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건 본인이 가진 생각이 확고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구청을 점거해? 운동을 하려면 드러누워야 하는데, 나는 드러눕는 거는 못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렇게 별나게까지는 안 하고 싶은 거죠. 면담이나 하러 가고, 그 정도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면담만 계속 하다가 끝이 나요. 앞에서 액션을 취하는 사람, 뒤에서 협상하는 사람, 연대하는 사람, 이렇게 각자 역할을 나눠서 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사는 지역이 아닌 곳, 더 잘 되어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는 거죠.
(소민이를 쳐다보며) 저 친구를 잘 관찰하며, 잘 하는 영역을 지원해줘야 해요. 한 사람을 오랫동안 관찰하는 체계가 필요한데, 주의 깊게 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힘든 시스템이에요.
연애와 결혼
마냥 내 바람일는지 몰라도 소민이가 좋다는 사람만 있다면 결혼까지도 생각해요. 그런 만남을 가질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소민이가 노들야학을 다니면서 어떤 오빠가 좋다는 얘기를 했어요. 요즘에 저는 다른 엄마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 자녀들이 남자,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장이나 기회가 있어야 이성에 대한 관심이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노들에 다니기 전까지는 소민이가 이성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나는 오빠들 말 한 마디에 행복해 하고 ‘보고 싶다’고 표현했어요. 이것은 또 다르게 이성에 대한 설렘과 만남이 시작되는 거겠죠. 이런 성(性)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에 부모들이 관심을 가져야 해요. 저도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 촘촘히 알려주고 있어요.
앞으로 소민이가 노들야학에서 어떻게 성숙해가길 바라는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노들야학이나 본인이 다니는 곳만이라도 스스로 다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누군가가 뒤에서 지켜봐 주면서 함께 다니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대중교통으로 다니면서 많이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사회생활에 젖어들면서 조금씩 성장하길 바라죠. 또 다른 욕심이 있다면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면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댄스를 하면서 즐겁고 행복했으면 해요. 요즘은 소민이가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스스로 음식을 해보더라고요. 그래서 요리수업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희망사항이죠.
활동보조 지원
소민이는 활동보조 지원으로 한 달에 189시간을 받아요. 129시간은 보건복지부에서 받고 60시간은 지자체, 그러니까 서울시에서 받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거기에서 한 달에 10시간(통학 지원)이 잘려요. 하루에 6시간 정도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어요.
용돈
소민이 한 달 용돈은 20만원이에요. 한 달에 그 안에서 마음껏 쓰게 해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그래야 자기 용돈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커피를 사주기도 하고, 밥도 대접할 수 있죠. 그런 문화를 익히면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주려고 해요. 소민이가 아직 계산을 못 해서 현금으로 쓰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카드로는 결제할 수 있어서 카드를 사용해서 용돈을 쓰고 있어요.
소민이가 어떻게 자립해 나가길 바라는지?
소민이가 앞으로 다닐 곳이랑, 소민이를 활동보조해주실 선생님이 자립 계획을 같이 고민해서 짰으면 좋겠어요. 활동보조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하루 세 번씩 반복 수업을 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 집, 내 주변, 가는 곳, 이렇게 세 곳에서 무언가를 익히는 것을 반복하게 되겠죠.
소민이 엄마로 산다는 것은?
제가 늙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잖아요. ‘지금부터 얘한테 사회생활을 익혀 주려면 내가 몇 년을 붙어야 하나?’, 이런 고민도 했어요. 제가 삼 년만 소민이한테 밀착해서 지원하면 자립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요즘 주변에서 몸이 약해지는 발달장애인 부모님들도 많고, 갑자기 암이라고 진단 받은 엄마들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엄마들 생각하면 내가 건강할 때 소민이가 관심 있어 하는 걸 막 가르쳐 주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학교 밖에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소민이가 학교라는 곳을 떠나면서 느끼는 막막함은 이런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을 다 접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뭔가를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만들어지게끔 자원을 대고 ‘네 인생은 너, 내 인생은 나!’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야 하나. 지금이 기로에요. 올해 안에 결정을 해야 되겠죠. 소민이는 질환 때문에 날로날로 살이 찌고…. 지원체계가 생겼으면 하는 건 간절한 희망이죠.
뒷이야기: 졸업생이 ‘빛나지 않는’ 졸업식을 지켜보며
나는 꽃다발과 선물을 사느라 졸업식에 조금 늦었다. 졸업식장에 들어서 보니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상을 나눠주고 있었다. 상을 주는 주체는 각종 장애 관련 기관과 단체의 장들, 지역 정치인들, 관변 단체의 장들이었다. 지역 유지나 목사님 같은 분들도 끼어 있었다. 비디오를 반복 재생하는 것 같았던 이 순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 지루한 시상식이 졸업식 전체에서 절반이 넘는 시간을 잡아먹은 듯하다. 그 뒤 국회의원 이 아무개의 축사, 교장 선생님 축사, 영상으로 편집한 졸업생들의 ‘학교생활 사진모음’ 보기, 졸업식 축가, 사진 찍기, 대강 이렇게 식순이 지나갔다.
어린 시절의 한 마디를 매듭짓는 예식치고는 참 별 게 없었다. 행사를 마친 졸업생들 손에는 꽃다발과 선물, 졸업장, 그리고 주는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조금씩 다른 상들이 들려졌다. 축하를 받고 상을 받은 사람은 졸업생이었지만, 이 예식의 주인공은 졸업생들이 아니었다. 이 예식에서는 졸업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로지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의 이름과 뻔한 훈사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주인공’이 아니라 ‘들러리’로, ‘주체’보다는 ‘객체’로. 마치 이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떠맡을지도 모를 배역을 이 졸업식이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씁쓸했다.
그날 아주 오랜만에 졸업식 노래를 들었다. 문득 ‘빛나는 졸업장’이라는 구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졸업생과 그 부모들에게 과연 빛나기만 한 물건일까? 고교 졸업 기념품, 학력 증명서 말고 다른 의미가 있을까? 이들에게 특수학교는 교육기관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국가가 돌봐주는 ‘장기 보호센터’였을 수도 있다. 그것도 딱 12년 동안만, 그리고 청소년기까지만 한정해서 말이다. 그런데 발달장애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막상 갈 데가 마땅찮다.
그나마 ‘기능’이 좋다고 인정받는 극소수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일자리는 보호작업장이나 사회적 기업 따위를 포함한다. 시설이 좋은 평생교육기관을 이용하는 것도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다. 흔하게 찾는 장애인복지관과 주간보호센터는 그쪽에서 맘대로 정해둔 ‘○년’이라는 기간 안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이용 기간이 끝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또 다른 복지관과 센터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나마 장애인야학은 이용 기간에 제한이 없고, 입학 조건도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거의 다 규모도 작고 운영난마저 겪고 있다. 앞에서 다룬 온갖 종류의 기관과 시설을 몽땅 다 합쳐도 어른이 된 발달장애인들을 모두 받아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 성인과 그 가족들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마는 사태의 근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받는 고등학교 졸업장은 달리 보면 이른바 ‘퇴거장’일 수도 있다. 그들을 오랫동안 붙들어주었던 울타리에서 강제로 쫓겨남을 알리는 증명서!
말미에 찬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앞이 굉장히 캄캄해요. 어릴 때 강원도에서 살았는데 눈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왔을 때가 생각이 나요. 아침에 문을 여는데 눈이 꽉 차서 학교를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렇다고 문을 닫고 있자니 갇혀 있는 느낌이에요.”
요즘 들어서야 나는 발달장애 성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찬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그 아득함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본보기였다. 현실을 알아가며 이제야 찬미 선생님이 보이셨던 모습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찬미 선생님이 너무 극성스럽다고만 여겼던 내 자신이 지독히 옹졸하게 느껴졌다. 찬미 선생님께 죄송스런 마음도 들었다. 이 글로나마 찬미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문제는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극성스러움이 아니라, 부모들을 그렇게까지 극성스럽게 만드는 이 체계다.
상을 주었던 치들은 자신이 그 졸업식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기 이름으로 상을 주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잘 몰랐을 것이다. 졸업생들이 학교를 떠나면서 겪게 될 삶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알고도 그랬다면 그들은 정말 뻔뻔한 인물들이다. 축사를 한 국회의원은 성년후견인 제도나 발달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법률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의원님은 축사를 할 때 뻔한 인사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나는 의원님에게 학생들 앞날을 위해 이런 입법 활동을 해보겠노라는 다짐이라도 밝혀야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들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나. 그들은 발달장애 성인 지원체계를 마련하고자 누구보다 힘써야 할 이들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그 정도 지위를 갖고 있다면 말이다. 그들이 졸업생들에게 베풀었던 ‘상’이란 무얼까? 거대한 눈덩이에 가로막혀 있는 아이들에게 모자나 우산, 또는 넉가래나 눈삽 따위를 겨우 쥐어주는 꼴이 아닌가. 돈이나 장비, 사람을 들여서 함께 눈을 치워주어야 할 그들이 말이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나는 소민이와 같은 발달장애 성인들을 위해서 우산을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내 깜냥으로는 할 수 없을 뿐더러 내 양심이 그런 위선과 기만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나는 그저 함께 눈을 맞으며 그 길을 걸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