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107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공상 말고 사랑을 하자
[고병권의 비마이너]
공상 말고 사랑을 하자
고병권 |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밥 먹고 공부해왔으며, 이번 여름부터 무소속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노들야학에서 철학교사로 지내왔고 최근에 잠시 휴직한 상태. 그동안 밀린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기 충전 중!
니체만큼 기독교적 연민과 동정을 혐오하고 또 신랄하게 비판했던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가 불쌍한 이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람들을 비판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직접적으로는 연민이라는 감정 자체가 사람의 힘을 생리적으로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연민도 일종의 슬픈 감정인지라 진심으로 그런 감정 속에서 몇 달을 지낸다면 우리는 아마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들 것이다. 연민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정을 베푸는 이들을 칭송하지만, 그런 선행의 대상이 되고서도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사랑받는 이를 들뜨게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매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민과 동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매력도 없다는 것,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병들고 불쌍한 자에게 연민과 동정을 베풀라고 가르치지만, 니체는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을 병들고 불쌍한 존재로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니체가 이런 사랑을 비판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타인에 대한 폭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타인에게 동정을 베풀고 심지어 헌신적인 사랑까지 보여주는 사람들 중에는 타인에게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권력자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유형의 선행가들이 있다. 이들은 선행을 베풀기 전에 먼저 그런 선행을 받는 존재로서 자신을 공상한다. 비천한 자신에게 누군가 선행을 베풀어준다면 자신은 그것에 대해 틀림없이 깊은 감사와 충성을 보일 것 같다. 이런 공상을 거친 후, 그는 눈앞에 있는 대상도 자신의 선행에 대해 그럴 것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마치 드라마의 감독처럼 그는 모든 배우들이 그의 의지에 따라 느끼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정말로 이런 사랑가들이 많다.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답시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렇게 해주면 좋은 거 아냐?’ 이들은 자신의 선행, 자신의 동정, 무엇보다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그 대상이 몰라준다고 슬퍼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그렇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랑이 그러하며, 학생에 대한 교사의 사랑이 그렇다.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 사람들일수록 그 대상이 감사하고 복종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사랑을 배신한 것은 그의 공상이다. 공상 속에서 그는 상대방을 인형놀이의 인형처럼 사물화 했다. 상대방의 감정과 태도까지 그가 정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상대방을 완전한 소유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독재자들의 망상이다. 백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백성의 완전한 지지와 복종으로 보답될 것이고 또 보답되어야 한다는 망상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타인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복종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연인에게 자신이 정말로 헌신적이었는지는 다음 문제다. 이 사랑이 폭정인 이유는 그가 사랑에 나서기 전에 이미 연인을 사물로,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간주했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은 진심으로 선행을 베풀었느니 사랑을 했느니 따위의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소유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권력자의 속성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장애인들에 대한 사랑(?)의 경우에는 이 폭력성이 특히 심하다. 언젠가 어느 여성장애인으로부터, 비틀거리며 걷는 자신을 부축한답시고 함부로 몸을 껴안는 사람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런 ‘선행=폭력’만 그런 게 아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들 중 비장애인들의 눈에만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장애인들을 얼마나 ‘잘 먹여주고 잘 재워주었는데’ 이럴 수 있냐고 항변하는 시설 책임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불행히도 많은 이들이 연인과 권력자를 가르는 것은 관계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임을 모른다. 내 앞의 존재를 사물화한다면 내 헌신적 사랑이 말해주는 것은 결국 내 소유욕의 강도뿐이다. 제발 공상하지 말고 사랑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