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107호 - 노들야학에서 만난 세월호 사람들
노들야학에서 만난 세월호 사람들
2016년 1월 26일, 416세월호와 노들야학 집담회
김유미 | 야학 급식과 낙산 산책을 좋아한다. 야학을 휴직하고 몸보신하는 게 목표인데, 급식과 낙산 때문에 못 떠나고 있다. 이 책 『노들바람』을 좋아한다.
2월 말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바라는 네 번째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416합창단의 노래 공연이 있었다. 무대 옆 대형 전광판을 통해 합창단의 얼굴이 크게 하나씩 지나갔다. TV에서 보던 유가족의 얼굴, 집회 무대에서 보던 이들의 얼굴이 흘러가던 중에, 반가운 얼굴 하나가 있었다. 얼마 전 야학에서 만난 단원고 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 님이었다. 작은 체구의 최순화 님은 노란색 점퍼를 입고, 앞줄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최순화 님 옆에서 노래를 하는 어느 중년의 가슴엔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학생증이 걸려있었다.
감정이 북받치면 말을 한다거나 소리를 내는 게 어렵다. 노래는 아예 부르지 못할 것 같다. 감정이 좀 다스려지는 시간이 온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노래 한 곡을 마치고 마이크를 잡은 중년 남성의 발언은 중간 중간 끊어졌다. 그렇게 울면서, 울음을 참으며 이야기를 전하는, 노래를 부르는, 416합창단의 곤란이 가슴에 와 박혔다. 최순화 님은 야학에서 이야기를 나눈 날에도 거의 절반의 시간은 눈물을 훔쳤다. 그런 그녀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목소리를 모아 합창을 한다. 무대 아래 나는 울음을 삼키고 옆 자리들이 훌쩍였다. 눈물들이 빛나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위대해 보이는 과잉의 상태로, 이 지독한 일들이 해결되어 나가길 바래보았다.
세월호 참사가 2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무엇이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뉴스에서도 세월호 소식을 접하기 어려워졌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의 이웃인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농성장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 이 시절을 향해 소리 내고 있다.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이 참사의 진상 규명을 바라는 유가족과 계층 모를 사람들이 모여 인터뷰집과 영상, 영화를 중간다리 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렇게 야학에서도 세월호 집담회가 열렸다.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지난 1월 26일, 교실 두 칸을 튼 공간에 교사, 학생들이 빼곡히 모여 앉았다. 교실 안쪽에 자리 잡은 전동휠체어를 탄 이들은 꿈쩍거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공동 저자인 은전 언니가 집담회 사회를 맡았다. 나는 이 책이 전국 순회를 마치고 마침내 야학에 온 것 같았다. 집담회에는 이창현 군의 어머니 최순화 님, 광화문 서명지기 조미선 님이 함께해주셨다. 우리는 「바다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영상을 함께 본 후 이야기를 나눴고, 두 시간 꼬박 진행됐다. 그날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보니 A4 용지 15장이 넘는 분량이었다. 녹음된 목소리를 글자로 옮겨 적으며 또 여러 사람이 훌쩍였다. 뜨거운 것이 출렁거리며 쳐들어오는 듯했다. 그날 나눈 이야기 전문은 야학 홈페이지에 올려두었다. 이 지면에는 그날의 이야기 아주 일부만 가져왔다.
제목: 방석 아주 방석이 비싸더라도 우리 엄마 무릎 밑에 얹으고 싶어요. - 이창현 (단원고등학교 2학년 5반) |
홍은전: 창현 학생이 쓴 시인데요, 시가 너무 귀엽고 따뜻한 거 같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는데 그 아이가 세상에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한테 창현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게요. 창현이는 어떤 아이였고 어머님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최순화: 그냥 보통의 열여덟 살을 지내고 있는, 지내고 있었던 보통의 청소년이었어요. 공부하는 거 싫어하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 제일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또 엄마를 제일 싫어하고, 사춘기라. 창현이 누나가 하나 있는데 누나도 사춘기를 겪었는데 그래도 대화는 됐거든요. 근데 남자 아이는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아예 말하는 걸 싫어하더라고요. 그게 사춘기의 특징이었는데 저는 저를 정말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엄마를 싫어했다기보다 사춘기의 특징이었어요. 창현이 가고 나서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는 됐는데, 그게 제일 속상하죠. 서로 좋은 모습을 보다가 헤어진 게 아니라 저도 오해를 하고 창현이도 오해를 했던 거 같아요. 엄마가 별로 지 안 좋아한다고. 그건 있었어요. 제가 낮게 평가하는 거. 왜냐면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자랑할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공부도 안 하지 부모에게 살갑게도 안 하지. 그리고 교회를 잘 다니기는 하지만 신앙이 좋아보이지도 않고. 아무튼 엄마의 기준이, 제가 정해놓은 기준에 다 미달이어서. 제 마음속으로도 그랬어요. 사실은 낮게 평가하고 있었어요. 그 부분이 제일 미안해요. 그냥 보통의 아이였는데, 그게 사춘기 때 당연한 거였는데, 그걸 몰라준 게 제일 미안하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둘도 없는 아들이었죠.
홍은전: 다음 질문은 조미선 선생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 활동에 참여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광화문 서명지기라고 소개해주셨는데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는지 얘기해주세요.
조미선: 난생 처음이었어요. 이렇게 저와 관계가 없는 사건에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정말 미안해하고 이렇게 애도했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 꽃보다도 더 예쁜 아이들이 그렇게 어이없게 죽는 모습을 저희가 TV로 지켜봤잖아요. 정말 너무 충격이었어요. 옆에 있는 창현이 엄마가 저와 동갑이거든요. 희생된 아이들과 저희 아이들이 또래인 거죠. 그러다보니까 감정 이입이 더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치 내 아이가 그 바다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고. 또 이 참사가 사회의 부조리의 총합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 거잖아요. 단원고 아이들이 정말 그날 어쩌다가 재수가 없어서 그 곳에 탄 것이지 우리 아이가 탈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정말 바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TV만 보고 울고만 있었었어요. 그러다가 참사 초기에 정말로 많은 봉사자들이 진도로 내려갔잖아요. 저는 그때 내려가지는 않았어요. 5월 들어서면서 시신들이 많이 올라오면서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빠졌어요. 그때 1박 2일 코스로 해서 단원고 이름으로 봉사자를 모집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신청해서 남편과 2014년 5월 16일 처음 진도를 내려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봉사를 하게 된 곳이 팽목항 검안소 앞에 있는 가족대기실이었어요. 그곳에 하루 종일 있었고요. 올라오는 시신이 없어서 남편과 계속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5월 17일 참사 32일이 되던 그날 새벽에 한 학생이 수습이 됐어요. 그 학생이 2학년 8반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올라온 아이였어요. 조찬민이라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제가 그 부모님과 함께 그 아이의 시신을 검안소에서 보게 됐어요. (…)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런 참사를 두고도 이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게 나랍니까? 당연히 바뀝니다, 그렇게 제가 큰소리를 쳤어요. 그리고 헤어져서 서울로 왔는데요. 가만히 보니까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바뀌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요, 진상 조사도 안 되는 거예요. 진실 규명조차도 안됐어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제가 찬민이 어머니한테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겠고, 그게 또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던 마음이기 때문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팽목항에 또 1박 2일로 몇 번을 내려갔다가, 7월에는 국회에 가서 피켓팅을 했어요. 죽음 앞에 진실을 말하라고, 피켓팅을 하루 종일 했고요. 그리고 그 다음날에 광화문 농성장이 차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그때부터 서명지기가 됐어요.
홍은전: 며칠 전에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상을 받았어요. 그때 창현이 어머니께서 수상 소감을 얘기하실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416참사 후에 부모님들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 또한 기록되어야 한다고요. 참사 후에 저희도 시민사회 집회 같은 데 가보면 구호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는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만, 부정부패, 탐욕, 무책임, 생명보다 이윤을 먼저 계산하는 풍토가 만연한 한국사회를 그 이전으로 돌릴 수 없다,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인데요. 저도 그 구호를 좋아했습니다. 창현이 어머님이 일기에 쓰신 게 기사화된 적이 있는데, 가장 슬픈 게 뭐냐고 누가 물어봤대요. 어머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는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나는 가장 슬프다’고. 저는 그 말이 되게 아프더라고요. 만약에 저라도, 한국사회가 아무리 더러워도, 못 참을 만해도, 다시 가족을 살릴 수 있다면 저는 그런 사회로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을 것 같아요. 참사 후에 어머님의 삶이, 가족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장 크게 변한 게 뭔지 어머님께 듣도록 하겠습니다.
최순화: 마음은 보여드릴 수는 없는데, 제일 많이 변한 건 마음이죠. 저도 똑같이 살았어요. 아이들 잘 키우는 게 최고의 목표였고, 그거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맞벌이를 해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게, 서민으로서 안 되는 현실이잖아요.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저도 아이를 기르면서 그게 쭉 굳어지더라고요. 노후는 어떻게 될지, 노후 대책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피하고 그냥 아이들 잘 키우는 게 전부였고,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었어요. 저는 이 땅에 와서 그냥… 평범하게 사람으로서 잘 사는 것 그 정도 꿈이었는데, 그게 제 꿈의 전부였는데 그게 없어진 거잖아요. 아이 둘 중의 하나가 없어졌는데, 다 없어진 거더라고요. 그니까 가족 네 명 중에 한 명이 사라졌는데 가정이 다 파괴되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냥 병으로 죽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일 텐데, 전혀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하루에 벌어지고 나니까.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의문투성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혹은 더 불어나고 이런 상황에서, 가정이 겉으로 보기엔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저희 가족뿐만 아니라 다 그렇더라고요. 다 가정이 파괴된 거죠. 모든 사람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난 거예요. 생존자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살아남은 생존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그 아이들은 살아갈 날이 더 길잖아요. 이번에 12일에 졸업한 그 아이들이 정말 걱정이 돼요. 그니까 자기들 친구를, 친구 250명을 한 번에 잃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걸 안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저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에요. 이 상황에서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한 목소리로 내는 것은 그냥 진실 규명인데 그거밖에 없는 거죠, 할 수 있는 게. 꿈이 다 없어지고, 내 가족의 꿈이 산산조각 난 상태에서 뭘 갖다 준들 그게 좋겠어요? 좋은 게 하나도 없는 거죠.
주변에 있는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건 그건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저희가 감았던 눈이, 감겼던 눈이 떠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약자들을 위해서 또는 정의를 위해서 온 삶을 바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또 너무나도 약한 사람도, 억울한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분처럼 이렇게 약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이전에 바랐던 성공, 잘 사는 것 이런 게 아니죠. 그냥 우리처럼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살아야 된다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된다는 것. 그리고 저도 신앙인인데, 하느님 믿는 사람인데, 하느님의 마음이 약자들을 향해 있다는 걸 지식으로는 알았는데 온전히는 몰랐거든요. 근데 하느님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향해 있더라고요. 온 마음이, 온 시선이 약자들을 향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이제 안 거죠. 이제 안 것에 대해서 그나마 다행인 거고 감사한 일인데요. 앞으로 저희 가족들의 삶도 그런 삶을 따라갈 것 같아요. 이전에 그냥 평범한 삶을 꿈꿨다면 조금 더 의로운 삶, 나은 삶, 약자들을 위한 삶에 시간도 들이고 마음도 들이고 또 몸도 그렇게 향할 것 같아요. 여러분과 같은, 같은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과 소감 몇 가지-
김명학: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봤어요. 거기에서 이창현 학생 얘기를, 어머님이 인터뷰한 것을 읽었어요.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방석’ 이야기하고, 이창현 아버님이 새누리당 김무성 씨한테 무릎 꿇는 대목이었어요. 제가 많이 속상하고 그랬습니다. 왜 이창현 학생 아버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한테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끝끝내 대통령이나 그 사람이나 냉정하게 외면했습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이 대한민국 권력자의 대표로서 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자는 그렇게 냉정합니다.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했던 것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참 슬펐습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면 형편없이 병들어가는 사회이고, 국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자들은 두 귀, 두 눈 다 감아버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우리 서로 힘내서 열심히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홍은전: 제가 며칠 전에 세월호 때문에 어떤 자리에 나갔는데요. 누가 저한테 물어봤어요. 유가족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기록하고 하면서 나에게 온 변화가 뭐냐고 저한테 물어봤어요. 저는 어떤 게 변화가 있냐면요.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인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너무나 억울하고 어이없게 잃었을 때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이런 상상, 할 수 있잖아요, 많이 불안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유가족 분들이 어떻게 싸우셨는지 저희도 옆에서 봤으니까 아 저렇게 싸우면 되는구나, 저렇게 살면 되는구나, 이런 걸 본 것 같아요.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이 정말 보기가 힘든 책이에요. 저는 그 책을 일부 썼지만, 다른 사람들 꺼 보기도 힘들고요. 제가 쓴 걸 제가 다시 보기도 쉽지가 않아요. 눈물이 펑펑 나거든요. 그래도 그 책이 되게 힘이 있는 책이에요. 어떤 힘이 있냐면, 그 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버님들, 어머님들이 싸우는 힘이 다른 게 아니라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존재를 지키는 것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박경석: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잘 들었습니다. 들은 것이 들은 걸로 끝나지 않고 계속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도 광화문 밑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투쟁을 천오백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양의무제도 폐지하고 장애등급제도 폐지할 거예요. 그리고 반드시 그럴 건데, 그 믿음만큼 세월호도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투쟁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죠? 노들야학은 그렇게 생각하죠? 함께 끝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홍은전: 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광화문 그곳에 계속 있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그 차가운 거리에, 여전히 가열차게 버티고 계셔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노들야학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두 분 건강 잃지 마시고, 노들야학도 언제나 그 옆자리를 함께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집담회 내용 전문은 노들야학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