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가을 105호 - [노들아 안녕] 송무림 송정규 박누리 김진수 이상우 최영은 이수현 이승헌 정우영
노들아 안녕?
노들과 새롭게 함께하게 된 분들을 소개합니다
송 무 림 l 송 정 규 l 박 누 리 l 김 진 수 l 이 상 우 l
최 영 은 l 이 수 현 l 이 승 헌 l 정 우 영
질문하는 이 - 노들장애인인권센터 정 민 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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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송 무 림
안녕하세요. 혼자서도 맥주 캔 하나 들고 한강을 거닐기, 홀로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기, 여행 떠나기 등 고독을 즐기는 활동가 송무림입니다.
Q 무인도에 나 혼자 가게 된다면, 꼭 가져가야 할 세 가지와 그 이유는?
● 칼 또는 도끼_ 나무를 베어서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잡은 물고기나 과일 등을 잘라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일 것 같네요.
● 돋보기_ 햇빛을 모아서 불을 피울 수 있고, 그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힐 수도 있어요. 단, 햇빛이 잘 들지 않을 경우엔,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피워야할 것 같네요.
● 옷_ 체온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 자연의 것을 이용하여 입고 다닐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입고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왕이면 기능성 옷으로.
Q 학창시절 나의 별명은?
● 삼촌_ 지금은 나이대의 외모를 회복했지만, 그 때 당시엔 노안에다가
머리도 짧고 수염도 있어서 단짝친구가 삼촌으로 불렀죠.
● 송사리_ 초등학교 때 흔히 부르던, 이름 앞의 성씨에 붙이던 별명이었죠.
Q 내가 소중한 이유를 세 가지만 꼽는다면?
● 가족_ 나를 위해 온전히 사랑을 베풀고 고생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에요.
● 친구_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가 있고, 반대로 그 친구에게 지지와 응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에요.
● 나_ ‘나’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소중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Q 나에게 노들센터란?
오랜 취업 준비 기간을 거쳐 어렵게 노들센터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몇 개월 동안 다른 진로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었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들어오게 된 터라 나름의 애정(?)과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노들에서 일하면서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찾았고, 좀 더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어요. 주변 사람들을, 스스로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동안 소원했던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죠. 그리고 그동안 무관심하던,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한 관심도 생겨나게 되었어요. 노들센터는...... 나 자신, 주변 사람들, 사회를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들어준 곳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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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송 정 규
저는 노들센터 활동보조 코디 송정규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뭐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성격이 좋고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잘나지도 않았는데 잘난 척 하는 저를 보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요. 평생 웃으면서 살고 싶어요~
Q 무인도에 나 혼자 가게 된다면, 꼭 가져가야 할 세 가지와 그 이유는?
● 스마트폰_ 엄마 걱정 할까봐.
● 담배_ 지금은 비흡연자이지만 무인도에서 센치하게 피우고 싶을 듯.
● 통통배_ 무인도 생활 즐기다 지겨우면 나가야지.
Q 학창시절 나의 별명은?
하정우
Q 내가 소중한 이유를 세 가지만 꼽는다면?
소중한 가족이 있고, 소중한 친구가 있고, 소중한 동료가 있다.
Q ‘나’에게 ‘노들센터’란?
노들센터는 내가
원 - 하는 만큼
두 - 발로 뛰는 곳
커 - 다란 꿈을 이루기 위해
피 - 땀 흘려 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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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 박 누 리
Q 무인도에 나 혼자 가게 된다면, 꼭 가져가야 할 세 가지와 그 이유는?
1. 물 2. 라이터 3. 맥가이버칼
일단 기본적으로 물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물은 꼭 있어야 하고 물과 또 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불을 자연 재료로 피우기에는 너무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라이터가 있어야 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먹을거리를 구하거나 잠을 자기 위해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할 때는 칼이 있어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냥 칼보다는 맥가이버 칼이 여러모로 유용할 거 같다.
Q 내가 소중한 이유를 세 가지만 꼽는다면?
세 가지나 필요할까 싶다. 하나로도 충분할 거 같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하게 되었다. 전에는 나 자신조차 나를 소중하다고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들에 와서 이야기를 듣고 교장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여러 단체에 연대하고 생활하며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야학에서 주로 했던 활동들은 차별받고 소외받은 사람들, 자본 앞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과 연대하여 차별에 저항하는 활동이었다.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소외받고 차별받지 말아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먼저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여 내가 소중한 이유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거 같다.
Q ‘나’에게 ‘노들야학’이란?
아직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다. 야학에 온 이후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야학 일정에 맞춰졌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못 견디게 싫거나 너무 너무 짜증나거나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이렇게 되어 있었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전에 회사를 다닐 때는 일어나는 게 너무나 싫었고 내가 일어났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 출근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퇴근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마음이 확실히 덜 생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지? 하며 핸드폰 일정을 보게 되고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지 한번 생각하며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나에게 노들야학이란 어느 순간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언제 친해졌는지 모르게 일상을 공유하는 언제부턴가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을 함께하고 있는 친한 친구 같다.
Q ‘야학’에 상근을 결심하게 된 계기 또는 이유는?
야학에 들어오면 입구 현수막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작년 10월부터 교장선생님의 활동보조로 야학에서 생활하고 야학에 느믈느믈 스며들면서 야학의 기조로 삼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의 말을 오며 가며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멋있는 말이구나 하며 넘겼다. 그러나 야학의 투쟁에 함께하고 신임교사 세미나를 하고 일상을 함께하며 야학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걸 어느새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차 교장선생님이 상근 제안을 하였고 제안을 받아들여 야학의 상근자로 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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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 김 진 수
4년 만에 야학에 상근자로 돌아온 김진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노들!
Q나에게 통통슈퍼란?
조금은 지루한 슈퍼생활에 즐거움을 준 통통슈퍼 영업상무 우리 강아지 통통이. 우정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걸 알게 해준 교희, 원희. 짝사랑 하는 유치원 선생님을 우연히 마주치고 싶어 슈퍼에 왔다가 짝사랑은 실패하고 나랑 친해진 체육학원 최00 선생님. 막걸리 이름이 우리 딸 이름이랑 같다며 순희 막걸리만 사가시던 양래 아저씨, 매주 먼 길을 마다하고 길 고양이들 밥을 주러 슈퍼에 오셨던 고양이 아줌마. 동네 꼬맹이 경민이와 그 친구들, 그리고 통통이 남자친구 점백이까지.
슈퍼를 하면서 맺은 인연들을 적어봤어요. 누군가 통통슈퍼에 대해 물어본다면 전 이 인연들에 대해 말할 거예요.
Q 슈퍼를 하고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들었던 생각은?
그냥 걷고 싶었어요. 생각 없이 무작정. 근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렇게 걸을 거면 굳이 제주도까지 가야 했을까 싶네요. 어디서든 걸으면 될 텐데. 그래도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Q 야학에 상근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유는?
슈퍼를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만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교장샘을 비롯한 노들 상근자 분들의 제안이 있었어요. 무엇을 할까? 라는 저의 고민과 야학에 사람이 필요한 노들의 상황이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서로의 리듬이 맞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리듬, 타이밍이 중요한 거 같아요. 연애하는 것처럼요.
Q 나에게 노들 야학이란?
이 질문을 받자마자 전에 책에서 본 문장이 생각났어요. ‘마주치지 않고는 시를 읽을 수 없다’라는 문장인데요. 시를 읽다보면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시가 있고 마음에 남아 곱씹어 보는 시가 있잖아요. 전 그 마주침이 내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마음을 흔들지 않고는 시를 읽을 수 없는 거죠. 그렇게 볼 때, 저에게 노들은 마주침의 공간이에요. 여러 마주침들이 노들엔 있어요. 그렇다면 전 읽을 수밖에 없죠. 노들을. 그 마주침들을. 쓰다 보니 궁금하네요. 다른 분들의 마주침을 그리고 그 마주침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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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 이 상 우
Q 언제, 어떻게, 왜 장애인생활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나?
집 형편이 어려워서 시설에 들어가게 됐죠. 그것도 어린 나이에요. 그것 아세요? 오랜 세월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서 산다는 것. 가족들과 연락이 안 되는 곳에서요. 한번 생각보세요.
Q 언제, 어떻게, 왜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오게 되었나?
시설에서 자립생활을 준비하다가 이음여행을 갔어요. 그때 같이 시설에 있었던 병기 형이 저랑 영은 씨한테 아직도 나올 마음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나올 마음이 있다고 했어요. 그 뒤로 영은 씨랑 같이 나오게 됐어요.
Q 자립생활을 하며 가장 힘든 점은?
처음 나왔을 때 활동보조 시간이 많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시간이 많이 있어서.
Q 자립생활을 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은?
매일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거요.
Q 나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
제 이상형은 영은 씨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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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 최 영 은
Q 언제, 어떻게, 왜 장애인생활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나?
저는 5살 때 친아버지께서 꽃동네 성모상 앞에 포대기에 싼 채로 놓고 가셨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저를 발견하셨다고 해요. 저는 천사의집에서 무럭무럭 자랐고, 9살부터 학교에 다녔어요. 초등 1,2학년까지 시설에서 운영하는 재택학교를 다니다가 오웅진 신부님께서 꽃동네학교를 만들어주셔서 꽃동네학교에서 초3부터 고3까지 다녔죠! 기숙사생활을 10년 동안 하다가 저는 성인시설에 입소했죠!
Q 언제, 어떻게, 왜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오게 되었나?
2011년부터 성인시설에서 살다가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어 자립하게 되었습니다.
Q 나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
제 이상형은 이상우 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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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노들 ● 이 수 현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인생 4학년의 이수현입니다. 고2 학생인 딸과 함께 매일을 싸우며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고 살아가는 재미라 여기는 행복을 만들 줄 아는 여자랍니다. 노들에 입사한 첫 달에는 일이 너무 많아 울고 싶었답니다. 지금은?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을 얻었다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일합니다.^^
Q 무인도에 나 혼자 가게 된다면, 꼭 가져가야 할 세 가지와 그 이유는?
● 핸드폰_ 음악도 듣고 세상 소식도 듣고,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카카오스토리에 올려야지.
● 바둑판_ 요즘 알게 된 신세계? 7살 조카한테 배우고 있는데 시간 보내기엔 제격이다.
● 칼_ 나무 베서 불도 지펴야 하고, 요리할 때 써야 하고, 위험한 동물도 무찔러야 하고 여러 용도로 쓰이니까~
Q 학창시절 나의 별명은?
● 오리_ 잘 웃는 편인데, 웃을 때 광대가 많이 승천하여~ 그 모습이 꼭 오리를 닮았다고 한다. ㅠㅠ
Q 내가 소중한 이유를 세 가지만 꼽는다면?
● 그냥 나니까~~_ 대한민국에, 지구상에, 우주에 ‘나’는 유일하게 한 명뿐이니까!!
● 내 꺼니까~~_ 세상도 가족도 친구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사체이다.^^
● 마음이 예쁘니까_ 나름 좀 착하다(?). 친정어머니에게 착한 딸, 나의 딸에게 꼭 필요한 엄마로 있어 주니까~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의 나를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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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노들!
이 승 헌 | 2002년에 ‘민중복지연대’라는 단체의 상근자로서 최옥란 열사 투쟁, 이동권 투쟁, 에바다 투쟁을 함께하면서 장판과 인연을 맺었다. 그해 말 민주화 과정에 있던 에바다복지회의 사무국장을 맡게 되면서 평택에 내려가 오랫동안 일했다. 2015년 5월부터 (사)노들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노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작년 가을에 저는 무척이나 힘들었답니다. 12년을 내 한 몸 안 돌보고 일한 현장에서, 형제보다 굳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에 의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만약 그때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라도 없었다면 스스로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년 10월이었나 봅니다. 동숭동의 한 술집에서 교장선생님을 만나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날의 자리가 계기가 되어 이렇게 노들에 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복지관 관장까지 지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노들에 왔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제가 가진 기득권을 스스로 다 내려놓고 활동가의 삶을 택한 엄청 훌륭한 활동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답니다. 사실 저는 갈 곳을 잃은 상태였고,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으니까요. 복지관장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대한민국의 복지 현장에서 저 같은 성향의 사람을 달가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복지 현장에 다시 취업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운동판에서도 워낙 쟁쟁하신 분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은 터라 당장 활동할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저를 이순재 할아버지 말마따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여준, 그리고 십 수 년 전 함께 투쟁했던 그 기억만으로 신뢰를 보여준 노들과 노들의 활동가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매일같이 경기도의 가장 남쪽에서 서울 북부까지 출퇴근을 반복하며 이런 저런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면 솔직히 지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를 신뢰하고 받아준 노들이, 장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허락해준 노들이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좌우지간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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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정 우 영 | (사)노들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사업인 ‘중증장애인 탈시설모델 개발사업’을 맡고 있고 있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10여년 만에 정겨운 얼굴들을 마주한다. 반갑다. 그리고 장판이 참 많이 변한 걸 실감하는 중이다.
자리가 필요했던 나는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가까운 후배들을 만난 자리에서 활동보조인을 해도 되겠냐고 의견을 구했다. 백수생활을 지켜보는 게 조금은 짜증이 났는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해보라고, 괜찮다고.
6월 초부터 일주일간 (사)노들에서 진행하는 활동보조인 양성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같이 받던 후배는 나에게 활동보조를 받아야 할 입장인데 무슨 교육이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어쨌거나 다수의 강의가 장애인운동 및 인권과 관련된 것이고,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들의 구체적인 삶과 경험에서 나오는 증언과 주장들이라 지루하진 않았다. 또한 중증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의 관계가 자칫 갑을관계로 변질될 여지도 있는 현실에서, 활동보조인의 권리로서 노조활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시간은 인상적이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아마도 장애인의 권리와 욕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활동보조에 필요한 테크닉만을 전달하는 강의였다면 전체 40시간 중 반 이상을 제쳤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교육을 받으며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장애인운동이 다른 운동과는 연대의 고리가 끊긴 소수 이익집단의 고립된 활동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장애인단체들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방향이 아닌, 여전히 이익집단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운동은 21세기 들어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80년대 중반에 맹아가 싹튼 초기의 장애인운동은 노동 가능한 경증장애인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증장애인들이 운동의 핵심 동력이다. 이러한 내부 동력의 변화와 함께 장애인운동이 발전해 왔다는 판단이다. 분명 20세기 후반보다 21세기 장애인운동의 위상이 확고하다.
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장애인의무고용제의 시행으로 노동 가능한 장애인들이 체제내로 편입되는 것과 함께 운동의 동력이 축소되는 흐름이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변혁적 운동의 입지가 축소되는 상황에서 장애인운동의 전망 역시 불투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던 것이다.
대략 90년대 초반 『장애인복지신문』 지면을 통해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빈곤계층 가운데서도 최하층인 장애인을 계급론적 관점에서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규정은 장애인이 처한 열악한 조건을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의도였다. 그런데 한번은 근육장애를 지닌 한 중증장애인이 이 주장에 대해 항의를 했다. 그 반론의 요지가 잘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주체적 존재가 아닌, 부모나 형제 등 타인의 경제력에 얹혀 단순히 소비만 하는 계층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해했다. 그렇다. 기생적 소비계층으로서의 비주체적인 삶은 거부되어야 할 우리의 냉혹한 과거이자 현실이다. 우리에게 다가올 가까운 미래 역시 이러한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화되고 상품화된 왜곡된 삶의 굴레를 거부하는 투쟁, 인간 본연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향한 투쟁만이 희망일 것이다. 30여년의 장애인운동의 역사가 우리의 희망이었듯이.
지난 6월 중순, 활동보조인이 아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하는 중증장애인 탈시설모델 개발사업의 담당자로 노들에 합류했다. 박경석 대표가 볼 때마다 어려운 거 없느냐, 힘들지는 않느냐고 묻는다. 누차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게, 혹 업무 능력에 대한 못미더움도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힘든 거 없다고, 편하다고 대답한다. 당연히 낯선 얼굴들이 대부분이고, 가마솥더위에 체력적 한계로 낑낑거리고 있으며, 가뜩이나 불량한 촉은 더더욱 둔해져 있긴 하다. 그러나 정말, 마치 집에 돌아온 것같이 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