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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꿈」 촬영 노트
노들야학 민구

 

 

첫사랑과의 조우.jpg

 


⁎ 기획/대본/연출: 민구, 지예
⁎ 촬영: 승천, 신행
⁎ 편집: 호경
⁎ 주연: 경석, 사랑


⁎ 도움 주신 분들: 은혜미용실 원장님, 혜화역 1번 출구 앞 노점 아저씨, 예준 엄마 황혜민, 노들
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줄거리: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박경석이 머리를 기르면서 승승장구한 장애인운동. 그러던 어느
날 하얗고 긴 머리카락 때문에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된 경석은 화가 나 머리를 잘라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경석이 머리를 자르면 장판에 큰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랑은
앞으로 큰일이 날 것이라며 안 보이는 학생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고, 같은 시각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데….

 

러닝타임 17분, 단편영화 「할머니의 꿈」은 마을미디어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작품 준비는
여름부터 했지만 실제 촬영은 11월 말, 일주일 만에 후다닥 이뤄졌다. 번갯불에 콩은 이렇게 구워
먹는 것이다! 느낌으로?!


「할머니의 꿈」은 많은 노들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 주연 배우를 뺀 나머지 배우는 대부분 촬영
당일에 섭외했다. 장소 역시 당일 섭외. 이렇게 해서 뭐가 되려나 싶기도 했지만 호경 샘의 눈부신
편집으로 길가에 구르던 ‘개똥’이 ‘약’이 됐다. 지면을 빌어 호경 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꾸벅.


「할머니의 꿈」은 마을미디어 시상식에서 인기상을 거머쥐었다. 캬르르르. 시상식에서 작품을 설
명하는 리플렛에 「할머니의 꿈」은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소개됐다. 사실 주최 측의 단순
한 실수로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다큐멘터리가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015년 420장애인권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니 영화가 궁금하신 분은 꼭
한번 보길 권한다. 안 보면 님만 후회할 거다. 벼락치기 촬영이긴 했지만 재밌었다.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도 남았다. 아래, 재미난 에피소드만 추려봤다.

 

 

1. 동네 꼬마아이와의 만남

 

“엄마, 저 할머니 왜 저래?”,
“쉿! 엄마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영화에서 격렬했던 집회를 마치고 야학으로 들어오는 길에 경석이
듣게 되는 말이다. 아이의 눈에는 경석의 휠체어 탄 모습이 신기했
겠지만, 경석은 ‘할머니’라는 말에 더 기분 나빠하며 씩씩 댄다.

 

 

동네 꼬마아이와의 만남.jpg

 

이 대사는 ‘할머니’라는 단어만 빼면 실제 교장샘이 들었던 말이다. 교장샘은 해병대를 제대하던 해인
1983년 8월, 경주 토함산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학생행글라이딩대회에 참가해 토함산 하늘을 날다가 추락해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일요일이었던 사고 당일, 교장샘의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교회에 가자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교장샘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행글라이딩 대회에 참가한다. 그래서 교장샘은 스스로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장애인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2. 첫사랑과의 조우

 

커피 내기 가위바위보에서 진 경석이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첫사랑과 조우한다.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에게 경석이 “옛날에는 굉장히 예뻤는데 지금은 쭈그렁 방탱이가 다 됐네.”라고 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첫사랑 그녀는 경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 대며 말한다.
“뭐라고? 쭈그렁 방탱이? 쭈그렁 방탱이가 뭐야, 오랜만에 만나서.
너는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머리 하얀 할머니 장애인이야!”


이 장면에서 나온 경석의 첫사랑 역할은 용산행복장애인자립생활센터 신선옥 소장님이 해주셨다. 촬영 당시 회의가 있어 노들에 오셨다가 캐스팅되셨다. 말하자면 길거리 캐스팅인 셈이다. 섭외할 때는 연기를 못한다고 많은 걱정을 하셨지만 막상 샷이 들어가자 폭풍 연기를 선보인다. 기가 막힌 캐스팅이다. 당시 대본상으로는 첫사랑과 말다툼을 하는 정도로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대뜸 교장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흔들어 댄다. 몇 번의 NG가 이어지자 (내가 봐도 불쌍했음) 머리가 아팠던 교장샘도 진심 죽기 살기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리얼이다. 덕분에 좋은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 신선옥 소장님 땡큐!!

 

 

 

3. 미용실을 찾아 나선 경석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미용실을 찾아 나선 경석.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미용실을 발견하지만 휠체어 접근이
안 된다. 온통 계단뿐.
“온통 계단이야 계단. 이씨! 공구리를 확 쳐 뿌까. 이씨!”
 

 미용실을 찾아 나선 경석.jpg

 

 

 

실제로 대학로에서 휠체어 접근이 용이한 미용실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미용실뿐만이 아니다. 대학로에 천지빽까리로 널린 게 술집과 밥집이지만 휠체어 접근이 용이한 곳은 찾기 어렵다. 심지어 노들야학 뒷마당이라 불리는 마로니에공원 야외무대도 휠체어 접근이 힘들다. 야외무대에서 장애인이 휠체어를 탄 채로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있었다. 노들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지만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법적인 문제만 없으면 끝이란 말인가. 안 되겠다. 직접행동에 나설 때이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며 계단에 시멘트를 바르는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그리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다. 바로 입질이 온다. 종로구청 담당부서에서 당장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다. 마음 약해진 우리는 시멘트 대신 뿅망치에 물감을 묻혀 계단을 부수는 퍼포먼스로 대체를 했다. 지금 야외무대는 경사로 공사 중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시 우리의 실천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당연한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타깃을 물색. 대학로에 타깃은 차고 넘친다. 그 중 두 번째 타깃으로 선정된 행운의 장소가 바로 영화에 나오는 그곳이다. “이씨! 공구리(콘크리트를 이르는 속어)를 확 쳐 뿌까!”라는 말은 그냥 말뿐인 말은 아니라는 말이다(이게 무슨 말이야…).

 

 

 

4. 성신여대역 승강장 간격

 

경석이 머리카락을 자르러 나섰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랑은 승천에게 지금 안 보이는 학생들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재촉한다. 동림에게 전화를 한 승천. “형 지금 어디에요?”, “지금 성신여대역인데요”, “성신여대요? 거긴 단차 간격이 넓잖아요. 빨리 야학으로 들어오세요.” 결혼기념일 데이트 약속이 있던 동림은 전화를 끊고 승천의 말을 무시한 채 지하철에 오른다. 이때! 동림의 휠체어 바퀴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에 빠지며 헛돌기 시작하는데….

 

 성신여대역 단차간격.png

 


2013년 4월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는 한 시각장애여성이 지하철을 타려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발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성신여대입구역은 이전부터 승강장에서 열차까지의 간격이 넓고 단차도 매우 커 장애인의 안전사고가 항상 우려되었던 악명 높은 역사이다. 특히 사고 지점의 간격은 무려 17cm나 돼 장애인은 물론 어린이와 노인 등의 교통약자는 언제나 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성신여대입구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며칠 전에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판’소속의 한 활동가가 홍대입구역에서 내리다 발이 빠지는 바람에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렇듯 비장애인이 크게 의식하지 못할 수 있는 승강장의 간격과 단차로 인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촬영을 했다. 그리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의도할 수도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동림이 형의 휠체어 뒷바퀴가 승강장 사이의 넓은 틈에 빠지며 헛돌기 시작한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도 순간 당황했지만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살짝 쾌재를 불렀다는.^^;

 

 

 

5. 횡단보도 건너는 애경

 

야학 수업에 늦어 급한 마음에 전동휠체어 속도를 높이는 애경. 마침 신호등 파란불이 깜빡인다. 급한 마음에 전속력으로 횡단보도를 향해 돌진하는데, 그녀의 앞에 턱 하나가 버티고 있다. 아뿔싸! 뒤늦게 턱을 발견한 애경은 급정지를 하는데….

 

 

횡단보도 건너는 애경.png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장면이다. 실제 주인공은 노들야학 청솔2반에 재학 중인 남옥 누나. 몇 달 전 같은 상황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턱 하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진하는 바람에 휠체어채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앞니 3개가 심하게 흔들려 임플란트를 했고 전신에 타박상을 입는 큰 사고를 당했다. 횡단보도에 있는 작은 턱 하나, 그 작은 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천 길 낭떠러지일 수도 있다.

 

 

 

6. 송국현 동지의 죽음

 

결국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미용실에서 돌아 나오는 경석과 사랑. 이때 울리는 카톡.
[전장연-부고] <자립생활의 꿈을 안고 시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송국현 동지가 집에서 발생한 갑작스런 화재로 돌아가셨습니다. 활동보조인만 옆에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입니다…. 장례는 서울대병원에서 치를 예정입니다. >

 

 

송국현동지의 죽음.png

 


실제로 24년 동안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다가 자립생활을 꿈꾸며 시설에서 나온 송국현 씨는 일상생활에 활동보조인이 필요했지만 장애3급 판정을 받아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는 장애등급 재심사와 긴급지원을 요청했으나 장애등급심사센터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2014년 4월 13일, 송국현 씨는 홀로 집에 있다 화재 현장을 피하지 못해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고 4월 17일 끝내 숨을 거뒀다.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장애인의 삶.
세월호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 모두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세상에 함께 맞서겠습니다.


- 이것이 바로 할머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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