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겨울 129호 - 동숭동 김장기 : 자립에 대해서 / 김장기, 오규상
동숭동 김장기
: 자립에 대해서
김장기 |노래부르기와 그림그리기를 좋아한다. 2016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립생활주택에 입주했고 2021년 10월 동숭동에서 자립을 시작했다.
오규상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해서 탈시설과 홈리스운동의 자리를 기웃거린다.
트럭 부를 거야?
좁은 계단을 올라 도어락을 쳐다본다. ‘삐 삐 삐삐삐 삐 삐삐 삐삐 삐, 띠리링’ 비밀번호를 한참 누르고 집에 들어간다. 번호를 제멋대로 눌러도 마지막에만 맞게 누르면 열리는 도어락이다. 외투를 걸고 샤워를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세탁기에서 옷들을 꺼내 옷방 겸 거실에 있는 빨래건조대에 널었다. 전기밥솥에 밥이 충분한가 확인한다. 김장기는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안방에 들어가 커피믹스를 한잔 타며 TV를 보다 이내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TV와 침대 사이에 놓인 소반 위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김치 한 접시와 밥 한 공기 그리고 불은 라면이 뚜껑 없이 놓여있다.
2016년, 6년간 머물던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주택에 입주한 김장기는 야학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학에서 일하다 공부하고 놀다 밥을 먹는다. 화가 날 때면 누군가에게 “아주 내가 야학을 안 갈 거여! 내가 안 가면 되는거여?”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다음 날이면 또 누군가에게 “저기 나 핵교 언제 가면 돼?” 하고 묻는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깔끔한 신축 빌라에 위치한 자립생활주택에서 다른 입주자 2명과 같이 살았다. 그는 2018년에 자립생활주택에서 지역으로 자립한 뇌병변 장애인이 남긴 개인 화장실이 딸린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은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동거인 A에 우선권이 있었지만, A가 방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아서 김장기가 들어갈 수 있었다. 김장기는 가끔 다른 동거인 B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하곤 했지만, 그 사유는 대개 B가 늦게 들어온다거나 혹은 B가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일상의 대부분을 야학에서 보내고, 주거 환경도 일견 ‘그만하면 괜찮지’싶은 김장기는 이사를 가고 싶어 했다. 차에 관심이 있는 김장기는 종종 “트럭 부를 거야?”라는 말로 이사가 가능한지 넌지시 확인하곤 했다. 2021년 내내 그는 사람들에게 옷은 어떻게 가져가고 농은 가져가도 되는지, 컴퓨터는 어떻게 할지, 열쇠는 새로 하는지 질문했다. 야학 교사 ‘국어쌤’과 ‘잠바쌤’(주택에 함께 살았던 다른 입주자의 활동지원사)을 초대하여 밥을 먹고 싶어 했다.
1(왼쪽)이사하는 날 / 2(오른쪽)이사하는 날 현관문을 여는 김장기
노들에서 먼 데는 안돼
김장기는 기초생활수급권이 있고 종로구 일자리에도 참여하고 있어 일상을 꾸리는 데 금전적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하고 보호자 의뢰로 시설에 들어갔다 나온, 한글과 숫자를 모르는 김장기가 지닌 돈은 본인 명의의 주거계약서를 갖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2021년 4월 서울시 전세주택보증금 지원(1.6억 원, 최대 6년) 대상에 선정되었고, 6월 성북구 삼선동 SH임대주택 입주 대상에는 탈락했다. 7월 이후 ‘영희네부동산’의 도움을 받아 전세주택보증금 지원이 가능한 주택을 찾았다. 집을 찾기 위해 김장기가 내건 조건은 “노들에서 먼 데는 안돼”였다. 유리빌딩에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역에서 보증금 1.6억 원 이내의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은 집의 주인은 김장기를 만난 후 계약을 거부했고, 나가겠다고 한 세입자는 계속 살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도 했다. 무엇보다 권리분석 기준을 충족하는(임차보증금의 보장을 위하여 공시지가 대비 임차보증금 비율은 일정 기준 이하여야 함) 집을 찾기 어려웠다. 지원되는 보증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빌라는 공시지가가 낮았고 공시지가가 높은 아파트에는 그 금액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영희네부동산’은 부지런히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주었다. 지원 기한이 다가오면서 권리분석에서 탈락할 시간적 여유가 없자 ‘영희네부동산’은 종로구청 사회복지과 및 담당 법무사와 권리분석을 직접 논의하였다. 전세주택보증금 지원 기한이 일주일 남았을 때, 유리빌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집을 임차 계약하기 위해 김장기와 함께 집주인을 만났다. 계약을 확정하고 계약금을 송금했다. 십분 뒤, 집주인은 주택 코디네이터에게 전화해 계약 취소 의사를 밝혔다. 집주인과 한참을 통화했고, 김장기는 예정대로 이사하기로 했다.
산책하고 있어요
김장기는 오전 6시에 일어났다. TV를 켜고 샤워를 한 뒤, 옷을 입고 침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전 8시가 되었다. TV를 끄고 불을 끄고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동숭동을 한 바퀴 산책하며 돌고 있는데 코디네이터가 보였다. “코디쌤 어디가?”라고 김장기가 물었다. "장기님네요. 장기님은 어디가요?" 코디네이터가 대답했다. "으응 나 지금 산책하고 있어요". 김장기의 집에 스카치 테이프가 없어서 사기로 했다. 애먼 데로 가려는 코디네이터를 김장기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안내했다. 동숭동에 편의점이 어디 어디 있는지 김장기는 알고 있다. 코디네이터가 스카치 테이프를 집어 김장기에게 1500원이라고 하자 김장기는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편의점을 나와 김장기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김장기가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는 날이다. 벌써 김장기의 마음이 두근거린다.(사진: 산책중에 운동하는 김장기)
자립 축하 여행(11월 13일, 변산)에서 이야기한 김장기의 자립 소감
나도 이사 나와가지고 좋아요. 이제 아파트로 가고 싶어. 깡통 모아서 돈 벌고 싶어요.
빨래 개는 거 혼자서 다 해. 문도 번호 이렇게 해서 혼자서 잘 열어.
나는 이제 김밥 같은 거 잘 만들어. 김 놓고, 밥 높고 김치랑 계란이랑 당근 넣어서.
B도 돈 많이 벌어서 이사 가.
내 집 안에 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내 집 안에 있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2015년, 제가 독립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너는 엄마 아빠가 싫어서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로 저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왔습니다. 부모님을 좋아했지만, 한밤중에 야식을 먹어도, 밤을 새워 드라마를 봐도,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장기 님은 지금 집에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방음이 잘 되지 않아서 장기 님이 아침에 노래를 부른다고 집주인을 통해 이웃집의 항의를 듣는 점입니다. 저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고 장기 님께, 집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하였고, 장기 님은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게 하필이면 이번 ‘종로구 동네노래자랑’ 직전이었습니다. 장기 님의 다음 집은 지금보다 방음이 잘돼서 적어도 노래를 흥얼거릴 수는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