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겨울 121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노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으라 / 고병권
[고병권의 비마이너]
노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으라
고병권 /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2019년 노란들판의 꿈. 난생처음 문화제 사회라는 걸 맡았다. 예정된 순서대로 출연자들 소개만 하면 되겠거니 하고 수락했는데 정말로 진땀 뺐다. 그나마 정숙 누님이 함께 진행을 맡아주었고, 연출자가 틈틈이 도움말 쪽지를 건네줘서 큰 사고 없이 넘길 수 있었다. 무대 장치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어떻게든 채워야 하는 10분의 짧은 시간, 평소 같으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을 메우는 데도 얼마나 큰 재능이 필요한지를 실감했다.
사회를 보면서 조금 흥미로운 시각 체험을 했다. 내가 누군가를 소개하면 그에게는 조명이 비춰졌다. 그리고 나면 그는 환하게 빛났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눈앞의 마이크도 빛났고 악기도 빛났으며 심지어는 플라스틱 의자까지도 빛났다. 모두가 조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평소에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음에도 조명 속에서 그들은 또 달랐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노란들판의 꿈’은 모두가 조명받는 자리라는 것, 무엇보다 ‘노들’이 조명받는 자리라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번 행사 중 특히나 환하게 빛났던 것이 있다. 그것은 ‘탈시설 투쟁 10년’을 기념하는 대담을 하던 중에 나왔다. 이 대담은 2009년 본격적인 탈시설 투쟁의 봉화를 올렸던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탈시설 투쟁의 각오를 다지는 자리였다. 대담이 열린 ‘이곳’은 십 년 전 여덟 명의 장애인이 농성장을 차린 ‘그곳’이기도 해서 감동이 더 했다. ‘마로니에 8인’ 중 한 사람인 동림 형에게 왜 여기 농성장을 차렸느냐고 묻자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여기에 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까지 잘 알고 있던 곳이 낯선 곳으로 돌변했다고 할까. 도대체 노들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대담 중에 소개되었지만 올해도 한 사람의 장애인이 노들을 찾아왔다. 자신을 돌보던 어머니가 쓰러진 후 혼자 남겨진 중증발달장애인 문기두 님. 그에 대해 복지 담당 공무원들은 시설 말고는 살 곳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시설 아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 그는 친척의 손을 잡고 노들에 왔다.
십 년 전의 여덟 사람과 십 년 후의 한 사람. 그들은 노들이 있었으므로 노들에 왔다. 둘의 이유는 달랐다. 십 년 전의 사람들은 시설에서 나오려고 했고, 십 년 후의 사람은 시설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둘이 찾는 길은 똑같은 길이었다. 중증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살 수 있는 길이 중증장애인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들이 있었기 때문에 노들에 왔다. 그러나 노들에는 해법이 없다. 노들에는 돈이 없고 권력이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중증장애인 한 사람이 사비로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려면 50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고 하는데, 노들은 단 한 사람의 중증장애인을 건사할 비용도 마련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매번 일어나는 일이 ‘비상사태’고, 매번 만드는 것이 ‘대책위원회’다. 비상! 비상! 십 년 전과 십 년 후가 똑같다. 문제를 든 손님들은 초대 없이 닥쳐오고, 노들은 미리 말려둔 곶감 같은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도대체 노들은 뭐하는 곳인가. 여기 노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6년 전 노들야학 20주년을 축하하는 강연 자리에서 나는 노들의 정체를 물었던 적이 있다. 이 이상한 학교를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 과거 자료들을 읽고 나서 나는 이곳이 단순한 교육단체도 운동단체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굳이 말한다면 이곳은 ‘배움 이전의 배움’, ‘운동 이전의 운동’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배움은 지식의 습득 이전에 일어나는 주체의 각성이고, 여기서의 운동은 이념과 조직 이전에 생겨나는 새로운 삶을 향한 내면의 움직임, 욕망의 깨어남이라고.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노들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아니, 노들은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할까. 그 강연 날에도 덕담 삼아 누군가 노들이 빨리 없어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노들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그리고 장애인 차별을 시정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장애인들이 힘겹게 운동하지 않아도 된다면 노들야학은 없어질 거라고.
좋은 세상이라면 노들이 필요 없다는 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들을 세상이 아프다는 증거로, 일종의 ‘증상’으로 간주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내가 이해한 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이해한 노들은 문제의 장소도, 해법의 장소도 아니었다. 노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 문제가 새롭게 정의되는 장소였다(철학적 표현을 쓰자면 ‘문제’(problème)가 아니라 ‘문제설정’(problématique)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리고 새롭게 정의된 문제를 따라 새로운 주체, 새로운 투사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장애인 개인의 딱한 처지이자 매달 500만 원을 조달하는 문제처럼 보였던 것이, 노들에 오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 문제이며 이 차별을 어떻게 깨나갈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노들이 없는 세상이란 문제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문제제기가 없는 세상인 것이고, 차별받는 장애인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차별을 깨뜨려나갈 장애인 투사가 태어날 공간이 없는 세상인 셈이다. 나는 그때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노들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2019년 ‘노란들판의 꿈’을 진행하면서 나는 무대에서 훨씬 빛나는 것, 내가 알던 것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이 노들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홍은전 선생이 노들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들려줄 때 나타났다. 그는 ‘문기두님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노들 활동가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언니는 일단 밥을 먹어야 해요”라고 답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노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되게 자주했어요. 차별이 없어져서 노들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말을 덕담처럼 했었는데, 나는 그 말이 묘하게 듣기 싫었어요. 좋은 뜻에서 한 말인데, 왜 저 말이 듣기 싫었을까. 그런데 기두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던 것, 세상이 망해도 노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에 누군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노들이 살아남아야 한다. 다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순간,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망하는 그날까지, 아니 세상이 망해도, 누군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것은 노들이다. 이 말이 노들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나는 노들 사람들의 눈에서 툭툭 떨어지는 그것을 보았다. 교육이니 운동이니 각성이니 욕망이니 문제제기니 하는 말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던 그것. 노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들의 뿌리가 향하는 그것. 내가 만난 노들 사람들 모두가 가슴 한편에 최소한 한 컵씩은 가지고 다니는 그것. 그날 무대에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년을 죽어지내던 사람들이 노들에 오면 살아나는 이유가 있었다. 노들은 살 길을 찾는 사람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세상 끝에서 “언니는 일단 밥을 먹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로 끝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