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119호 - 호식형과 함께 했던 노들야학 / 이진희
호식형과 함께 했던 노들야학
이진희
1998년부터 2002년 노들야학에서 활동했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어요.
매해 추모하는 자리를 정성껏 만들어주는 노들야학 고맙습니다. 기억할 수 있는 자리 덕분에 기억하는 마음을 나눌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상대로 박경석 교장선생님은 추모가를 자처하셨습니다.
꽃다지2를 개사하여 탈시설을 노래하였는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이 현재와 이어지는 순간 같았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건, 지금을 사는 나와 세상의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식이형을 기억하여 추모사를 한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2002년 노들야학을 그만둔 후 호식형은 가끔 집회에서 만났습니다. 현재하는 기억은 드문데, 과거의 기억으로 추모를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호식형과 활동을 했던 2001,2년은 노들야학이 조직적으로 치열했고 그만큼 혼란하기도 한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고 나는 장애여성공감으로 활동 터전을 옮기게 됩니다. 그때의 호식형을 기억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와 노들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라서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그래서 추모사를 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거칠었던 시간만큼 기억은 생생하고, 실수와 갈등의 생생한 순간들은 생생하게 몸 안에 남아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호식형과는 노들야학 청솔반 담임과 학생으로 만났습니다. 둘 다 술을 좋아했고, 한 번 마시면 오래 마셨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기억 보단 술 먹고 너스레를 떨며 운동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2001,2년 노들야학 은 장애이동권투쟁을 주도해 가고 있었습니다. 검정고시를 앞두고 집회 일정이 잡히면 야학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어떤 활동에 더 집중해야 하는가? 현장투쟁은 집회파로, 검정고시 공부는 검시파로 불리며 양보없이 토론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시기에 술을 마시면 장애인도 사람이라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운동이, 집회가 중요하다고 지지하며 참여를 약속해주던 호식형이 고마웠습니다. 술 깨면 검시파 누구누구와 더 친한 것 같아 마음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집회는 자주 참여했고, 자신이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도 나에게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호식형은 예술이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셨지만 노들에는 그런 활동을 펼칠 모임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확장된 노들에서 철학도 배우고, 연극 공연, 영상 촬영도 하는 호식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 다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까요.
3년전 호식형이 죽었다는 소식에 급히 참여 했던 추모식이 떠오릅니다. 추모식에는 형이 남긴 한글을 익히던 시절의 노트도 놓여 있었습니다. 15년 전 한글반에서 함께 연습한 한글 노트였습니다. 울며 추모사를 할 때와 다르게 묘한 감정이 일며 그와 겪었던 갈등들이 상세히 기억났습니다.
아련하고 좋은 기억이 아니라 조금은 지겨웠던 매일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과제를 안 해왔을 때, 나와 자기결정권을 두고 다퉜을 때, 수업과 집회 참여를 두고 토론했을 때 등. 기억을 더듬어보니 사이가 안 좋았던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는 평범하게 살았고 그저 궁금한 것을 물었을 테지만, 장애인과의 갈등은 나에겐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간들은 평등한 관계나 함께 산다는 말로는 다 알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장애인과 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물음만 있고 답이 없던 시간. 어쩌면 우리가 채워간 건 한글 노트가 아니라 오답 노트 였을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같이 겪었던 청솔반의 호식형. 형의 오늘을 우리가 볼 순 없지만, 형이 말했던 그 오늘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