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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여기 사람이 있다

 

 

고병권 |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십 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의 고유명이 되었다. 용산참사. 이 네 글자를 보거나 들으면 내게는 자동으로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펄쩍펄쩍 뛰었고, 다시 난간을 손바닥으로 치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주저앉았다. 이제껏 나는 그렇게 슬픈 몸짓을 본 적이 없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본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시민도 아니고, 식당 주인도 아니고, 철거민도 아니고, 시위대도 아닌, 맨손, 맨얼굴 같은 ‘맨사람’ 말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에게는 ‘사람’이라는 원초적 사실 하나만 남는다. 아무런 울타리나 보호막이 없을 때, 소위 인권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맨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망루에서 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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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불이 나기 전부터 거의 맨사람이었다. 이들은 서울에 뉴타운 광풍이 몰아치고 용산역 주변의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면서 길바닥에 나앉은 사람들이다. 그 전에는 맨사람이 아니라 이를테면 호프집 사장님이었지만, 수억 원에 이르는 인테리어비용과 권리금을 날리고 소액의 보상금과 퇴거통지서 하나만을 쥔 순간부터, 겨울날 홑옷만을 입은 존재가 되었다. 건물주와 계약을 맺은 용역 깡패들이 수시로 생명을 위협하고 물건을 부수고 불을 질러댔다. 폭력 신고를 받은 경찰과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관은 상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국가의 보호막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 이제 맨사람이 드러나고 있다는 걸, 철거민도, 용역 깡패도 알았다.

 

망루는 이 홑옷의 시민들이 국가와 동료 시민들에게 마지막 구난 신호를 발신한 곳이다. 용역의 폭력에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국가에 중재와 보호를 요청한 지 딱 25시간. 협상도 없었고 문의도 없었다. 망루에 쏟아진 것은 중재와 보호가 아니라 경찰특공대였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 세입자로서 건물주와 다툼을 벌일 때만 해도, 심지어 용역 깡패들에게 필사적으로 돌멩이와 화염병을 집어던질 때만 해도, 존재를 감싸는 한 겹의 옷은 입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이들을 농성하는 시민이 아닌 도심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순간 그 한 겹의 옷도 벗겨졌다.

 

테러리즘이란 가공할 폭력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장악하려는 이념이다. 요즘은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 같은 무장단체들이 추종하는 이념이지만, 테러리즘은 집권자가 대중에게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반대자들을 마구잡이로 처단하면서 공포를 통해 복종을 끌어냈다.

 

실제로도 테러리즘은 국가가 자행할 때 가장 무섭다. 국가는 무력만큼이나 정당성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폭력은 공권력이며 폭력의 행사는 법 집행의 형식을 취한다. 살상에 대한 책임을 떠안는 것은 그것을 당한 쪽이다.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동료를 죽인 공동정범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테러리즘은 보호자가 공격자로 돌변하는 것이므로 더 끔찍하다. 시민들은 아무런 보호막 없이 폭력에 노출된다. 한마디로 테러를 당했다고 신고할 데가 없는 것이다. 나를 보호할 때는 듬직하지만 나를 공격할 때는 이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남일당 건물 옥상에 있던 사람들이 테러리스트였던가. 그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사회를 장악하려 했던 사람들인가. 철거를 둘러싼 다툼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그들이 망루의 저격병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죽이려고 올라간 사람들이 아니라 살기 위해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대테러부대를 투입했다. 이것은 테러의 진압이 아니라 테러의 과시였음이 명백하다.

 

실제로 나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국가 테러리즘을 기도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복종을 끌어내는 것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2009년은 2008년의 반동이었다. 광우병 시위로 대중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던 정부가 대중에 대한 공포를 대중의 공포로 바꾸기 위해 일종의 무력시위를 한 셈이다. 그러려면 대중의 일부가 시민이 아닌 테러리스트가 되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2009년 1월에는 용산의 철거민들이, 8월에는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이 희생양이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사람을 목격한 사람, 사람이 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그렇게 외쳤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 속에서 사람이라는 원초적 사실로 돌아가 버린 사람. 언젠가 중국 작가 루쉰도 사람으로 돌아간 사람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느님,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루쉰은 여기서 사람을 보았다. “하느님은 그를 버렸고, 결국에 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조차 못 박아 죽였다.”

 

루쉰은 이 글의 제목을 「복수」라고 달았다. 그 이유는 피살자가 살인자에게 남긴 피비린내 때문이다. 루쉰은 ‘신의 아들’을 죽인 것보다 훨씬 지독한 피비린내가 ‘사람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에서는 사람 탄 냄새가 난다. 그렇게 독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정작 살인자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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