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117호 - 애경 이야기 / 김유미
애경 이야기
2019년 달력을 준비하며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인터뷰·정리 김유미
장애경. 1964년에 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부모가 아이를 낫게 하려고 병원부터 무당집까지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으나 낫지 않았다. 뇌병변장애 판정을 받았다. 학교 가는 동생들과 직장에 나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집 안에서 살았다. 어느 명절에 집에 온 친척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혼자 두느니 비슷한 친구들이라도 만날 수 있게 장애인시설에 보내라고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다. 그 뒤로 부모에게 시설에 입소시켜 달라고 졸라,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 남양주에 있는 00원에 가게 된다.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시설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축사를 개조한 공간
에서, 오십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무덤 같은 느낌 속에서 매일이 비슷한 일상을 보냈다. 서른셋에 지금의 남편 탄진을 시설에서 처음 만났다. 시설 원장은 시설 생활인들의 연애와 결혼을 금지했다. 6년 비밀연애를 하고, 남편이 결혼하겠다고 관계를 공식화하자, 둘은 시설원장의 눈엣가시가 됐다. 탄진이 먼저 나가 기반을 마련한 뒤 애경을 데리고 나오기로 약속하고, 먼저 시설을 떠났다. 바깥에서 탄진이 보내준 휴대폰으로 연락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시설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간다.
그날밤 애경은 시설에서 무릎과 엉덩이로 기어나오고,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다. 경찰과 인권활동가의 도움으로 서울 명륜동에 있는 장애인 자립지원 주택인 평원재에 머물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노들야학에 나왔다. 그 뒤로 야학에 다니고 결혼하고 임대주택을 구하고, 그렇게 우리 곁에 살게 되었다. 노들야학 청솔2반 학생이고,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좋아하는 수업이 뭐에요?
음악수업. 북 치고 노래도 배우고. 음악수업을 한 지 7년 됐지. 내가 온 지 한 10년 됐는데 음악반은 그 정도 됐지. 첨에 왔을 땐 그런 게 없었어. 첨에 임영희 하고 준호 하고 둘이 하다가 나중에 2년인가 지나서 나팔 부는 선생님들이 오시고 그랬지. 그때부터 계속 한 거지. 우리가 열심히 해갖고 (공연) 초대돼서 부르면 기분이 좋지. 우리만 하면 재미가 없지. 가끔 한 번씩 나가서 앞에서 부르면 재미가 있지.
노들에 오면 재미가 있다. 사람들 얘기도 많이 듣고, 못 듣는 정보도 많이 듣기도 하고. 노들. 수다 떠는 거. 내가 가끔 가다가 답답한 마음이 있잖아. 그럴 때 내가 소리 꽥꽥 지르잖아. 그런 게 좋아. 또 노들 없으면 안 돼. 노들 없으니까 재미없어. 내가 처음에 올 때, 노들 간다고 해서 노들 뭐하는 곳이냐 했는데, 가보면 안대. 모르고 다니다가 몇 달 동안 다녀보니까 수업도 배우니까 좋고 여기 저기 가서 많이 배우니까 좋지. 내가 시설에서 기어나왔을 때 그때 나오자마자 평원재로 갔거든. 그때는 잠이 안 왔어. 아침에 임소(임소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노들 간다고 해서, 나는 노들 어떤 곳이냐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거기 탄진이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대. 그래서 나는 또 시설인 줄 알았어. 뭐하는 곳이냐고 하니 공부하는 곳이래. 그니까 내가 나오자마자 노들에 와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니까 딱 십년 됐지.
학교 간 적 있어요?
학교 다닌 적은 없어. 그때 내가 몇 살 때야... 기억도 안 나는데. 그때가 열 몇 살 땐가. 한 이년 동안 이 주에 한 번씩 성당에서 사람이 집으로 와서 그때 좀 배웠지. 그때 많이 배웠는데 그 분이 딴 데 가는 바람에... 끝났지. 그때는 글씨... 도화지, 색종이 같은 거 있잖아. 도화지에 색종이 오린 걸로 글씨 써. 내가 그거를 맞춰서 글씨를 쓰는 거지. 그러다가 시설 가서 시설에 있다가 여기 온 거지. 시설 들어간 게, 스물일곱에 들어가서 마흔에 나왔으니까. 시설에서 16년 살았고 지금 나온 지 10년 됐어. 시설 갈 때는 집에 도와줄 사람이 없고. 동생들 다 학교 가고 부모님 직장 가고. 그때는 지금 같은 게 아무것도 없었지. 활동보조 그런 것도 없었어. 명절 때마다 친척들 다 모이니까, 그때 누가 애경이 혼자 집에 두지 말고 거기 보내면 다른 사람이랑 얘기도 하고 좋지 않냐 그러더라고. 그 분이 나한테 얘기한 건 아니고, 엄마랑 얘기할 때 내가 들었지. 그래서 시설에 보내달라고 했지. 근데 그때 또 아버지가 안 보낸다고 해서 또 대판했지. 남양주에 있는 00원에 갔어. 근데 막상 가보니까, 집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시설 가니까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시설에서 나와서 젤 좋았던 거?
내가 나오자마자 옷이 없어가지고. 그때 내가 기어나올 때 만원짜리 딱 네 개 가지고 나왔거든. 나와서 옷이 없어서 옷부터 샀는데. 그때가 기억에 남지. 바지 하고 티, 당장 입을 걸 샀어. 내가 가서 직접 골랐어. 전에는 이렇게 한 적이 없었지. 원장님이 다 해줬으니까.
노들에서 공부하면서 생긴 목표 같은 거 있는지?
목표? 목표는 없고 나는 노들에 이때까지 있을 수 있었던 게, 집에 있으면 답답한데, 어차피 수업이 맨날 있으니까. 집에서 빨리 나오면 열시, 열한시에 나오니까. 나오면 또 동지들 많이 있으니까 같이 얘기하고 수다도 떨고. 무슨 살 거 있으면 쇼핑도 하고. 또 보치아도 하고 하니까. 여기서 거의 다 할 수 있는 거지.
요즘 시설에 가서 친구들이 나올 수 있게 지원하고 있던데, 맞죠?
내가 나온 지 10년 됐고, 시설에서 한 3~4명 나올 사람 있어서 준비하고 있거든. 기분이 좋지. 왜냐면 거기 가보면 감옥인데 여기 나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갈 데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잖아. 근데 거기 있으면 가만히 있어야 하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데 얼마나 답답해. 거기 사는 애들도 집이 해결되면 다음 달 나오고, 그 다음 달 나오고 할 거 같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언니한테 노들은 뭐야?
노들은 나의 방이지. 나의 방... 날만 새면 여기 맨날 오니까. (노들 없으면 어디 갈 거 같아요?) 그건 모르지. 진짜 방학 때 여기 안 오면 이상해. 어쩔 때 집에 있으면 한 달 동안 안 나오면 허전해. 저녁이 되면 뭔가 빠진 기분이야. 할 일 다 했는데, 뭔가 빠진 기분이야. 지겨울 때도 있는데. 몸이 힘들고 그러면 지겹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때뿐이지. 학교 선생님들이랑 내 동지들인데... 매일 봐도 진짜 재밌어.
왜냐면 거기 가보면 감옥인데
여기 나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갈 데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다할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