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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5호_2014.1 - [Wz045_들어가며+12월노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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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5호_2014.1 - [Wz045_노들바람으로 보다] 노들바람에서 만난 그대라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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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5호_2014.1 - [Wz045_나쁜 행복을 말하다] 무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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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5호_2014.1 - [Wz045_비마이너로 보다] 지나갔나 남아있나 장애계 10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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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5호_2014.1 - [후원소식] 12월 후원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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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Wz044_들어가며+11월노들] 이젠 안녕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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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Wz044_노들 영진위] 유엔장애인권리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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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Wz044_노들.노들섬.노들텃밭] 기어가는 농사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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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Wz044_듣는 노들바람] 듣거나 말거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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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Wz044_분열의 추억] 한겨레 21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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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4호_2013.12 - [후원소식] 11월 후원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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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들어가며+10월노들] 늘어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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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노들 20주년 행사 톺아보기] 당신과 함께여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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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노들 영진위] 노들에서 만난 사람과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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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듣는 노들바람] 듣거나 말거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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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타전] 한겨레 21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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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Wz043_나쁜 행복을 말하다] 지금은 살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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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3호_2013.11 - [후원소식] 10월 후원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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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Wz042_들어가며+9월노들] 천천히 즐겁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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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Wz042_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I] 응답하라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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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바람으로 보다
노들바람에서 만난 그대라는 인연
*장애인정보문화누리 김철환
노들 밖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그는 2013년 조그만 책읽기로 노들바람에 등장하였다.
그렇게 한 발 들여놓은 노들인데 이제는 그와 함께 제법 여럿 모인 수화반이 진행되고 있고,
최근엔 한 청각장애인의 노들야학 수업 적응을 돕고 있다.
여기선 2013년 노들바람 봄호에 실렸던 글을 통해 다시 그를 만나본다.
노들장애인야학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길이 먼저 가는 곳이 있다. 복도 한편에 있는 책꽂이다. 번듯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어 볼 때마다 늘 행복하다. 그리고 행복한 마음을 더 누리고자 갈 때마다 책을 꺼내 보거나, 빌려온다. 잡지에서부터 시집, 소설책, 비평집 등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빌려본 책 가운데 기억에 오래 머물고 있는 책은 이준우 교수(강남대)가 쓴 <농인과 수화>이다. 이 책은 농인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심리,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농인을 이야기하고 다루고 있다. 또한 수화와 농인의 관계, 언오로서 수화, 농인의 편의기기, 수화통역사의 윤리 등 농인과 수화, 수화통역에 관련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리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개론서에 가깝다. 수화통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법한 책이다.
이 책의 독특한 면이라면 ‘청각장애’, ‘농아인’이란 용어는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농인’이라는 용어를 과감하게 타이틀로 달고 있는 것이 파격적이다. 이 책이 출간된 해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2004년도이니 더욱 그렇다. ‘농인’이라는 용어는 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 보는 데 능력이 있다는 강점관점의 용어이다. 즉, 듣는 데 어려운 이들의 정체성이 담긴 용어라 해도 무방하다. 당시에는 인쇄매체에 ‘농인’이라는 용어가 거의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책 내용에는 인용된 자료가 많은데, 자료가 오래되는 등의 이유로 지금의 시점에서 인용하기에 부적절한 부분도 없지 않다. 또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이나 장애인의 패러다임 변화 등을 토대로 농인의 현재 모습과 미래를 전달할 수 있는 내용도 빈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론서가 갖는 한계일 수 있다.
어찌되었든, 노들장애인야학에 갈 때마다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행복을 많은 사람들이 같이 느끼면 좋겠다. 그래서 노들장애인야학에 갈 기회가 있는 분들이라면 책을 꼭 빌려보았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한 권의 책이라도 노들장애인야학에 기증하여 장애인들이 책을 읽는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책으로 여는 세상 안동권
출판사 <책으로 여는 세상>에 계시는 안동권님을 만났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자택이자 근무처인 곳에서, 숨쉬기 좋은 공기와 도톰하게 살오른 괴기와 함께 말이다. 이 만남의 결과물로 20주년을 기념하는 책이 하나 나올 수 있었다.
교장샘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동권님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여기선 후원인 인터뷰로 노들바람 여름호에 등장하셨던 그의 이야기를 싣는다.
안: 저희가 먹을 건 다 준비해 둘 테니 몸만 오셔서 많이 먹고 가세요.
밍: 그래도... 저희가 쫌 많이 먹어서 힘드실 텐데요...
안: 괜찮습니다.
밍: 정말 많이 먹을텐데...
그랬다. 정말 많이 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싶을 만큼 양껏 먹었다.
우르르 몰려가서 정말이지 메뚜기 떼처럼 폭풍흡입. 남은 것은 잿더미뿐.
말로는 “이제 그만 주세요.”라고 했지만 막상 눈앞에 접시가 놓였을 때,
그 접시는 이미 빈 접시가 된 지 오래.
먹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함게 놀라는 광경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사진-바로 이것. 대리석 위에서 고기와 대하가 익어간다. 허~ 꿀꺽이렸다.
사진-하지만 그 와중에도 늦게 도착하여 주로 라면을 드셨던 한 분이 계셨더랬다...
사진-반면에 고기도 먹지 못하던 누군가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반려견과 한낮의 댄스를 즐겼다.
“어머. 이걸 언제 다 먹었지? 이제 민망하니까 우리 그만 먹자.”
“우리 너무 잘 먹는다. 왜 이러지?”
그렇다. 우리도 궁금했다. 우리 왜 이렇게 잘 먹는거니? 푸핫.
우리의 결론은 이랬다. “경치가 좋고, 사람이 좋은데 어떻게 안 먹어.”
때때로 비바람이 불어와 파라솔을 움켜쥐어야 했지만 잘. 놀았다.
누구는 쑥 캐러 가고 누구는 자전거를 타고 누군가는 개와 함께 춤을 췄다.
일상의 팍팍함이 봄눈 녹듯 녹아갔다.
하지만 이런 꿀 같은 휴식에 동참하지 못한 이도 있었으니.
그건 바로 교장쌤과 교장쌤 활동보조로 함께한 야학교사 승천.
경미한 접촉사고로 늦게 도착한 이들이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라면과 김치뿐.
그 집에 ‘음식’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은 그것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어찌하리오. 이 또한 운명인 것을.
아차차차! 한가롭게 먹고 노는 사이.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을 잊었다.
난 안동권 님을 인터뷰해야 했었다.
클클. 결국 인터뷰는 서면으로 대체됐고 안동권 님이 보내주신 글이 아래에 있다.
여기서 잠깐. 안동권 님에 대한 소개를 짧게 하자면, 안동권 님은 야학 후원인으로 <노들바람>을 받아 보시다 그 재미에 빠져 <노들바람>을 책으로 엮어 주시기로 한 고마운 님이다.
노들야학의 소중한 친구. 안동권 님 감사합니다.
*소수자라서 행복해요 김조광수
그는? 그 사람은 이젠 많이 알려진 성소수자다.
노들의 20주년 기획사업의 일환인 <명사특강>에 초빙되어 노들에 오셨다.
그렇게 20주년 한 파트를 장식하시더니 같은 해 9월, “어느 멋진 날”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결혼식도 올리셨다.
물론 노들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해 축하하였다.
행복 하나를 얻기 위해 차별의 시선 열 개를 넘어야 하는 장애인의 삶과 참 많이 닮은 그의 삶을 노들바람 가을호에서 만났다.
문간방에 형제가 이사를 왔습니다.
형은 대기업에 다니는 마당쇠 스타일. 동생은 샤프한 스타일 이었어요.
동네 아주머니들은 난리가 난 거예요. “동생이 괜찮아.” “형이 괜찮아.”
인기투표형식으로 그랬죠.
밑반찬 같은 걸 문간방 쪽마루에 항상 갖다 줬어요. 형제는 반찬이 끊이지가 않았죠.
그 혀제 중에 동생이 고마운 마음으로 싼값에 과외를 해준다고 했죠.
대여섯 명 되는 아이들이 그 형제에게 과외를 받았죠. 더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네 달 정도 지났는데 형제가 이사를 갔어요. 우리가 상처를 받았어요.
우리한테 말도 없이 도망을 가서요. 그리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났나?
우연히 어른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호모 어쩌구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알고 보니 그분들이 형제가 아니라 동성애 커플이었던 거예요.
옛날 집이라 방음이 안 되던 시절이었죠.
형제가 조용히 했어야 했는데 밤중에 하다가 친구 엄마한테 들킨 거예요.
아주머니는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딱히 없었고 방에서 소리가 나니까 문을 열어버린거예요.
확, 열고 그날로 쫓겨난 거죠.
그때 처음으로 형제가 왜 아무 말도 못하고 동네를 떠났는지 알게 된 거죠. 나중에 엄마한테 호모가 뭐냐고 물었어요. 엄마가 묻지 말라고 했죠. 혼만 내시는 거예요.
호모가 뭐예요? 입에도 담지마라. 더러운 이야기다. 그 말까지만 해 준거예요. 너무 궁금했어요.
학교에 가서, 선생님 호모가 뭐예요? 하니 선생님이 병이라고 했지요.
누구한테 옮는 거고 옮길 수 있다고 했지요. 전염병처럼 이야기 했어요.
그 형이랑 정말 친했거든요. 그때 든 생각이 나도 옮았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러고 나서 중학생 때 같은 반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때 생각이 나더라구요. 드디어 내가 병에 걸렸구나. 초등학교 때 그 형한테 옮았구나.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물었어요. 호모가 뭐예요? 역시 병이라고 했어요.
여러분들 누가 뭘 물었는데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저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누구한테 정보를 구하겠어요.
선생님이 병이라고 해서 병인가보다, 옮았구나, 너무 고민이 되었어요.
가장 크게 고민스러운 게, 이성애자들이라면 이런 고민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봐 걱정하겠죠.
그런데 저는 내가 왜 이 병에 걸렸을까? 그런데 그 병이 옮는다고 하니까 그게 걱정이었어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병을 옮길까봐. 나만 병에 걸리면 됐지. 이 끔찍한 병이...
그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고칠 수 만 있다면 고쳐야겠다.
더 이상 선생님한테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랑의 전화라고 있었습니다. 전화로 상담하는 거죠.
지금은 학교에 상담교사도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사랑의 전화에 전화하니) 여자 분이 받으시더라구요.
제가 같은 반 아이를 사랑하는 거 같다. 병이냐고 물으니 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칠 수가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하느냐니까 교회를 나가라고 했어요.
믿기지는 않았어요. 제가 그때 성당을 열심히 나갔거든요.
선생님 저, 주말마다 성당 나가거든요. 베드로예요 했더니, 성당은 안 되고 교회를 나가라!
사람들은 잘 모르면서 혐오하죠. 모르면서 측은하게 생각하죠. 알면 혐오하기 어렵습니다.
저희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너무 놀라시더라구요. 자기도 모르게 했던 혐오스러운 말들에 대해서 기억하더라구요. 주위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알면 자신은 변합니다. 처음엔 자신이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차별적인 언어를 교정해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자기 스스로 내 가족 중에 동성애자가 있다고 커밍아웃하죠. 저의 여섯 식구 더하기 그들의 자녀들... 제 주변을 예로 들면 서른 명이 변화한 거고 그들이 영향을 준 수십 명이 있겠지요.
제가 자신을 긍정하고 ‘동성애자라서 나는 근사해’라고 인정하는 순간 달라진 거죠. 자신이 가진 문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죠. 오늘부터 그런 생각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극복하려고 하지마세요. 자기가 가지는 어떤 문제와 부분을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세요.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봤을 때 극복인 거예요. 극복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성애자의 눈으로 봤을 때 극복인 거지요.
단지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불편할 뿐입니다. 불편한 것과 불행한 것은 다른 겁니다. 그 사람을 바탕으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면 훨씬 더 행복해질 겁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전도사처럼, 내가 그토록 아닌 것 같아 라고 얘기하는 부흥회 사람처럼... 여러분 믿습니까? (웃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요. 제가 이런 말 하면 너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거 아니냐? 라고 해요. 저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려 할 때 분명 사회적 모순을 본다는 거예요. 취직이 안 되는 문제는 사회적인 모순이죠. 하지만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게 되는 거죠.
장애도 마찬가지죠. 장애인이 불편한 것은 사회적 모순 때문이죠.
그런데 그 원인을 나는 장애인이니까. 호모니까 하는 거죠.
내 문제를 정확히 보면, 사회적 모순이 보여요.
자기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보면서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돌리는 거예요.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제가 게이가 아니면 여러분이 안 불러줬겠죠.
고작 5만 2천명 관객이 온 감독을, 저를 왜 부르겠어요.
저는 성소수자라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근사한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노란들판의 꿈 사진전 윤길중
중소기업 사장님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한 이가 노들에 오셨다.
풍경 좋아하던 그이가 언제부터인가 노들의 사람들을 필름에 담기 시작하더니
그렇게 한 컷 두 컷 모인 사진들이 어느날 혜화역 전시장에 걸렸다.
노들야학의 20주년을 축하하는 뜻에서,
노들야학 학생들이 주인공이 된 사진첩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래는 명학행님이 그 윤길중 선생님을 인터뷰하여 노들바람 겨울호에 실었던 글이다.
______길중님, 당신은 누구신가요?
명학: 먼저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중: 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명학: 윤길중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길중: LG화학 7년쯤 다니다가 나와서 창업을 했어요. 파주에서 21년째 중소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죠. 플라스틱을 녹여서 새로운 원료를 만듭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 충전지에 쓰이는 원료를 제조해서 삼성이나 LG에 팔고 있어요.
명학: 노들을 어떻게 알고 후원을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길중: 2004년에 노들을 알았어요. 제가 대구 영신고를 나왔는데 재경동문회 사무총장을 맡았죠. 동문회가 매년 음악회를 해요. 어디서 노들야학 교장선생님이 영신고 출신이라는 애기를 듣고 박경석 선배님한테 전화를 했죠. 음악회에 야학 학생들을 초청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때 후원이능ㄹ 여러 명 약정 맺게 했고, 저도 그때부터 노들과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______길중님, 여기서 뭘 보셨어요?
명학: 노들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요?
길중: 처음 노들에 왔을 대 교실에 온 건 아니었어요. 주차장에서 일일호프를 열었을 때 처음 왔죠. 일일호프 중간에 작은 음악회가 있었는데 제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너무 감동적이었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을 노들에 보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나중에 사진전을 할 건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구요. 처음엔 망설였어요. 제가 사실 텔레비전에 장애인이 나오면 왠지 불편한 감정이 들곤 하던 사람이었어요. 여기 와서 수업하고 생활하는 걸 보면서 인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또 야학 교사들을 보고 와,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구요.
명학: 아까 말씀 중에 일일호프 때 있었던 음악회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 감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거신지 알고 싶습니다.
길중: 리허설 할 때부터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수연 씨 어머님이 우리 딸이 연주할 건데 딸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구요. 참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사진 찍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도 몰랐어요. 박자도 안 맞고 그런 점이 있지만 열심히 하는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음악 중간에 트럼펫 소리가 나는데 그 순간 마침 햇빛이 쫙 비쳤어요. 너무 감동적이었죠. 수연 씨를 위해 따로 만든 악기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기잖아요. 수연 씨를 위해 개별적으로 만든 악기를 보면서 노들은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해주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잘하는 사람들만 앞에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모두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그런 마음들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명학: 아무리 장애가 심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길중: 그런 게 소중한 것이죠.
______길중님, 사진은 언제부터 찍으셨나요?
명학: 어떻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길중: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국문과를 가고 싶었죠. 근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어요. 또 아버지가 워낙 반대도 심했구요. 결국 경영학을 전공해서 대기업에 취업을 했습니다. 직장생활도 하고 나중에 사업도 했지만 예술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죠. 어느 날, 집사람이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사진 강의를 하는 윤광준 작가의 책을 가져왔어요. 그 책을 봤더니 작가가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완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참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있더라구요. 사진보다도 작가의 삶이 인상 깊어서 강좌에 등록했죠. 4개월 후, 여름휴가 때 제주도를 갔어요. 김영갑 갤러리도 둘러보고, 사진집과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암이래요. 수술 날짜 다가오니 초조해지더군요.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죠. 간호사가 수술 준비하는 소리도 무섭고... 내가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는 거구나. 가족도 무슨 소용인가 싶었죠. 내가 여기서 눈 못 뜨면 다 끝인데... 그러고 보니 내 자신을 위해 살아보질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항암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퇴원 후에도 일주일 동안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 대요. 서해안과 남해안, 동해안을 다 돌았어요. 사진이 아니었으면 외로워서 다 돌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 때부터 사진에 빠져 지내고 있습니다.
______길중님, 노들에서 사진 찍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명학: 이번에 노들 20주년 행사의 하나로 사진전을 했는데 어떤 동기로 하게 되었나요?
길중: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노들 20주년의 여러 행사 중에 사진전이 있다고 교장선생님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제가 인물 사진보다 풍경 사진을 주로 찍거든요. 고민 끝에 하기로 하고 방향을 잡았죠.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비장애인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의 모습들을 담고 싶었던 겁니다. 활동보조인이나 교사들과의 관계,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가는 모습, 저상버스 타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런 일상의 모습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처음에 힘들었던 점은 사진을 안 찍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수업에 들어가도 안 찍겠다고 하고, 중간에 나가버리기도 하고... 일단 친해져야겠더라고요. 수업 한 시간 전에 와서 인사 먼저 하고, 말을 걸면서 사진을 찍었죠. 또 장애인들이 사진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사진에 찍힌 자기 모습에 대한 거부감도 있는 거 같고... 그래서 찍은 사진을 프린팅 해 와서 보여줬더니 좋아하더군요. 안 찍겠다던 사람들도 프린팅 해 온 사진을 보고 그제야 찍겠다고 말해요. 한번은 누군가 증명사진이 필요한데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장애인들은 증명사진을 갖기도 어렵다, 사진관들이 다 2층에 있고, 1층에 있어도 턱이 있어 못 가고, 문이 좁아서 휠체어가 못 들어가고... 이런 얘기를 듣고 개인별로 사진을 다 찍고 액자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안 찍겠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다 찍었어요.
명학: 저는 여러 사진 중에서 비 오는 날 우비를 나란히 입고 가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 있죠? 학생회장인 방상연 부부의 모습인데 그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길중: 저도 그 사진 좋아해요. 상연 씨도 그 사진을 줄 수 없냐고 해서 포스터로 나온 사진을 드린다고 했어요. 그 사진 찍은 날이 생각나는데, 비가 왔어요. 수업 마치고 두 분이서 우비를 꺼내더니 입더라구요. 저는 옆에서 누가 우산을 씌워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우비를 입어요. 휠체어까지 다 덮는 우비였는데 전 그런 것도 처음 봤죠. 아, 저거 찍어야겠다 하고 쫓아갔죠. 전 우산도 안 들고 나갔던 것 같아요. 집 앞 골목까지 갔는데 찍기 좋은 장소였어요. 뒤에서 쫓아가면서 찍다가 나중엔 불러 세워서 찍었어요. 사실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앞모습을 찍은 사진보다 뒷모습 나온 사진이 더 좋아요. 상연 씨 옆에 정란 씨가 고개를 살짝 돌린 것도 좋고... 저는 흑백을 좋아해서 흑백으로 작업하는데, 방상연 씨 부부 사진과 영애 씨 사진 두 개는 흑백으로는 표현이 안 돼요. 그래서 칼라로 했어요. 영애 씨 사진은 손목을 찍은 사진이에요. 제가 그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자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던 거예요. 손에 낀 반지, 팔찌, 예쁜 손수건... 휠체어에 드러누워 있지만 여자임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그런 걸 찍고 싶었어요. 영애씨는 원래 사진을 안 찍겠다고 했어요. 몰래 찍었지만 동의를 구해야 하니까 사진을 프린팅 해서 보여줬어요. 그걸 보더니 화 안내고 웃더라구요.
명학: 사진전을 열어주셔서 고맙구요, 앞으로도 노들과 좋은 인연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길중: 네.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