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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시인의 탄생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고병권.jpg

『통증일기』 (박정숙, 끌레마)

 

 

  사람들도 믿지 않고 나도 감추곤 하는 대학 경력 두 가지. 내가 화학과를 졸업했다는 것과 문학 동아리에 있었다는 것(결국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낸다). 감추는 이유는 똑같다. 화학도, 문학도 아는 게 없어서다. 화학은 좀 즉흥적으로 선택한 전공이지만 문학동아리 문을 두드린 건 오랫동안 맺힌 한이 있어서다. 중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문예반은 동아리를 정하지 못한 친구들을 모아 자습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선택했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의 그룹으로 묶었다. 그때 맺힌 한을 풀기 위해 간 곳인데 정작 대학의 문학동아리에 들어가서는 사회과학 책만 읽고 시국토론만 했다. 도무지 문학할 틈이 없는 사람처럼 동아리 방에도 자주 들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시를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좋은 시를 알아보는 눈은 없고 좋아하는 시가 있을 뿐이다. 대학시절 시집을 꽤 모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찌감치 시인의 꿈을 접게 하는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 같은 시인들의 시집도 좋아했지만 내가 정말로 애지중지했던 시집은 따로 있었다. 김해화의 『인부수첩』 같은 경우가 그랬다. 인부수첩이라니, 제목만으로 충분했다. 친구는 이 시집을 두고 문학적으로는(?) 잘 모르겠다고 완곡하게 말했지만, 나는 털보노동자 사진이 박힌 표지부터, 시집 끝줄에 시인이 박아 넣은 ‘주암댐 공사장에서’라는 문구까지 좋아했다. 시인들은 말 하나를 찾기 위해 지옥까지도 간다고 하지만 왠지 ‘주암댐 공사장’ 같은 곳에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시인이 없는 곳에서 탄생한 시인이었던 셈이다(참고로 그는 “나는 시인이기를 거부한다”고 썼다). 

 

  어쩌면 나는 가난을 노래하는 시인보다 그냥 가난한 시인을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난에 대한 노래보다 가난의 노래를, 변호사의 세련된 논변보다 피해자의 떨리는 증언을 더 시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예전 EBS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현할 때도 그랬다. 좋아하는 시 세 편을 소개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내가 김남주, 최승자의 시와 함께, 아니 이들보다 먼저 낭독했던 것은 탈시설장애인 노경수의 시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가 아니라 증언이었다. 탈시설증언대회에서 그는 시설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는 콩나물국이 나온다 / 넓은 대접에 밥을 말아가지고 온다 / 아이들은 그것도 정말 잘 먹는다 / 점심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은 국이 나온다 / 저녁은 콩나물국에 김치를 넣고 거기다 두부를 넣은 국이 나온다 / 거기다 밥을 말아서 아이들에게 먹인다 / 잘 먹는다 / 왜? 배고프니까 / ... 춥고 배고픈 것보다 더 슬픈 건 내가 짐승이 되어가는 기분”

 

  세상에는 시가 넘쳐나는데 시인이 없는 곳들이 있다. 이들의 목소리, 이들의 증언이 시가 되려면 시인과 연줄이 닿거나 문단의 벽을 넘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 이를테면 벽은커녕 문턱도 넘을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퉷’이다. 이럴 땐 별 수 없이,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시인이 스스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지난주 세상은 모르고 우리만 아는 시인이 한 명 탄생했다. 박정숙의 『통증일기』(끌레마). 몇몇 평론가와 문학출판사 쪽을 뚫어보려고 했으나, 나로서는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니, 그들이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별 수 없이 친구들이 돈을 모아 자비출판 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문학카페도 아닌 카페에서 낭독회도 가졌다. 열일곱의 나이에 ‘함께 죽자’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목발 하나에 의지한 채 처음 산을 넘었던 장애인 여성이 육십 대 중반이 되어 자신이 넘어온 산들에 대해 증언하는 시들을 읽었다.

 

  우리에게도 시인이 생겼다. “나는 중증지체 장애인이다. / 그래서 웃는다”(<모른다2>) 이 ‘그래서’를 누가 알까. 평생 가슴을 쳐 멍자국으로 남은 이 접속사를 누가 알까. 그런데 드디어 이 멍자국을 지닌 시인이 태어났다. “오늘을 주물러 내일”로 가고, “누군가 / 병신이라 내친다 한들 / 기어오를 오기”(<다리에게>)를 지닌 시인이 태어났다.

 

  “장애인은 매일매일 눈을 뜨면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로 오늘을 살아간다 세상은 거대한 혐오의 눈으로 다가오기에 호흡마다 기도해야만 살 수 있다 숨결마다 투쟁해야만 살아남는다”(<통증일기>) 아침마다 병사가 되고 호흡마다 기도하며 숨결마다 투쟁해야 했던 시인은 정작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 다만 / 가슴에 강이 흐를 뿐”(<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박정숙은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고 나는 이 시집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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