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120호 - 석암투쟁 10년 기억 기록 석암비대위, 노들, 발바닥 멤버들의 이야기 / 노들 편집위원회
석암투쟁 10년 기억 기록
석암비대위, 노들, 발바닥 멤버들의 이야기
노들 편집위원회
‘2009 임소연’ 임소연에게 이야기를 청하자, 자신이 2009년에 사용한 노트를 들고 왔다. 소연은 매년 다이어리를 만든다. 잃어버릴 것에 대비해 수첩을 주운 자는 반드시 연락해달라는 메모도 써둔다. 소연의 2009년 다이어리에는, 지금으로썬 반가운 사람 이름이 가득했다. 언제 누가 농성장을 지킬지, 활동지원을 누가 할지, 운전자가 누구인지, 손으로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소연의 다이어리가 유물처럼 느껴졌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나고 2019년이 되어, 그 당시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덩치가 크고, 연결된 사람이 많은 일이었다. 저마다 한 일이 많았고, 사건의 연속이었다. 열심히 싸웠고, 새 삶을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여러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질문을 많이 던진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가 길게 길게 이어졌다. 귀중한 이야기이므로, 시간 내어 읽어주시길 바란다.
기획 노들 편집위원회 / 진행, 정리 김유미 / 녹취 조정민 / 편집 오하나 / 도움 박경석 정성현
대담 일시 2019년 8월 7일 오후 4시. 장소 노들야학 교실 5
대담 참가자
조상필 사회적기업 노란들판
조사랑 노들장애인야학
임소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조은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동림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노들장애인야학
정종훈 노들장애인야학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유미 노들장애인야학 (이하 모두 이름으로 표기)
<이야기 순서>
1. 투쟁의 시작, 베데스다 요양원과 탈시설 운동 이야기
2. 당시 소속과 역할, 현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3. 어쩌다 이 일에 연루되었나?
4. 기억에 남는 투쟁 혹은 사건
5. 힘들었던 기억, 왜 그랬을까. 마음에 드는 한 장면.
6. 석암 멤버들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7. 김포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이후의 운동, 이어진 운동
8.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지. 그 투쟁이 나에게 미친 영향
투쟁의 시작
석암 베데스다 요양원과 탈시설 운동 이야기
유미 : 석암 탈시설 투쟁 과정에서 마로니에 공원 투쟁이 노들야학 앞에서 진행되었고, 중요한 운동 사안이었어요. 그때 노들에서도 많은 일을 같이하며 고생하기도 했고. 그래서 석암투쟁을 노들 사람들의 목소리로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투쟁 시작부터 거슬러올라가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이 투쟁의 시작을 언제로 보는 게 좋을까요.
동림 : 싸움의 시작은 2008년도부터일 겁니다. 당시만 해도 장애 수당이 있었어요. 내 친구 하나가 티비 보다가 뉴스에 장애수당이 6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랐다는 걸 알았어요.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모른 척해. 그래서 친구가 보건복지부에 연락해 답변이 왔는데, 본인한테가 아니라 시설 원장한테 온 거야. 그래서 아침에 불려갔어. “왜 이런 걸 보냈냐”고. 그날 아침에 거진 9시가 다 됐는데, 친구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다 “야 너네 내일 아침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니 10명을 사무실로 부르는 거야. 통장을 하나씩 줘서 보니까 일인당 50만원씩 들어가 있었어. 친구가 그때부터 비리를 더 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걸 어디다 알리냐? 발바닥[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 알렸는데, 완전히 007작전이었어. 둘만 알지 아무도 몰랐어. 이 사람이 발바닥에 협조해달라고 한 뒤에 우리한테 찾아온 거야. 그래서 알았다 내가 뭐든지 도와주겠다 했어. 진수형, 용남이형 그때 다 불러 도와주겠다고 해서 시작했어.
지금은 마로니에 8인이라고 하잖아요. 그때는 시설 내부에서 동트는 사람들이 한 40명 정도 됐어. 근데 차츰 한 사람씩 떨어져나갔어. 2009년도 2월에 석암재단 이사장, 당시에 원장하고 마로니에 8인이 회의를 했어요. 족벌체제가 아니라 공익 이사를 세워놓으라고. 처음에 한두 번 만날 때 금방 해줄 것같이 이야기가 잘됐어, 근데 세 번째 만날 때는 그냥 듣고만 있고, 네 번째 만날 때는 회의 시작하려고 할 때 원장이 “나 이거 못해.” 그러는 거야. 그때 비리를 캔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했어. 이게 쉽지만은 않으니까 각오해야 한다, 안 되면 서울시청에 텐트를 깔 거다, 그래도 할래?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한테도 그 얘기를 다 하니 사람들이 “야 이런 시설에 있으면 힘드니까 우리가 전부 나가자” 그렇게 합의를 본 거야. 1년이든 10년이든,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이 다 자기 일이라고 나갔지. 당시 서울시청에 올 때만 해도 30~40명 정도였는데, 우리가 서울시 투쟁할 때 원장이 박**을 꼬신 거야. 원래 간병인이었는데, 원장이 사무국장으로 와달라고 제안을 한 거야. 그 사람 오고 나서 비대위에 진수, 나, 현수 10명 정도 남았지. 서울시청에서 잠자고 들어오고. 그다음부터는 8명이 다 같이 서울시청에 왔다갔다 서울시 출퇴근 투쟁을 했지. 그때 아버님이 젤 힘들었을 거야. 매일 차를 가져와서 우리를 데려다줬으니까.
소연 : 종훈님이 일등공신이지. 새벽부터 가서.
종훈 : 나 힘 안 들었는데? 하하하. 처음 김포 투쟁할 때는 시설비리 투쟁이었고, 나오면서 탈시설로 결의되었지.
소연 : 석암투쟁이 앞으로 전무후무할 거야. 당사자가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해 시설비리 투쟁을 했으니까. 시설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폐쇄적이고 당사자들이 권력을 잡기 어려운 구조인데, 그 힘든 과정에서 스스로 시설비리 척결 투쟁에서 탈시설까지 왔다는 것은, 혁명적 투쟁이라고 봐요. 그때 석암 내부에서 당사자분들은 결의에 찼던 거 같고. 서울시랑 우리가 굉장히 분쟁이 심했어요. 우리는 내부적으로, 운동하는 단체로서 탈시설을 위해 구체적 권리로 뭘 설정하고 지자체에 어떤 요구를 할지 고민했죠. 서울시와 공방하며 탈시설 지원을 하라 요구하고. 그랬더니 서울시에서 바로 치고 나왔어요. 누가 나오려고 그러는 거냐? 도대체 몇 명이냐? 그래서 그건 서울시가 조사해야 할 일이라고 얘기하면서 2007년 말부터 오세훈 서울시장을 쫒아다니면서 나오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 시에 욕구조사를 해달라고 요구했죠. 그렇게 해서 2008년 서울시가 탈시설 욕구조사를 전국 최초로 하게 됐어요. 서울시 거주시설 생활인 3400명 중에서, 나랑 미소가 1000명을 만나서 석암 베데스다 요양원, 시설비리 문제가 있었던 은혜, 문혜 요양원도 다 조사하게 됐어요. 그때 조직한 비장애 활동가들이나 장애 활동가들이 많아요. 이전에 시설 인권침해 조사는 계속했지만 욕구조사는 처음이었어요. 그때 우리가 서울시랑 엄청난 공방을 일으키면서 집어넣은 문항이 있죠. “시설에서 나오고 싶으십니까?”
종훈 : 2007년도에 내가 김포 석암 시설에 처음 들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시설 사무국장, 원장이 시설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얕봤어. 막말하고. 그러다가 투쟁하는 쪽에서 쎄게 나가고, 나도 매일 사무국장, 원장하고 싸우다시피 하면서 드나들었어요. 거기 마당에 가서 세차도 하고, 그러면서 거기 마당도 쓸어주고 별 걸 다했어요.
소연 : 그런 상황에서 당사자분들이 서울시청으로 출퇴근 하면서 투쟁했어요. 한편으로는 노들에서 처음으로 ‘탈시설 학교’를 만들었죠. 그때 담당자가 사랑이었고. 지금 말하면 문해교육이랑 정신교육 같은 운동 교육을 한 거죠. 노들 최초의 낮수업, 그렇게 기록할 수도 있겠어요. 그때 시청에 출퇴근 투쟁하며 공부도 해야 하니까 이름을 ‘탈시설 학교’로 정한 거고. 그 인원의 상당수가 이 학교를 하면서 다지기를 한 거죠. 활동의 결론을 당사자분들이 ‘시설비리가 없어져도 좋은 시설은 없다’라고 정리를 하신 거지.
종훈 : 혼자서는 절대 못 해. 하고 싶어도 옆에서 단체들이 도와주고 해야 하지. 발바닥, 노들이 옆에서 끌어줘서 지금까지 왔지. 난 10년 동안에 이렇게 빨리 좋은 환경이 될 줄 처음엔 생각도 못 했어.
상필 : 발바닥을 어떻게 알았대? 시설에 있으면서.
동림 : 한규선 형이 시설에 있으면서 인터넷을 많이 뒤져 시민단체를 찾은 거야. 007작전같이 시작했어.
소연 : 규선형이 해서 알기도 했고, 그때 노조 통해서 연결된 것도 있었지. 양방향으로.
종훈 : 수연이랑 내가 야학에 다녔잖아요. 그때는 김포 한번 갔다 오면 10만원 들었어. 교장이 10만원씩 줄 테니까 김포를 왔다갔다 해달라고 했어. 나는 통장 보지도 않고 그냥 다녔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났나? 교장이 이제 김포를 그냥 매일 왔다갔다 해달래. 근데 발바닥이 돈이 없으니 한 달 60만원 줄 테니까 해달래. 나는 그렇게 일을 시작했지. 나도 발바닥을 몰랐는데, 그때 임소연 김정하팀을 알게 됐지.
소연 : 탈시설운동을 통한 전환점을 크게 두 가지로 잡는데. 당사자들이 ‘좋은 시설은 없다’고 천명한 것. 상상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결심 같아. 지금은 법으로도 한 달 전에 활동지원을 신청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와서 노숙농성을 할까. 이게 다 싸워서 만든 거지. 그때는 활동지원 받으려면 나와서 3개월씩 걸리고 그랬어. 집도 없지, 활보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데 당사자가 결심을 해줬기 때문에 투쟁이 가능했어요. 그다음 전환점이 탈시설 욕구조사를 한 것이에요. 지금은 당연히 탈시설 뒤에 지원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질문하는데, 그때만 해도 ‘시설을 나오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이 획기적이었어요. 그다음에 ‘이러이러한 지원을 서울시에서 해주면 나가시겠습니까’ 단서를 단 질문을 했고. 이 단서가 ‘시설에서 나올 때 뭐가 필요하십니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거지. 집, 돈, 활동지원… 탈시설 욕구조사를 통해서 이런 수요가 있다는 것을 통계로 받아내고, 2009년 6월 4일 나올 때 당사자 의지와 탈시설 권리로 요구안을 만드는 빅데이터가 되었어요. 나는 아직도 물어보고 싶어요. 무슨 결심으로 나오려고 했을까? 지금과 비교하면, 만 65세 연령 제한된 분이 단식 농성하면서 ‘나 죽을 때까지 활동보조 문제 해결할 거야’ 하고 나온 거랑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동림 : 우리가 비리가 터졌을 때, 나하고 인현이, 진수형, 정용형이 그랬어. 이런 비리가 있는데도 이 시설에서 살 거냐고.
상필 : 그럼 다른 시설로 가시지 왜… (웃음)
동림 : 죽으면 죽고, 나가면 나갔지 이런 시설에서는 살 수 없다고 했지. 그때 김정하가, 2009년 5월에 왔어요. 우리 8명 다 불러놓고, 나갈래? 물었을 때 단 1초도 안 걸렸어요. 죽든 살든 여기서 나가자고, 이런 비리시설에는 못 있는다고. 그래서 6월 4일에 나오게 되었어. 정용형 돌아가셨지만, 그 형도 처음에 참석 안 하려 그러다 진수형이 나가니까 같이 나온 거야.
종훈 : 8명이니깐, 뒤에 휠체어 탄 네 사람을 태웠어. 앞에는 용남이하고 기옥 두 명 타고. 휠체어 밑에 발판을 다 떼고, 앞에서부터 끼어서 네 대가 탔어.
소연 : 우리 그 노랑 붕붕이 차 있잖아. 5227. 그 차 이야기를 꼭 써줘야 해. 아버님이 그 붕붕이 없었으면 이 일도 못 했을 거야. 그 차가 김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폐차시켰지.
종훈 : 그때 2년 동안은 집회가 얼마나 많은지 차에서 자고, 내가 살다시피 했다. 나하고 그 사람들하고 한편이 되어서 서로 정이 들어 더 똘똘 뭉쳤지.
소연 : 그때 활동가들이 너무 바쁜 데다, 석암 멤버들이 서로 엄청 싸우셨어. 그러면 아버님이 그분들을 차에 태워 바람 쐬고 오면서 화해시키고 일을 많이 하셨지. 당사자들이 버티게끔 역할을 잘해주셨지.
어쩌다 이 일에 연루되었나?
당시 소속과 역할. 현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유미 : 자연스럽게 정종훈 활동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가 된 것 같고. 다른 분들은 그때 어떻게 싸움에 결합하게 되었는지?
상필 : 저는 그때 장애인교육연대 소속에 장애인부모연대, 전장연 선전국에서도 일했어요. 마로니에 투쟁이랑 탈시설에 직접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고, 야간 사수 때 한 번씩 갔어요. 기억나는 건 아버님 따라서 운전했던 거. 한꺼번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야 했기 때문에 운전이 필요했죠.
종훈 : 빨리 투쟁 장소를 가야 했기 때문에, 남의 차 빌려서까지 교대로 사람을 나르고 했죠.
상필 : 저는 그때 운전하면서 형님들하고 잡담도, 노래도 많이 한 것 같고 피곤할 만도 한데 그날 농성에서 뭐했는지 이야기하고. 생각해보면 나갈 때 상기돼서 목소리 높고 그랬는데, 들어갈 땐 힘들어서 더 그렇겠지만 표정이 어두웠어. 특히 정용형이 불만이 많았지. 술 얘기 항상 하고. 투쟁가도 많이 불렀고, 트로트도 많이 부르고. 형들 따라서 건물 안에도 가봤어요. 처음엔 노조가 호의적이다 했는데, 직원들이 넘 쌀쌀맞게 대하고 틱틱거려서 기분이 좀 그랬어요. 형들도 투쟁할 때는 큰소리 냈지만 시설에 들어가면 그렇게 안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공장[사회적기업 노란들판]에서 디자이너하고 있습니다.
사랑 : 나는 당시 노들야학 소속. 탈시설 학교 1, 2기가 있는데, 2기 담당이었어요. 은전언니가 하던 역할을 내가 받으며 일하게 됐어요. 야학이 유리빌딩 오기 전에 마로니에 공원에서 천막 치고 농성했잖아요. 그즈음 내가 상근을 결의하며 들어와서, 야학이 망하는 줄 알고 천막을 엄청 열심히 지켰어요. 그러다 여기 공간에 왔는데, 뭔가 허탈했어요. 석암 분들이 오기 전에 저는 야학에 좀 침체기가 왔다고 느꼈어요. 공간도 적응이 안 되고.
현수 : 정립회관에 대한 괜한 향수 같은 게 있었죠. 그 밑의 포장마차도 그립고.
사랑 : 그러다 탈시설 학교를 했는데, 이 분들이 예전 노들야학 학생들보다 더한 거야. 매일 차를 타고 다 와서 다시 차를 타고 짐짝처럼 들어가는 게, 마음 한켠이… 내가 처음 야학에 와 학생들 현실을 봤을 때 그런 느낌. 탈시설 학교 하면서 재밌기도 했지. 어디 놀러도 가고 술도 담그고.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분명해서 만나면 재밌었어. 그러다 소연언니가 이 형들이 마로니에 공원에 나올 거란 얘길 해서 언제 나오냐고 계속 물어봤던 일. 그렇게 처음 나와서 마로니에 공원에다 트럭의 짐을 내리며 짐에다 풍선 달고 했던 날이 기억이 많이 나. 평원재 담당 일도 했고. 지금 저는 고시생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프리웰 이사네요. 프리웰 이사 중에 제가 제일 오래 했더라고요. 임기가 다 끝나가긴 하지만.
소연 : 그때 사랑이가 열정이 넘쳐흘렸어. 당사자들을 만나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여기 자리잡는 데 공을 세운 한 명이지. 우리가 어디로 나올지 이야기할 때, 마로니에 공원을 선택한 건 여기에 노들야학과 노들센터가 있었기 때문이지. 야학, 센터 같은 당사자 공간. 노들이 물적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밤새 일할 수 있는 사무실도 되고. 주거복지사업도 했지. 다른 지역 탈시설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게 모델링하는 사업을 공동모금회에 제안해서 했고 그때 담당자가 미소랑 사랑이었지.
현수 : 저는 노들센터 사무국장이었어요. 지금은 전장연 사무총장 직무대행이고요. 당시 이곳에 야학이랑 센터가 있었고, 그들이 온 거죠. 그때 노들센터 활동보조 관련해서 코디 역할을 지영이 하고, 제가 총괄을 했어요.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면, 상윤이 형 일. 활동보조 신청한 다른 사람들은 등급을 잘 받아 시간도 잘 받았는데, 상윤이 형은 최고 등급이 안 돼 농성 끝날 때까지 시간이 잘 안 나와 그게 가장 속상했어요. 그때 활동보조 배치 역할을 제가 했어요. 그래서 박종필 감독 <시설장애인의 역습>에서 활동보조 관련한 인터뷰도 하고 그랬네요.
유미 : 은별은 언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이 당시에 이런 일이 있다는 건 알았어요?
은별 : 저는 당시 고등학생이라 없었어요. 꽤 오랫동안 몰랐고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포 가면서 사건 개요나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했던 것 같아요. 2012년 노들야학 교사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연 : 김포센터는 석암센터이기도 한데, 그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도 있어요. 2012년이면 이때 갈홍식도 활동했지. 활보를 많이 하고. 활보 하면 할 얘기가 정말 많지. 김진수 180시간, 김동림 180시간, 수첩에 이렇게 써 있어요. 그때는 활동보조 180시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이라.
현수 : 그때 사랑이가 역할을 크게 했지.
사랑 : 내가 활보 시간 많이 받을 수 있게 하는 ‘브로커’ 역할을 했지.(웃음) 활동보조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와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보고 그랬어.
소연 : 또 중요했던 곳이 평원재. 평원재 없으면 안 됐을 거야. 우리가 나와서 싸웠던 것 중 하나가 마로니에 공원에 주소지를 받는 일이었어. 우리나라 서비스가 신청제이고, 개인이 등록된 주소지를 가져야만 신청이 가능한데, 마로니에 공원은 주소지로 인정이 안 돼 서비스 신청도 못 하는 상황이었지. 버티고 버티다가 임시 주소지를 노들에서 평원재로 옮겨 결국 서비스를 받게 됐어. 안 그러면 기초생활 수급이니 활동지원이니 하나도 못 받았을 거야. 이때 전부 다 긴급으로 서비스 받은 거지.
종훈 : 갑자기 호텔로 들어간 거였어.
소연 : 그래도 형님들이 평원재에서 못 자겠다고, 밖에 나와 자겠다고 했지. 그래서 돌아가며 지켰고 또 너무 더우면 들어가 자고 그렇게 나눠서 지냈지.
유미 : 이때 독립진료소도 만들었다.
소연 : 독립진료소 처음 왔을 때, 표가 여기 (수첩에) 다 있어. 누구는 어땠고 건강상태 내용이 있어.
사랑 : 그때 형들이 다 아팠어. 동림이형은 눈이 안 좋았고 수술하고, 성호형도 경기하고 몸이 안 좋았지.
기억에 남는 투쟁 혹은 사건
힘들었던 기억. 마음에 드는 한 장면
유미 : 기억에 남는 이야기. 힘들었던 것도 좋고 맘에 드는 장면도 좋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세요.
현수 : 저는 2008년도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서울시청 앞에서 농성하는데, 그때만 해도 시청 본청이 공사 중이라 광장에서 뭔가 하기가 되게 어려웠어요. 3·26 때 같은데, 시청 광장에 천막을 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어요. 경찰이 막는데도 겨우 깔판을 깔고, 천막을 낮에는 걷고 밤에만 치는 시스템으로 합의를 봤죠. 밤에 우리가 야간 사수를 하고, 새벽이 되면 시청 공무원이 나와 천막을 걷어줘. 한 번은 비가 왔는데 새벽에 천막을 걷었는데 다들 너무 피곤해 비를 맞으면서 비닐을 덮은 채 그냥 잤어요. 그렇게 시청 앞에서 농성했던 게 기억나요. 석암투쟁, 하면 양천구청 투쟁을 빼놓을 수가 없잖아요. 2008년에 장활[장애민중현장활동]을 같이 했는데, 중간 일정으로 양천구청 기자회견에 결합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대규모로 이동하기 어려워서 장콜을 잡았는데, 먼저 간 멤버들이 양천구청 로비로 바로 들어가버린 거예요. 양천구청 경찰들이 난리가 났어요. 원래는 구청 못 들어오게 할 생각이었는데, 학생단이 먼저 들어가버렸으니까. 그리고 2009년 4·20 때 석암 형님들이 삭발했던 게 기억 남는데, 그때 비택 중 하나로 자유로 점거가 있었어요. 왜 그런 기획이 나왔는지 좀 어이가 없었는데, 알아보니까 시설에서 나와서 ‘자유’로 가자, 그래서 자유로로 간 거였죠. 그리고 또 여기 마로니에 공원에 처음 농성을 틀었을 때 일인데. 공원 뒤쪽에서 무료급식을 했어요. 그때 형님들이 저걸로 저녁을 때우면 되겠다 해서 한 끼를 먹었는데, 다시는 안 먹겠다고. 그래서 공원에서 우리가 밥을 해서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동림 : 그날 메뉴가 닭곰탕 같은 거였는데 진수형이 “야, 다시는 여기서 먹지 말자. 차라리 나가서 사먹자” 그랬어. 나 다니는 교회에서 와서 밥을 차려주기도 하고.
상필 : 베데스다에서 나와 마로니에 공원에 둥지 틀려고 할 때 얼마 안 되는 짐이 한켠에 쌓여 있던 게 기억나요. 여덟 명 짐이 트럭 한 대 정도.
종훈 : 진수형은 냉장고가 있었어.
동림 : 시설에 있을 때 진수형이 아침밥으로 찌개 끓여서 밥 먹으라고 여덟 명을 다 불렀어. 고기를 고추장에 재어서 저녁밥에 비벼서 해주고 그랬어. 그때는 나갔다 와서 밥 먹는 게 진짜 꿀맛이었어. 서울시청 차 타고 갔다가 저녁에 오면 사람들은 다 자는데 진수형이 우리 오라 그래서 밥 남은 거 다 같이 먹고 그랬어.
현수 : 농성 투쟁하면서 기억 남는 게 오세훈 시장공관 가는 길에 아스팔트에 누워 있던 거요. 경찰들이 일렬로 쭉 막아가지고 동림형이 앞에 올라가는데 휠체어에서 바닥에 떨어지고 그랬어요. 그날이 1박2일 투쟁이었는데, 낮에는 배정학 동지가 연행되고, 밤에는 내가 연행되었어요. 롯데리아 앞에서 문화제하는데, 그때가 야간 집회를 못할 시기라 경찰이 계속 경고방송 하고 그랬어요. 엠프 옆에 있었는데 경찰들이 확 치고 들어와 본능적으로 발전기를 몸으로 지켰어요. 그랬더니 경찰이 나를 확 들어내 전화 부스 안에 가뒀다가 연행하려는 것을 *형사가 빼줬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근처를 기웃거리다 다시 붙잡혔어요. 그렇게 연행돼서 이틀 다 채우고 나왔어요.
유미 : 나도 혜화로타리에서 1박 2일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날 롯데리아 2층에 올라가 길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찍었는데, 모습이 진짜 이상했어요. 평소 지나다니던 길에 사람들이 침낭 깔고 진짜로 자는 거예요. 집 모양 선전물 같은 것도 있었고, 그날 밤이 기억나요.
동림 : 나는 양천구청 투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야. 구급차가 왔다갔다 해서 뭔가 하니, 박길연 대표가 손가락이 찢어진 거야. 그리고 두 번째 기억 남는 건, 진수형하고 나하고 처음으로 서울시청 앞 계단에서 사람들한테 우리 선전물을 나눠줬던 일. 제일 힘들었던 건, 내가 힘이 쎄지 못해서 경찰들이 우리 비장애인들, 활동지원사들 연행해갔을 때. 그때가 젤 힘들었어.
상필 : 이 얘기는 형이 그때도 여러 번 했죠. <시설장애인의 역습> 영상에서 형이 휠체어에서 내려서 엄청 싸우며 경찰 방패를 막 때리는 게 나오는데, 그 모습이랑 이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오버랩되는 게 있어요. 그때 전단지를 지나가는 사람한테 진짜 열심히 줬어요. 가는 사람들 따라가면서. 형은 그때 선전물 나눠졌던 게 왜 기억이 남는지?
동림 : 그때 내가 시청에서 처음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야, 내가 태어나서 처음 농성하는데,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진수형하고 정용이형하고 아침에 자는 모습 보니깐, 이게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싸워보자, 그런 마음이 들었어.
현수 : 상윤이형도 몸에 전단지 얹어놓고 사람들한테 가져가라 하면서 엄청 노력했던 게 기억나요. 농성장이 마로니에 공원에 있어서 노들야학이랑 센터 상근자들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거 같아요. 사무실 가는 길목이니 한번 들여다보고 인사하고 가야 하나, 일이 바쁘니 빨리 가야 하나 이런 갈등이 있었어요. 노들 사람들은 사무실에 있어도 괜히 마음에 짐을 안고 있는, 그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사랑 : 나는 한 번도 경찰 연행을 당해본 적이 없었는데, 탈시설 투쟁하면서 처음으로 겪어봤어요. 진영언니가 싸울 때 보면 좀 무섭잖아. 엄청 잘 싸우고. 아무튼 그 언니 옆에 있다 괜히 채증돼서 많이 고생했던 게 생각나요.
유미 : 그때 사랑이를 찾으러 형사가 우리집에 찾아왔어요. 사랑이가 당시 주거지가 불분명해서 우리집으로 주소를 해놨는데, 어느 날 집주인 아저씨랑 형사가 같이 문을 두드리면서 ‘조사랑 씨 여기 사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여기 안 산다고 그랬어. 형사가 사진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사랑이가 움직이고 있는 흔들리는 사진을 보여줬어. 혐의도 경찰 폭력 행사 뭐 그런 무서운 내용이었어.
사랑 : 서울시 오세훈 공관 앞에서 형들이 가슴에 ‘오세훈 시장 약속을 지켜라’ 한 글자씩 붙이고 땡볕에 다 누워 있었을 때, 나는 그날 유난히 상연이형이 눈에 보였어. 형이 작은 체구에 손을 못 쓰시고 발로만 다 하는 상태고. 그때는 전동도 아니고 수동휠체어로 누가 끌어줘야 다닐 수 있었는데, 형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서 땀을 엄청나게 흘리고 있는 거야. ‘내가 이렇게 누워서 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는 눈빛으로. 그날 형들의 얼굴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종훈 : 내가 시설을 다니면서 보니깐 중증들이 되게 많거든. 앞으로 중증장애인들을 우선적으로 탈시설하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그때 진수랑 동림이가 불러 시설 안에 가보니까, 우리 수연이 같은 애들이 층층으로 누워 있는 거야. 그 사람들 보고 눈물바람을 했어. 시설에서 선생님들도 한계가 있으니까, 중증들은 나오고 싶어도, 누가 데리고 나와야 나오는 거지. 내가 시설은 ‘누워 있으면 천장을 보고, 옆으로 돌면 산만 보고’ 그런 표현을 했어요. 중증들은 언어 표현이 어렵지, 생각은 다 있는데 시설에 누워 있으니… 중증들은 시설이 없어지던가 해야 나와서 하늘도 쳐다보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나오게 하던지 해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빨리 돼가고 있는 듯해요. 옛날에는 시설 원장이 이름 안 부르고 야! 하거나 욕하거나 그랬는데, 지금은 말도 부드럽고, 누구누구씨 이렇게 불러주죠. 이런 걸 보면 장애인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이 단체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하다고 생각해요.
현수 : 전 또 기억에 남는 게, 형님들이 평원재 들어간 뒤 가족분들을 초청해서 집들이를 한 거예요. 다들 장기간의 투쟁으로 지쳐 있었는데, 모처럼 형님들의 밝은 모습을 봤던 날이었어요.
사랑 : 가끔 그런 생각할 때가 있어요. 평원재 이종각 아저씨가 죽기 마지막 5년을 우리랑 함께한 거. 마지막 5년을 우리랑 함께했던 것이, 아저씨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을까. 아저씨와 사람들의 관계는 집주인, 이사장이기도 하지만. 기옥언니가 명절이라고 찾아가서 양말 두 켤레를 주고,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한 진정한 고마움, 애정이 생겼던 거. 그런 마음이 좋었어요.
상필 : 동림이형이랑 마로니에 8인이 나와서 몸이 엄청 힘들었을 거 아니야? 끝까지 가보자 했지만 힘들어서 포기하고자 했던 적은 없었는지?
동림 : 없어. 나는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다른 사람도 아무도 없어. 나 눈 수술하고 국가인권위원회 갔고 끝날 때도 갔었고. 근데 다들 그래. 그때 어떻게 그렇게 빡세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지금 그때 같이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상필 : 변했네!
동림 : 한 살 두 살 나이가 먹으니까. 그때 생각하면 내가 그때 어떻게 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솔직히 결혼 안 했으면 활동을 더 했을 거예요. 지금도 하고 있지만 예전같이는 못하고 있어요.
석암 멤버들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김포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이후의 운동, 이어진 운동
유미 : ‘석암비대위[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있었잖아요. 활동을 계속하고 있나요?
동림 : 자조모임으로 계속하고 있고 지금은 열댓 명이에요. 김포센터 다니는 사람들이랑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이랑 같이 활동도 하고 같이 놀러도 가고 그래요.
유미 : 그때 분들이 탈시설 이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이후 운동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얘기로 넘어가봅시다. 아까 소연언니가 김포센터는 석암센터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맞습니까?
동림 : 당시는 김포에 센터가 없었어. 장콜도 전전날에 예약을 해야 탈 수가 있었고. 네 사람이 김포에다가 센터를 차리자고 처음엔 다들 말을 안 했는데, 나중에 우리가 나오기 얼마 전에 규선이가 내가 센터 할 테니깐 도와달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어. 처음에 딱 세 사람이 들어갈 공간을 마련했고 그러다 또 이사를 했고.
현수 : 김포센터 만들었을 때 사실 노들에서도 박경석 선생님이 김포센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센터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자리를 못 잡고 약간 무기력한 상태가 나타나다보니 ‘김포센터를 봐라, 저렇게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센터도 만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김포센터가 자리 잡고 성장하고, 야학까지 만들어 진수형님이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게 대단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미 : 지금도 향유의 집이나 김포 쪽 시설분들 탈시설 지원을 김포센터에서 하고 있어요?
은별 : 예전에 용산행복센터랑 센터판이랑 해서 체험홈 사업을 3년 정도 했잖아요. 그때 자립 의사를 밝히신 분들이 많아요. 근데 서울보다 김포에서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2016년도부터 김포 지역 국민임대 아파트를 신청하고 당첨돼서, 시설에서 바로 자립하는 케이스들이 많아요. 제가 알기론 향유의집에서 마로니에 8인을 포함해서 자립한 사람이 30명 정도, 생각보다 많이 나갔고, 지금은 발달장애인분들이랑 와상 호흡기장애인분들이 주로 계세요.
유미 : 김진수 형님은 올해 칠순을 맞았으니 60세에 자립을 한 건가요?
은별 : 그런 거죠. 2009년 60세에 자립을 한 거예요.
사랑 : 저는 형들이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고생했던 것들을 많이 보고 이야기를 많이 듣잖아요. 결혼한 분들도 많고, 진수형처럼 센터를 꾸려 활동하는 분도 계시고. 또 상윤이형은 결과적으로 자기만의 투쟁 끝에 자기 보금자리와 부양의무 문제도 해결해서 수급비를 받고, 다른 야학에서 수업도 듣고 계시고. 여러 아쉬운 면도 많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자기가 투쟁해온 부분들을 해결하고 방황도 하고. 모든 게 해결됐다고 천국은 또 아니잖아. 헛헛한 일상들이 다 있는 거고. 그래서 노들만이, 투쟁만이 대안이고 자기 모든 것이던 삶에서 조금 벗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도 괜찮은 것 같애. 그분들은 자기 역사가 몸 안에 기억으로 있어서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힘들고 괴롭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다 같이 움직이는 힘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누구나 삶에 있어서 쉬어가고 방황하고 그런 감정들에 힘들어서 잠깐 떠나 있는 시간들이 사람들마다 있고, 그런 기억과 역사가 나를 만드는 면이 다 있는 것 같애. 나는 형님들, 소문으로만 가끔 안부 들을 때마다 그 시간 우리가 열심히 해서 다들 잘 살고 있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지.
그 투쟁이 나에게 미친 영향
유미 : 조사랑은 그 투쟁을 같이해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사랑 :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활동하면서 야학교사로서 평원재 담당자로서. 그 안에서 형님들 말고도 다른 시설에서 나오는 분들을 많이 만났고, 주거지원 사업하면서 20명 가까이 자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법인은 어떻게 굴러가고 어떤 비리가 나타날까,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프리웰 이사회도 6년째 경험해보니 이런 것들이 있구나, 생각이 들고. 독립진료소도 형님들 건강 때문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점점 새로운 일들을 해보게 했고,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어. 사람의 삶이 마이너스였다가 새롭게 태어난 듯이 세상에 나와서 변해가는 모습들을 그런 탈시설 경험들을 옆에서 지켜봐서. 옛날에 형님들이 처음 나왔을 때 수많은 활동가들이 하루하루 비벼가면서 그런 힘으로 버텼잖아. 그런 힘을 노들이 가지고 있고. 노들야학 학생들이 시설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교사도 활동가들도 그 이유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걸 테고.
유미 : 아버님은 어떠세요? 이제는 인강원 노들 통학 차를 매일 운전하고 계시는데.
종훈 : 나는 우리 수연이 때문에 이런 일을 하면서 조금 더 장애인들에게 가깝게 갈 수 있었어. 김포에서 동림이랑 차 타고 다니면서 진담 반 농담 반 삼아 ‘장가도 갈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이야기했는데, 장가 간 사람도 있는 것이고. 김포 쪽에서 일할 때 생각하면 꿈에도 생각 못 하게 빨리 좋아진 것 같고. 이게 당사자뿐 아니라 밑에서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좋아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나왔으니까 남아서 연대도 같이하고, 그런 게 좋지 않냐. 근데 지금 보면 옛날보다 장애인 쪽이 해이해진 느낌이 든다. 옛날에는 죽기 살기로 했는데. 울지 않는데 누가 젖을 주냐, 젖을 먹으려면 같이 가서 많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미 : 은별은 현재 김포센터 활동가로서 이번 석암 10주년 보면서 어땠는지?
은별 : 저는 마로니에 8인보다 후발로 나온 사람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동림이형 진수, 정용형 정도. 나머지 사람들은 석암 자조모임할 때 1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났지. 오히려 양천구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왔지, 승배도 그렇고, 인형이 형, 규선이는 따로 나왔고. 이런 사람들이 연어처럼 김포로 다시 돌아와 센터에 모여서 중요한 역할들을 다하고 있고. 진수형은 소장이라는 큰 역할을, 동림형, 규선형은 동료상담가로 이후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 자립 지원을 계속하고. 승배 같은 경우 센터 권익옹호 활동가로 있고. 가평 꽃동네나 신애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김포에 살고 있으면 석암 사람들이 지원해주고. 실제로 선배 역할을 하고 있죠. 근데 최근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에 정용형 장례식 하면서 느낀 건데, 다 나이가 많고, 향유의 집에서 나올 사람들도 나이가 많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로병사가 다 있어야 하는데, 지금 노부터 시작하는 것 같고, 젊은 사람들이 40대이니. 센터의 미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어린이시설인 해맑은 마음터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고, 젊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미래는 그곳이다.
사랑 : 미성년자면서 장애인은 어려운 점이 있어요. 해맑은 마음터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젊은데, 관리자가 사람들을 애 대하듯 하는 느낌이에요. 성인이 되어 성인시설로 가야 할 때 엄청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원장도 원하지 않아서 그곳에 계속 있게 하는 문화가 생긴 거 같아요. 그분들의 탈시설과 자립을 같이 지원해주면 좋겠어요. 그분들이 우선으로 빨리 나와야 한다, 성인이 되기 전에.
동림 : 올해 인권교육 나갈 때 느낀 게 있어요. 처음 인권교육 시작할 때 내 인생은 맨 밑바닥에 있었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투쟁하면서 내가 올라갔다, 투쟁하면서 곡선이 끝에서 이렇게 올라갔다, 지금은 그나마 땅에 떨어지지 않고 위에서 있다. 이것이 투쟁의 결과이고 나한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그리고 인권교육 가면 내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 된다’라는 말을 많이 써먹어요. 차별받지 않고, 이 모든 사회가 장애인에게 맞춰지면 참 좋겠어요.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으니까 어디를 가도 장애인들은 말도 안 들어줘요. 무시하니깐 말 꺼내기도 겁나. 식당이나 어디나 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하고 싶어요.
상필 : 그때 같이했던 게 좋았고. 크게는 엄청난 시도들과 변화가 있던 거잖아요. 그 시간이 지나서 지금의 이런 자리도 만들어지고.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너무 즐겁고 좋았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동림이형이 저 멀리서부터 “야~ 상필아” 하면서 반겨주는 게 좋죠. 사랑이 말처럼 그때 그렇게 빡세게 한 만큼 이제 본인의 행복을 찾아 행복하게 살면 좋겠고, 다른 분들이 잘 안 보이곤 해도 힘들게 살았으니 편안해지면 좋겠어요. 지금의 투쟁은 있는 사람들이 같이 만들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