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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간 존재 선언, 2017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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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위원회 건물 외벽에

쓰인 붉은 글씨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강혜민 | 비마이너에서 일한다. 5년간의 용인 출퇴근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살이 두 달째에 접어들었다. 같이 사는 ㅌㄷㅇ가 벌레 퇴치에 매진하고 있는 걸 옆에서 응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침 수영 두 달 만에 물에 뜨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둔하지만 예민하다.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빨간색 스프레이를 손에 쥐고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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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다’라는 것은 ‘존재’입니다, 존재. 영어로 ‘be동사’죠. 우리는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시설에 갇혀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이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스프레이로 낙서하는 것은 불법행위입니다. 즉시 중단하기 바랍니다.”

그의 말을 경찰이 끊었다. ‘박경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휠체어를 밀어 ‘박경석’ 이름 앞에 다시 섰다. ‘박경석’에 스프레이를 여러 번 덧칠한다. 이름은 더욱 선명해진다.

 

2월 15일, 서대문구 충정로 36 국민연금 충정로사옥 주차장. 사회보장위원회가 있는 건물 외벽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쓰인 한 문장.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 문장 아래 휠체어 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외쳤다.

“나 ○○○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한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한다. 사회보장기본법은 사회보장파괴법이다. 즉각 개정하라!”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장면이 이와 같았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했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 현실에서 이를 재연했다. 영화 속 상황이 ‘나의 오늘’과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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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현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40여 년을 목수로 일해 온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질환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질병 수당을 신청한다. 이를 위해 ‘의료 전문가’와 면담하지만, 전문가는 심장 질환과 관계없는 질문만을 할 뿐이다.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지가 멀쩡하기에’ 근로 적합 판정을 받는다. 그는 질병 수당이 아닌 구직 수당을 신청한다. 구직을 위해 ‘노오력’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 일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고용센터에서 또다시 온갖 모욕을 받은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건물 앞에 선다. 외벽에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질병 수당 항고 날짜를 잡아줄 것을 요구한다.”

기어코 얻은 항고 날, 면담하러 간 건물 화장실에서 그는 쓰러진다. 항고문은 유서가 됐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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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보장위원회 건물 앞,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제 현실이 영화를 재연할 순서다. 사회보장위원회 앞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 30여 명이 모여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했다. 

휠체어 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 1급이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 나는 추경진이고, 나는 황인현이며, 나는 배재현이고, 나는 장애경이며, 나는 김탄진이고, 나는 이규식이며, 나는 최영은이며, 나는 이상우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거지도 아니다. 나는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더는 날 모욕하지 마라.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외쳤다. 나는 김탄진이다, 김탄진이다, 김탄진이다. 장애로 소리가 정확히 발화되지 않아도 그는 분명 외치고 있었다. 그만의 언어로, 그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임을 선언했다.

인간은 이름과 함께 살아간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존재를 호명할 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름이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기 지난 삶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전과 다른 삶의 역사를 짓겠다는 다짐이다.

내가 상대방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그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스스로 부르짖는 것은 내 존재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즉, 이름은 그 존재의 자리다. ‘누구냐’는 물음에 대해 우린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장애인이라고, 장애 1급이라고 답하지 않는다. 버스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나 복지는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무엇’으로 규정할 뿐이다. 장애인으로, 기초수급자로, 장애 1급으로, 장애 2급으로. 내가 ‘무엇’인가에 따라 복지는 주어진다. ‘무엇’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사물’로 규정됨을 뜻한다. 복지 수급자가 되는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 된다. 인간적 삶을 박탈당한다. 그래서 복지는 효율화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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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복지의 적폐 = 사회보장위원회…“사회보장기본법 즉각 개정돼야”

박근혜 정부에서 복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한 기관이 사회보장위원회였다. 사회복지위원회는 사회복지 재원 조달과 전달체계 및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지자체 사회보장사업 협의·조정에 관한 최종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시작은 2015년 4월에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였다. 그 회의에서 3조원 재정 절감을 골자로 한 ‘복지재정 효율화 추진방안’이 발표됐다. 그해 8월,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인 황교안 국무총리는 전국 지자체에서 하는 1496개(약 1조원) 복지사업을 ‘정비 대상’으로 지목한다. 정비는 삭감을 의미했다. 대부분 장애인, 노인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사업이었다.

장애인의 경우, 대표적으로 지자체에서 하는 활동지원서비스가 이에 해당했다. 복지부에서 제공하는 활동지원서비스는 하루 최대 13시간에 불과해 나머지 시간을 지자체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보충적인 추가 복지사업이다. 그러나 사회보장위원회는 지자체 지원이 정부에서 하는 사회복지 사업과 ‘유사·중복’된다며 중단할 것을 지자체에 압박했다.

그렇게 대구, 인천, 광주, 경북, 강원도 등 전국각지에서 추가 지원하던 활동보조서비스가 중단됐다. 하루 24시간 지원을 받던 최중증·독거장애인들의 활동지원 시간이 반토막 났다. 더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으며,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인간답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은 이날 사회보장위원회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선언하고, 요구했다.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한 끼 밥이, 하루 한 달이 너무 급하고 소중하다. 복지 확대는 즉각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하게 이뤄져야 한다”면서 “사회보장위원회가 박근혜 적폐임을 선언하고 싶다.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들에 따르면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탈시설 정책 수립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이 글은 비마이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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