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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피터
고(故) 김호식 1주기를 맞아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몇 년간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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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봄이 온다면, 당신도 와준다면.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고 김호식, 이종각 님 1주기 추모제.

 

 

 

 

내 친구 피터, 그는 목소리가 정말 컸다. 말하는 게 사자후를 토하는 듯했다. 은유 작가는 그를 두고 ‘아이를 낳듯’ 말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온몸을 비틀어 내보내는 말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목소리는 노들야학 첫 수업 때 분위기에 눌려 백기투항 직전에 있던 나를 살려준 지원군이기도 했다. ‘야, 이거 골 때리네!’ 그가 간간이 넣어주던 추임새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환영사였다.


내 친구 피터, 그가 제일 힘들어 한 과목은 한글이었다. 복지관에서 시작해 20년을 배웠다는데 여전히 글 읽는 것이 신통치 않았다. 낱글자는 소리내서 읽을 수 있는데, 단어가 되고 구절이 되면 처음 읽은 글자들이 궁둥이를 슬슬 빼기 시작하고, 문장 끝에 이르면 앞서 읽어둔 단어와 구절들이 다 도망치고 없다고 했다. 지독한 난독증이었다. 그런 그가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듣기 능력 덕분이다. 그는 읽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었다. 귀를 통해 들어온 것들은 신통하게도 기억
에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게 자랐다. 그러니 누군가 소리를 내서 읽어만 준다면 철학책도 거뜬히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친구 피터,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는 좋은 작품을 하나 썼다. ‘국회의원들에게 드리는 보고’라는 글인데 참으로 명문이다.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차용한 것으로 원고지 20장 분량의 짧은 인생담이다. 뒤늦게이 인생담을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빨간 피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이름으로 불러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이미 그 글만큼의 짧은 삶을 마감해버렸다.


내 친구 피터, 그는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건 두 방의 총탄 때문이다. 그 점에서도 카프카의 피터와 같았다. 원숭이 피터는 사냥꾼에게 두 방의 총탄을 맞았는데, 한 방은 얼굴을 스치며 붉은 흉을 남겼고, 다른 한 방은 둔부에 박혀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게 만들었다. 첫 총탄이 ‘빨간 피터’라는 이름을 주었고(사람들이 그 붉은 자국만을 주목했기에), 두 번째 총탄은 그를 절뚝거리며 살아가게 했다.

 

내 친구 피터도 두 방의 총탄으로 ‘장애인’이라는 이름과 ‘절뚝거리는’ 인생을 얻었다. 다만 그는 카프카의 피터와 달리 두 방 모두 가슴에 맞았다고 했다. 장애인인 주제에 성깔까지 못돼먹었다고 한 방 맞았고, 절뚝거리는 주제에 큰 소리로 웃는다고 또 한 방을 맞았다. 가슴이 그렇게 뚫렸으니 술을 마셔도 고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부어댄 모양이다.


내 친구 피터, 그가 총 맞은 후 깨어난 곳도 카프카의 피터처럼 궤짝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그때까지는 궤짝 같은 방구석에만 갇혀 지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후 복지관에도 나가고 했는데 궤짝 크기만 달라졌지, 가두다 풀어주다 하는 식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전하다며 궤짝 같은 곳에 가두었다가, 장애인의날이 되면 올림픽공원에 잠시 풀어놓고, 다시 버스를 태워 복지관에 풀어놓고, 그런 식이었다.


내 친구 피터, 그에게는 출구가 필요했다. 세상을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자유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곡예사처럼 공중그네를 구르고 날아서 상대방의 품에 뛰어드는 그런 기예 같은 자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놈의 ‘함부로’ 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는 몸서리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숱하게 당해온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출구였다. 절박한 사람, 숨 막히는 사람에게는 출구만이 자유의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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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야학 모꼬지에서 준호와 호식

 

 


내 친구 피터, 그는 마침내 야학에서 출구를 찾았다. 공부도 시위도 신통치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술맛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궤짝 같은 집과 복지관에서 나와버렸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게 두려웠지만 마구 ‘개겼다’고 한다. 활동보조인도 없던 때였는데 좀 무모한 탈출이었다. 그러다가 야학수업에서 나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를 만났다. 그는 니체를 읽고는 ‘야, 이거 골 때리네’를 연발했다. 내가 미국에서 지낼 때 야학교사 한 분이 그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딴 건 안 해도 반드시 철학공부는 하고 싶다고 술주정하신다”고.


내 친구 피터, 그는 스스로 공부하며 출구를 찾아갔다. 정부가 거지 취급한다면, 이참에 당당한 거지근성도 발휘해보고 싶다고. 정부를 상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얻어내서, 뭘 좀 하는 장애인이 되어야겠다고. 그리고 예전에는 잘살든 못살든 혼자 살다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고 나서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울린다는 것이 무언지는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뛰고 날고 춤추겠지만 지금은 일어서는 법, 걷는 법부터 배우겠다고. 그는 그걸 동화로 써보고 싶어 했다.


내 친구 피터, 그는 모난 성질을 죽이지 않았고, 술도 계속 마셔댔으며, 무엇보다 꿋꿋했다. 술자리에서 그의 불편해 보이는 몸짓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음식은 흘리면 닦으면 돼. 근데 왜 내가 내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만둬야지 되냐.”


작년 이맘때였다. 내 친구 피터, 그는 가슴의 흉터가 더 이상 저리지는 않은지, 동화는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는지, 어울려 산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그냥 훌쩍 떠나버렸다. 내 친구 피터, 그의 이름은 김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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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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