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봄여름 104호 - 판사님, 난 수업해야 한단 말이에요.

by 노들 posted May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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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난 수업해야 한단 말이에요.
‘사건의 중대함’...빵살이 우여곡절

by 노들야학 승 하


나는 ‘장애해방열사_단’이라는 열사 추모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장애해방열사, 그리고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이다. 때문에 송국현 동지를 비롯해 최근 김주영, 지영, 조성배, 김준혁 동지의 장례식에 함께해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4월 13일 야학 학생이던 송국현 동지가 집에 발생한 화재에 미처 대피하지 못 해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에 4월 14일 우리 야학을 비롯한 100여 명의 동지들이 장애등급심사센터에 항의방문을 하기 위해 국민연금공단에 모였다. 송국현 동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몇 차례 면담을 했었고, 그때마다 등급심사센터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에 동지들은 모두 분노했었다. 등급심사센터는 우리의 항의 방문에 대응해 경찰력을 동원해 우리를 멸시했고, 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분노에 휩싸여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난 이 외에 송국현 동지와 관련된, 세월호와 관련된 집회에서 4건의 특수공무집행방해, 5건의 일반교통방해로 기소가 되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한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마음을 놓고 있던 찰나,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실질심사를 받아야 했다. 하필 작년 11월 28일 이덕인 열사 기일에. 일단 추모제는 치러야하기에 날짜를 미루고 12월 1일 오후 3시에 영장실질심사가 열리는 재판장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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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중대함

재판장에 들어가니 검찰은 “사건의 중대함, 도주의 위험, 재범의 위험” 등의 이유로 나를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구속영장을 보고서 사건의 중대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송국현 동지가 활동보조가 없어 화재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죽었던 이사건은 그들이 나를 구속시킬 이유였던 ‘중대함’보다 훨씬 더 큰 ‘중대함’일 것이다. 20년 넘게 시설에 갇혀 살다가 자유를 얻은 지 고작 6개월. 송국현 동지가 꾸었던 자그마한 꿈들은 6개월 만에 산산이 조각나서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의 중대함과 도주, 재범의 위험으로 인해 구속이 되었다. 구속된 후 유치장에서 이틀을 지내고 12월 2일 구치소로 이송이 되는데, 몇몇 동지들이 힘내라고 남대문서에서 아침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다. 힘내라고, 기죽지 말라는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루 두 번의 꿀 같은 바깥 공기

처음에 구속되었을 땐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하루 한두 번 짧게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는데, 운동할 때 그리고 면회하러 갈 때였다. 나는 행복하게도 매일같이 많은 동지들이 면회를 와 주셔서 매일 두 번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수형번호를 부여하는데, 맨 처음 내 수번은 네 자리의 숫자였다. 교도관이 내 번호를 부르며 면회를 하러 가래서 나갔는데, 내 번호를 아무리 찾아도 전광판에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공안사범이라고 교도소 측에서 수번을 바꿨던 것이다. 나중에는 109번이 내 수번이었는데, 공안사범은 대부분 세 자리의 숫자로 수번이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 몇 번은 내가 면회할 방에 들어갔는데, 5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면회하는 자리에 남은 시간이 보이는데, 이 숫자가 내려갈수록 너무 초조해졌다. 왜 안 들어오냐고 교도관에게 따졌더니 휠체어 동지들이 오셔서 면회하기 좋은 자리로 배치해줬다고 했다. 이렇게 휠체어 동지들이 면회를 올 때마다 나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면회를 할 수 있었고, 면회 오신 한 분 한 분 너무 고마웠다. 10분이지만 그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그것이 안에서 잘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원동력이 되었다. 야학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탄원서를 써주었다고 들었다. “박승하은 제(죄)가 없습니다.”, “박승하를 둘랴(돌려)주세요.”라는 자필 탄원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많은 동지들과 함께 운동한다는 것이 이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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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 동지들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 나는 구치소 안에서 ‘장애인 혼거방’에 있었는데 우리 사동 운동시간에 조덕배* 씨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 유명한 사람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맨 처음엔 반말을 하며 뭐하다 들어왔는지 물어봤다. 짜증을 살짝 섞으면서 노들야학 교사라고 했더니 그 다음에 만날 때부터는 “박 선생님~” 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박 선생 단체에 ‘땅바닥’이라는 단체 있지 않나?”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장대소를 하며 “발바닥이라는 단체에요. 그 단체 알지요. 친해요.” 했다. 나중에 발바닥 동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조덕배 씨 면회라도 한번 가야하는 것 아니냐며 서로 웃곤 했다.


첫 심리 이후 바로 선고 공판 날짜가 잡혔는데, 두 번 다 나는 싹싹 빌고 반성했다. 반성한 결과 나오게 되었는데, 그날 너무 많은 동지들이 함께해주어서 너무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법원에서 출소를 하는데 내 짐이 법원으로 도착하지 않아 아버지와 많은 친구들이 내 옷을 사러 다녔다. 법원 근처에 옷을 살 곳이 없어 결국 난 내 후배 바지와 남방을 입고 나오게 됐고, 그 친구가 집에 가야해서 다른 친구가 우여곡절 끝에 사온 수면바지를 입고 출소를 하게 되었다. 그 꼴이 얼마나 웃겼는지 사진 찍는 사람도 웃고 나도 웃고 다들 웃었다.


노들야학 덕분에 수형생활을 잘 했고, 또 잘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노들야학 덕분에 내가 사는 의미와 내가 투쟁하는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소심 선고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침 그날이 내가 수업 하는 요일이다. 판사님, 날 구속시키지 마요. 난 수업해야 한단 말이에요.



*조덕배 씨는 <꿈에>,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같은 노래를 부른 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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