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책꽂이]
눈물을 나눠 갖자. 우리 모두 유가족이 되자.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금요일엔 돌아오렴』
by 비마이너 금철
이 책을 쓴 작가기록단 중 한 명인 홍은전으로부터 책을 건네받고 펼쳐 든 순간,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섬뜩한 감정이 한 움큼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에 실린 삽화 때문이었다. 만화가 최호철이 그린 이 삽화는 그간 세월호 사건을 알려온 어떤 기사나 영상들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가 A4용지 한 장 크기의 삽화를 통해 전해지면서 나를 순간적으로 내리 눌렀다.
동거차도, 대마도, 삼조도, 관매도, 병풍도. 이들은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좁은 바다를 둘러싸고 있던 섬들의 이름이다. 그림은 헬리콥터를 타고 바다를 내려다 본 상태에서 그린 듯한 구도였다. 섬들 각자는 마을 하나를 구성하기에도 벅차 보일 만큼 작았고, 조금 위쪽으로는 팽목항이 보였으며, 그 위로는 진도체육관, 그리고 또 좁은 해협만 건너면 바로 육지였다.
그렇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월호는 태평양 한 가운데 먼 바다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 곳에서,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종류의 배들이 오갈 법한 그곳에서, 수많은 섬들 한 가운데서 쓰려져 버린 것이다.
그 삽화 한 장 때문에 지난해 수도 없이 마주해야 했던 난센스와 같은 물음들이 숨을 조이듯 다시 차올랐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배가 침몰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배가 침몰하는데 구하러 오지 않는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배가 침몰하는데도 구하러 오지 않는 기가 막힌 사실을 외면하고 ‘전원구조’했다는 뻔뻔스러운 오보를 낸단 말인가? 이런 일이 누가 작정하고 배를 빠뜨린 게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물음들이 대책 없이 쏟아져 나오다가 ‘아, 이제 이런 의문을 가지면 무사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지’하는 생각에 미치자, 물음의 연쇄들은 꼬리를 감추며 질서 없이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쉽게 흩어져버린 물음들을, 아마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마치 한 몸처럼 붙들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식들의 죽음의 이유를 알 길이 없기에. 1년의 시간 동안 그들의 살 속에 아로새겨진 이 물음들을 묻어버린다는 것은 곧 유가족 자신을 묻어버리는 것과 다름 아니기에.
그렇다. (누군가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월호 유가족이 원한 것은 보상금도 특례입학도 아닌 ‘알 권리’였다.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물음의 수신자들은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나 조류독감 같은 것들에 빗대며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으로 답신을 대신했다. 이내 유가족의 ‘물음’은 ‘울음’으로 변해갔고, 그들의 목소리는 눈물 속에 고립되어만 갔다.
그래서 그 고립을 뚫고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그들의 인터뷰를 읽는 일은, 웬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코 망각될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세월호 참사오열과 분노,
좌절과 무력감을 딛고 증언하는 유가족들의 인터뷰집”
책 뒷면 표지에 적힌 이 문장에 담긴 무게가 얼마만큼인지, 솔직히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다. ‘증언’이라는 단어는 저 멀리 일상적인 테러가 벌어지는 제 3세계나, 20세기에 세계를 휩쓴 국가 간 전쟁에 대해서나 어울리는 단어 아니었나? 그런데 증언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나와 너무도 가까운 시공간 안에서 벌어졌다. 무엇으로도 치유되기 힘든, 유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순간들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진 : 세월호 진상규명을 바라는 사람들이 경찰 차벽에 붙인 노란 종이배와 선전물.
소연이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삶의 방향과 감각을 잃었다. 죽으려고 와동중학교 앞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다가 한꺼번에 대여섯 병씩 들이켜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가기를 반복했다. (2학년 3반 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 씨)
“승아를 설득해서 아빠가 같이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다녔어요. 상담을 하면 선생님이 10분, 20분 정도 마인드 컨트롤을 해주는데, 처음에는 이게 치료 순서인가보다 생각했죠. 근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돼도 똑같은 거예요. 우리한테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해주고 괜찮냐고 질문을 던지면 위로가 되나?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 좀 괜찮아지나? 아닌 거예요. 진짜 아닌 거예요. 동생 잃은 아이에게 약물을 주는 게 무슨 치료냐 싶고, 감기 예방접종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드니까 더 가자고 못하겠더라고요.” (2학년 3반 신승희 학생의 어머니 전민주 씨)
이 고통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통을 말할 수도 없는 고통. 어느 부모는 유가족들끼리 모여 맥주 한잔 나누면서 이야기하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새끼를 잃고 히히덕거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사람들이 별로 없는 술집을 찾아다녀야만 한다.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그들은 움츠러들었고,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미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을 보내야만 했다.
“하나님하고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 거지요.”
그러나 유가족들은 이 고통과 방황의 시간마저도 기꺼이 살아내야만 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눈에 뻔히 보이는 모욕도 마다하지 않았다. 2학년 5반 이창현 학생의 아버지 이남석 씨는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는 그를 차갑게 외면하고 붉은 카펫을 밟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 그 이유를 감히 알려고 하지도 말 것을 요구받는 불행 앞에서 어쩌면 포기하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무릎 꿇을지언정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포기한 어떤 지점들을 부모들은 그대로 뛰어넘었다. 부모들은 예단하지도 속단하지도 않으면서 유연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릎도 꿇었다. 고통 앞에 솔직했고 자신들의 바람 앞에 명확했다.” (김순천)
유가족들이 그렇게 살아내야만 하는 이유는 2학년 5반 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 씨의 말처럼 ‘하나님하고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우리 아들이 먼저 천국으로 간 상황에서 하나님하고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 거지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해요? 도대체 저한테 어떻게 하라고 이러세요?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얻어야 해.”
이 숙제가 어찌 그들만의 숙제일 수 있을까. 유가족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과연 이 숙제를 외면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을까. 유가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진상규명이라는 과제를 행동에 옮기면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김순천)이라는 사실을 터득했고, 그것이 이 사회가 잃어버린 영혼을 되돌려 놓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죽은 사람의 남아있는 가족’(유가족, 遺家族)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 사회의 양심과 영혼의 증거로서 ‘유대관계로 결속되어 있는 가족’(유가족, 紐家族)이다. 그 유대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들을 가두던 고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 사실은, 참사를 지켜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모두가 유가족(紐家族)이 되길 요구하고 있다.
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 씨는 국회나 청운동에서 노숙생활 하는 것보다 나중에 뿔뿔이 헤어져 혼자 남게 될까 봐 더 두렵다고 한다. 그가 두려움의 벽에 갇혀 외롭게 쓰러지지 않도록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그의 눈물을 나눠 갖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땅의 모든 유가족(紐家族)이 해야 할 마땅한 인간적 도리이다.
사진 : 세월호 참사 1년을 맞아 유가족들이 삭발하고,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