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웹진 52호 201411_ 이계삼, 노들야학 교사 홍은전을 만나다

by 뉴미 posted Nov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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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4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싸워도 괜찮아요. 무서우면 같이 해요.

 

- 노들장애인야학 20년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를 읽고 난 뒤

저자 홍은전을 만난 한 기록

 

-  이계삼

 

( 이계삼 :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사무국장.)

 

 

홍은전을 만나기까지

 

홍은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정기구독하는 <한겨레21>에서 우연히 그의 칼럼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경험을 했다.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의 글에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노들야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물처럼 넘쳐흘렀고, 그것은 읽는 이를 그 사랑의 강물로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있었다. 문장은 음악처럼 유려했으며, 날카로운 비유와 예시가 읽는 이를 행복하게 했다. 글쓴이의 나이를 궁금하게 만드는 오롯한 사상성은 운동과 교육에 대한 원형질의 가치를 생각하게 했다.

얼마 뒤, 그 홍은전이 노들야학 20년사를 정리한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도서출판 까치수염 펴냄)에 대한 추천사 부탁이 들어왔다. 글을 읽을 시간이 거의 없는 빡빡한 대책위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지만, 나는 그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다. 교정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것은 뛰어난 이야기책이며 장애인야학과 장애인 투쟁의 역사를 속 깊게 갈무리한 역사책이기도 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이 시대의 교육학 교과서로서의 높은 가치를 발견했다.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 교사 홍은전과 김유미, 그리고 노들야학 출신 장애인 활동가 김형호가 당시 행정대집행을 앞두고 있던 밀양송전탑 127번 움막농성장을 방문하여 23일을 지냈다.

그리고, 6.11행정대집행이 지나간 뒤, 노들야학과 같은 공간을 쓰는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서 부탁한 밀양송전탑강의를 핑계로 서울을 찾았을 때 나는 그와 다섯 시간 동안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 글은 홍은전과 그의 책을 통해 얻은 나의 생각을 갈무리한 것이다.

 

비장애인, 교사, 활동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는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비장애인이자 교사, 활동가가 쓴 책이다. 나는 그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었다. 학생들은 홍은전에게 그래봤자 당신은 비장애인이잖아, 배웠잖아, 도망갈 데가 있잖아라고 정직하게 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비장애인 교사이며, 그들은 자신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을 수 없는, 교사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장애인 교사 활동가인 그들은 그들대로 수없는 번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홍은전이 들려준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40대 중증장애 학생이 활동보조서비스가 펑크가 나서 대신 갔는데, 리모컨 작동을 못하는 그분이 텔레비전을 너무 보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체된 뒤라 집에 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그 집을 나온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런 홍은전이 있었고, 야학이 너무 좋아서 아무것도 안 보일 때 야학에 불을 지르겠다는 아버지와 맞서는 홍은전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홍은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교사의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계속 일을 했다. 홍은전이 그의 책에서 교사 천성호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시설에서 나온 유일한 지적 장애여성 K가 있었다. 야학에서 늘 가만히 있지 못했고, 화가 나면 거칠게 굴었다. 당연히 싸움이 났고, 사람들이 그를 피했다. ‘K의 자립은 시기상조가 아니었을까?’ ‘K는 우리와 함께 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닐까?’ 논의 끝에 교사 천성호가 K의 멘토가 되었다. 그는 K의 하루를 함께 하며 그녀의 일상을 관찰한 후 그 하루 속에서 지나간 것들로 K만을 위한 교육을 짰다.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법, 설거지 하는 법, 필요한 것을 부탁하는 법처럼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천성호는 K를 이해하기 위해 관련 단체를 찾아가 경험을 청해 들었고, K의 엄마를 찾기 위해 경찰서와 방송국을 쫓아다녔다. 교사들은 천성호의 태도를 따라 그녀를 대하는 방법을 익혀 나갔다. 그리고, K는 눈에 띄게 변했다. 얼마 뒤 사람들은 그녀의 자립은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노들은 그녀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으며, 고맙게도 ‘K가 찾아온 후에 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헌신이 가능할까, 우리는 절대로 못해! 대부분 이렇게 선을 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완전하며 또한 한없이 나약한 존재들에 불과하지만, 그 일의 성격, 그 공간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 성격과 방향성과 동료성이 빚어낸 일상의 구조가 관건인 것이다. ‘사람 냄새가 진득하니 배어 있고, ‘사랑이 움트며, 재미가 있고, 인생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공간이 갖고 있는 비밀, 그러니까 밀양 송전탑 투쟁이 10년이나 끌 수 있었고, 험악한 행정대집행을 당했으나 연대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주민들이 투쟁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어떤 중요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는 한, 그리고 그 일상이 창조성과 즐거움(홍은전의 표현으로는 재미라고 해 두자)이 있는 한 교육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가난할지라도 지탱할 수 있으며, 억압과 갈등에 노출될지라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나는 오늘날 교육을 위한 기관들이 조금씩 교육적 불가능의 공간으로 변질된 것에는 대단히 복잡한 경제학적 사회학적 근거들이 똬리 틀고 있지만, 주체의 측면에서는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정체성의 질문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한 교사, 배움과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온갖 관료적이고 기능적 근거들로 채워진 학교의 일상, 하나의 섬처럼 존재하는 파탄 난 교사들의 동료성 그 자체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노들의 비밀은 바로 노들의 일상에 있다. ‘당신은 노들처럼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그래서 곧장 나는 할 수 없다고 답하지 말라. 누구나 노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구조를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성장과 일상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노들야학의 교사모집 광고 중에서 (사파티스타 농민 투쟁의 구호를 인용)

 

나는 밀양 송전탑 싸움을 3년간 해오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그것은 내가 교실에서 얼마나 엉터리로 살았는지를, 그동안 내가 써왔던 수많은 글들이, 강의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진실이 실은 얼마나 외눈박이같은 것이었는지를, 혹은 몸뚱이 다리 없이 머리로만 떠다녔던 불구의 존재였는지를 수없이 자문하게 했다. 학교를 그만 두기 전, 20113월 터진 후쿠시마 사태로 핵 관련 책을 읽으며 나는 학교를 그만두면 탈핵 투쟁에 한몫 거들어보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맞닥뜨린 탈핵 투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카오스적 드라마였다. 운동판과 운동의 논리는 수긍하기 어려웠고, 실제 맞부딪쳐 본 핵마피아의 힘은 실로 막강했다. 이 싸움의 승패는 너무 뻔해보였다. 질 줄 알면서도 끝내 싸워야 하는, 비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했다. 나는 현장에서 부대끼는 시간동안 사람은 아름다우면서도 추하고, 덜됐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완전한 사랑 가까이에 가 있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신념은 있다가도 바스러지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도 우연치 않은 계기로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둥글둥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성장이라고 믿게 되었다.

홍은전이 십수년간 노들에서 만난 학생들도, 홍은전 자신도, 노들도, 그리고 장애인투쟁도 이러한 성장의 의미로 꽉 차있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은영이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시설에 보내질 까 두려워하던 광섭은 어느날 이동권 투쟁의 한 복판에서 지하철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버티고 서 있게 되었다. 그들의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홍은전은 이것을 일상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수도승들이 수십년의 면벽 끝에 한번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깨달음으로 일구어낸, 혹은 불길처럼 정신을 휘감은 성령의 기적이 아니라 하루하루 화장실 가는 일에서부터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혹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술자리의 환호작약과 구죽죽한 이야기들, 그 끈질긴 나날들의 연쇄가 이루어진 것임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는 빛나는 기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힘에 대한 믿음이, 그런 일상의 구조를 변혁할 용기가, 그런 일상을 함께 할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중증장애인 J가 이발소 간판을 읽어내기 위해서 몇 명의 교사들의 수업의 릴레이가 필요했다. J에게 이발소 간판은 하나의 느리게 닥쳐오는 우주였다. 다만 교사들은 그의 일상을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며 수발을 들고, 시지프스처럼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한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것은 J의 성장이었지만, 실은 그 느리게 닥쳐오는 우주를 함께 경험한 교사 자신의 성장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J의 해방이었겠으나, 다른 각자의 이유로 이 공간에 함께 했던 교사들 자신의 해방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온갖 스트레스를 흘려보내고, 번다한 손길을 갖추어야하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 도왔고 결국 각자의 해방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운명과의 만남, 평등

 

그러나, 장애에 대한 동정은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다. 강력한 심판관처럼 장애라는 덕목은 야학에 버티고 있다. 현격한 격차를 견뎌내기에는 동정은 너무나 빈약한 감정이다. 그들 장애인들이 야학 이전에 버팅겨야 했던 일상의 삶은 참혹했다. 홍은전은 책에서 시설을 탈출한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짧게 서술한다. 활동보조인이 없을 시절 중증 장애인이 가족에게 무지막지한 인격의 폭력을 경험했을 때,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에게 맘 놓고 울 공간은커녕 얼굴을 돌려 우는 모습을 가릴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홍은전은 그 중증 장애인의 사건을 두고 몸 속에서 독이 차오를 것 같은 밤, 그 무수한 밤이라고 표현했다. 홍은전은 시설에서 탈출한 사람을 도왔던 활동가의 이야기를 옮겨 적고 있다. 한여름 솜바지를 입은 여인의 다리가 바지 속에서 썩고 있었다. X자로 봉쇄된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자신의 똥오줌을 엉망으로 뭉개며 앉아있었고, 침대에 팔다리를 묶인 채 각목으로 얻어맞은 사람은 그날 밤에 죽었다. 한 달에 한 명씩 죽어나갔던 유명한 어느 복지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 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시설을 탈출하고 노들로 온 사람들, 감옥 같은 집을 나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노들에서 평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한 사람의 인격으로 대우받았을 때, 교사들의 수고로 그들이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을 때,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그들은 평등해졌다. 장애는 높아지고, 비장애는 낮아져서 만난 평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각자의 자리에서 벼려온 인간다움으로, 그들 각자의 고유한 인격으로 만난 것이다.

학생을 만나는 일이 좋아서 수업이 없는 날에도 야학엘 올라가고 야간 알바를 마치고 올라가는 교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사랑, 특별한 용기가 아닐 것이리라.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누구나 병신이라고 가까이 하기 싫어하고 귀찮아하고, 휠체어라도 한 시간 밀어주고 나면 얼른 제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의 비장애성을 확인하며 안심해야 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장애인이 가진 고유한 인간다움에 반해 스스로 그 길을 함께 열어주는 반려자가 되는 만남의 비밀, 교육의 비밀이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밀양 송전탑 싸움을 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고 그 길 위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분들을 적잖게 알고 있다. 어느 6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공장에서 일하다 중매로 결혼했으나 실패했다. 상처한 농부와 재혼했고, 이혼전의 딸과 재혼한 남편의 전처 소생의 딸을 키우며 지금껏 거기서 농사지으며 살아왔다. 송전탑 투쟁에 나서면서 시댁 식구들에게, 그들의 친인척들에게 적지 않은 언어폭력과 따돌림을 겪었지만, 마을의 구심으로 지금껏 버텨주었다. 그는 좋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알고,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세상사의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의로움을 갖춘 분이다. 그는 사람이 좋아서이 싸움을 함께 한다고 했다. 그는 행정대집행 때까지 가장 열심히 싸웠다. 그가 송전탑 싸움을 통해 맺게 된 인간관계가 지금껏 그를 이 싸움에 있게 했고, 그의 인생길에서 얻었던 인간에 대한 불신과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나는 그를 만나며 잘 곳 없는 연대자를 자기 집 아랫방에 모시고 군불을 지펴주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어떤 교육적 과정이든 그것이 일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한편의 희생과 헌신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를 두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살았다고 고백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그렇게 평가하는 일체의 언술들은 모두 허위다. 각자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나고, 각자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겪은 끝에 우정으로 맺어진 한, 그 속에서 싹튼 동시대성으로 맺어진 한 그들은 평등한 존재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살아가게 된다. 당연히 투쟁도 함께 하게 된다.

 

살아가다가 어느 날 깨달았다. 아아, 내가 살려고 아차산 골짜기로 스스로 기어올라간 거였구나. 거창한 무엇 아니었고 그저 나를 위한 몸부림이었구나. 술과 야학을 빙자해 나를 쏟아내고 풀어냈구나. 노들은 그런 나를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감싸줬다. 나는 아차산 그 푸른 골짜기와 따사롭고 풍요로웠던 노란 들판에서 치유되고 성장했다. - 노들야학 전 교사 김혜옥의 고백, 224쪽

 

교육과 운동 ; 갈등으로 성장하고, 세상을 바꾸다

 

노숙투쟁을 시작한 지 10일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시청 앞에 가지런히 놓인 꽃들입니다. 밤새 아스팔트 위에 차갑게 놓인 몸뚱어리의 경직을 느끼며 누워서 하늘을 한참 응시합니다. 집에만 있었을 때에는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밖으로 참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나를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밖에 나갔을 때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온몸에 가시처럼 박혔고, 계단이 있어 식당에도 들어가지 못했으며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찾기 위해 30분 이상 비를 맞으며 헤매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우리는 먼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 2006년 3월,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집회에서

장애인 활동가 최진영의 집회 발언, 99쪽

 

노들이 불씨가 되고 밑불이 되어 장애인 투쟁의 큰 불길이 되었다. 노들은 어마무시한 투쟁을 했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를 계기로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시작되었고, 2003년 장애인교육권 투쟁, 2004년 정립회관 민주화투쟁 231일 투쟁, 성람재단 비리 153일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교육지원법,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싸움이 모두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노들야학 출신 장애인과 교사들이 활동가로 일했다. 그리하여 2005교통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법이 제정되었고, 저상버스가 의무화되었으며, 2007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장애인 등의 특수교육법이 제정되었다.

언제든지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투쟁심이 높았던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불씨가 불꽃이 되고, 불길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그러니까 대중이 주체로 성장했던 비밀을 홍은전은 수업일상이라고 정리한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생각해왔다. '교육'을 어떤 식으로든 못박아두는 것이 가장 교조적이고 비교육 혹은 반교육으로 이르는 첩경이라고. 나는 '교육적'이라는 규정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인들은 를 묻는다. 그래서 각자의 규정대로 시란 이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누구는 운율의 음악성을, 또 누구는 이미지를, 혹은 시와 현실의 상호성과 사상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시적인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들'은 공교육 기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노들 스스로도 자신을 투쟁하는 장애인 단체로, 교육은 그것의 수단이거나 보족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교육적이라는 규정, ‘교육적 의미로 보았을 때 노들은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현장인 것이다. 홍은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발 누가 들어와서 노들 이야기를 기록해 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노들은 정말 교육적인 것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해요. 교육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것에 의미 부여를 하고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생들하고 함께 데모하는 것, 학생들하고 온갖 난관을 뚫고 함께 바다에 가는 것, 모든 것들이 다 교육적이었다고 느꼈어요. 학교 다닐 때 교육학 도서가 참 재미없었는데 거기서 하는 말들보다 훨씬 재밌고 의미 깊은 게 노들에 많았다는 거죠.

 

수많은 순종적인 장애인단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십수년 전, 장애인의 자립과 투쟁을 이야기하는 단체는 딱 하나, 노들야학 한 곳 뿐이었다. 1993년에 정립회관에 둥지를 틀었던 노들은 원래 더 큰 장애인조직과 통합될 운명이었으나, 그 시혜를 거절하고 투쟁하는 소수로 남았다. 이곳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도 투쟁하기를 원하고 세상과 부딪쳐야만 했던 수많은 과업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 수업을 하기 위해 골방을 나와야 했고, 그들의 외출은 이동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두 명의 노들 학생이 리프트 사고를 겪었다(이규식 이흥호). 노들은 법정투쟁을 했고, 학교와 만남을 위해 그들이 그동안 유린당했으며 당연하게도 잊고 있었던 권리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무난한 삶을 위해서라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바깥 세상을 살고 싶었다. ‘바깥으로 나가게만 해 준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리움을, 인생은 그렇게 머무르라고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노들야학은 무엇하는 곳인가? 교육하는 곳인가? 운동하는 곳인가? 둘 다를 외면할 수 없다면 어느 곳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이 갈등은 끝없이 이어졌고 지금도 진행중이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학생들과 기능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교사들이 만나 평등한 일상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 평범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이 선택되었으나 교육은 또한 투쟁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애인 투쟁이 불타오를 때 노들은 교육과 운동의 갈등이 극심했다. 그때 가장 많은 교사들이 노들야학을 그만두었다. 야학의 기본 틀인 검정고시 준비와 기초적인 지식수업을 등한시 할 수 없었지만 활동가들이 바깥에서 온갖 농성과 투쟁을 이끌다 야학에 오면 진이 빠져 버렸고, 그 활동에 함께 했던 야학의 학생들은 누군가로부터 겉멋이 들었다는 비난을 들을 만큼 야학 공부보다는 투쟁을 통한 자기실현에 빠져들었다. 운동가를 키우는 것의 중요성과 대중조직으로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입장이 계속 갈등하고, 그런 노들을 보면서 또 누군가는 노들의 정체성이 없다고 타박했다. 홍은전은 나에게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내 생각과 다른 누군가와 핏대 세우면서 싸우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누군가는 또 당신들은 방향이 없어서 싸우고 있다고 하고. 그때 우리가 과연 일치를 볼 수 있었을까, 아득했어요. 서로 경력도 다르고, 상근과 비상근 입장도 다르고, 서로 다른 곳을 만지고 있고. 서로 다른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지만 그게 다 코끼리 다리였다는 거죠. 결국 몸통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다 다른 곳을 봐야 그게 모여 노들이 되는 건데, 서로 본 것만 가지고 싸우는 거였죠. 어디든 비슷할 텐데요, 어쩌면 그게 노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이고, 제도권학교가 아닌 야학이라는 노들의 특성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홍은전이 겸손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운동의 갈등은, 방향이 없다고 타박했던 그 비판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들이 겪었던 갈등은 너무나 교육적이고 건강한 것이었다. 나는 단언컨대 교육은 당연히 교육이 터한 현실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고, 그런 긴장의 형성이 없는 교육은 100%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노들은 그 구조적인 한계가 아니라 실은 운동의 자리로 끌려나오지 않을 수 없는 태생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과 운동의 긴장관계. 오늘날 공교육은 권력이든 제도든 현실과의 긴장은 고사하고 현실이 만들어놓은 압도적인 타성의 길에 자연스럽게 굴종함으로써 건강성을 잃어온 것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고슴도치 같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기역과 니은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근본적인 인생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들은 교육과 운동의 오랜 긴장과 갈등을 통해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었으며, ‘희망을 보여주었다. 홍은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부정의 표지는 자긍심의 표지로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싸우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힘이다. 세상을 멈출 수 있다는 자긍심, 우리 안의 힘. 그들이 그런 힘을 보았다. 다른 삶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들은 수업을 하기 위해 운동이 필요했지만, 운동은 또한 수업을 필요로 했다. 수업은 기역과 니은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인문학으로써 제 안에 있는 맹수를 끄집어내어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만 힘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서, 자기처럼 떨고 있을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 모든 방해물을 뚫고 기어이 만나기 위해그들은 수업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수업을 빙자해서 서로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기도 하고, 지친 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가슴 벅차게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며, 진심으로 미워하고 미움받으며 수없이 도망을 갔지만 그들은 결국 이 곳에 있다. 그들의 수업은 운동으로 이어졌고, 운동이 또한 수업이 되었다. 수업과 운동의 변증법은 끝내 세상을 바꾸는 가치로 남고자 하는 투쟁으로 귀결되었다. 노들의 교장 박경석은 이렇게 썼다.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꿉시다. 노들은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터입니다. 희망을 일구는 실천은 노들이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바꾸는 집단적인 실천과 분리된다면, ‘보다 나은 대안적 세상을 향한 우리의 가치는 사라지고 시혜기능의 껍질로만 남을 것입니다. 가치로 남는다는 것은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입니다. - 46

 

위 문장에서 노들의 자리에 각자의 공간을 대입해 보라. 멋진 실천의 금언이 탄생할 것이다.

 

교육과 무정부 ;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교육

 

열심히 싸우고 나서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계속 싸우는 게 맞는 거구나, 늘 상황은 바뀌고 있고 노들은 계속 지진이 나고 있는 시기라 뭔가로 고정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늘 다른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래서 교육적 의미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을 어떻게 살까,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가 계속 일어나는 과정이 정말 교육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하는 활동 중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게 없었죠. 화장실 하나 가는 것마저도. 저희는 한 학기에 한 번 교사 수련회를 가는데 그때마다 평가서를 써서 자료집을 만들어서 가거든요. 그때 자료집을 보면 모두가 교육학자인 거예요. 기역 니은 하나 가르치는데도 왜 이걸 가르쳐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안 그러면 너무 무의미해지는 거죠. 1년을 가르쳐도 기역 니은이 안 느는 사람을 붙잡고 뭔가를 해야 하니까. - 홍은전의 말

 

그러므로 교육적인 사건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며, 교육자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 적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통제될 수 없으며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중심이 없고, 현격한 격차로 존재하는 집단이든, 아주 촘촘한 동질성의 공간에서든 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중심을 설정하는 것, 강력한 잣대로 통제하는 것, 이런 화학 작용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교육은 100가지 문제에 대해 1~2가지의 답을 강제하는 순간 망한다. 교육은 임기응변이며, 교육의 기술은 이 무정부적 상황의 적재적소에 가장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홍은전은 노들의 너덜너덜한 시간표를 이야기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졌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을 거예요. 살면서 힘든 게 총론이 아니라 디테일이잖아요. 국어를 몇 시간 배울 거냐, 사회를 더 배울 거냐 수학을 더 배울 거냐 하는 것. 그래서 노들의 시간표는 너덜너덜해요. ‘시간표나 걸레냐?’ 하는데(웃음). 우리는 노들스러운 시간표를 예쁘게 짜고 싶었는데, 현실은 보여 주기가 너무 부끄러운 거죠. 마치 분쟁 지역의 지도 같달까. 큰 논리의 충돌로 싸우다가 피곤해지면 급 휴전을 하고, 이상한 시간표가 탄생하는 겁니다. 큰 틀에서 바꾸자고 2년을 논의하다가 막상 학기 앞두고 급하게 결정하고. 계속 이런 식이었어요.

 

장애인 학생들은 모두 달랐다. 그들은 장애라는 공통의 잣대로 묶어내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장애의 양상과 정도, 인성적 특성과 지적 능력 모두가 너무 달랐다. 교육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데모를 하고 싶은 교사와 봉사에만 묶어내고 싶은 교사, 그들의 차이는 무수했다. 그래서 홍은전은 노들의 수업을 이렇게 규정했다.

 

노들이 딛고 선 땅과 노들이 살고 싶은 세상의 사이, 노들이 외치는 구호와 노들이 만드는 일상의 사이, 신임 교사와 교장의 사이, 그리고 막 희망을 갖기 시작한 사람과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의 사이, 그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노 저어 가던 모든 과정이 노들의 수업이 아니었을까.

 

홍은전은 이런 노들의 무정부적인, 그러나 교육적 의미로 꽉 차 있는 일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구성원이 고작 60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학교는 무수한 회의와 행사와 교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들을 대하는 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사이를 잇기 위해 매일 봉고가 돌았고 토요일 저녁마다 교사회의를 했다. 신임교사를 교육했고 도로 위를 기었고 소식지를 만들었다.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고 모꼬지를 떠났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삭발을 했고 공장을 만들었고 단식을 했다. 춤을 추었고 토론을 했고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다. 돈을 벌었고 가족들과 싸웠고 술을 마셨다. 활동보조를 했고 버스를 탔고 천막을 쳤다. 노래를 불렀고 구구단을 외웠고 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1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무한히 변주되었다. 노들의 삶은 일상도 교육도 운동도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중심 없이 정부 없이 하나의 잣대가 기준이 우위에 서지 않고 각자 아슬아슬하게 자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이 비밀이 노들 교육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평균의 삶에 미치지 못하는 평균치의 안정감 따위는 없는 혼란과 변화무쌍함, 제각각 그러나 그들이 공유했던 유일한 가치는 오직 하나, ‘함께 가는 것이었다.

 

양극단의 값을 덜어내고 안정을 추구하거나, 고정불변의 튼튼한 집을 세워 혼란스러움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들판의 다양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삶, 서로 다른 존재들을 끌어안기 위해 근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노들의 수업.

 

공교육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늘 이러한 교육의 무정부성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전면적인 불화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지속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들의 사례를 보편에 대한 한 특수로서, 장애인 교육기관이라서, 그것도 투쟁하는 장애인 야학이라서 가능한 한 개별자로 환원하는 것에 온몸으로 반대하고 싶다. 장애학교니깐 우리와는 달라. 그러나 대체 장애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투쟁하는 제도권 바깥이니깐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야. 제도권 안쪽은 투쟁의 무풍지대이고 제도권 바깥은 이렇게 중심 없이 우왕좌왕, 풍찬노숙, 그런 건가? 노들에서는 일어나야 할 일이 여과 없이 일어나고 있다면, 제도권 안쪽은 일어나야 할 일을 어떻게든 틀어막고, 수많은 장애들을 꽉꽉 눌러 싸놓은 채 눙치며 여긴 안전한 곳, 안정된 곳, 그런 곳이 바로 제도권, 보편의 세계가 아닌가. 이런 무정부적 교육은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노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한 것은 오늘날 교육불가능의 공교육 자신이다. 실패할 것 같으면, 잠시 쉬면서 호흡을 고르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 소통이 불가능하면, 기다려주면 되는 것이다. 수업은 계속되어야 하는, 짜여진 각본으로 굴러가는 드라마가 아니며, 학교는 종착역을 향해 쉼없이 전진해야 하는 기관차가 아니지 않은가.

홍은전을 만난 뒤, 노들야학에서 진행된 비마이너주최 밀양 송전탑 강의 때가 생각난다. 뇌병변인 듯 장애인 한 분이 온 몸을 뒤틀며 5분 가량 질문을 했다. ‘가스 발전 단가가 석탄 발전보다 비싸다고 했는데, 도시가스가 싸고 프로판가스가 더 비싸더라, 도시가스 혜택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많다.’ 맥락도 없고, 졸가리도 헤아리기 어려운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누구 하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고, 이야기를 어쨌든 다 들어주었다. ‘저 양반 또 시작이구나하는 눈빛도 느낄 수 있었지만, 누구도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질문 동안 다수인 야학 교사들과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은 오히려 약간 쉬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그것은 무시도 배제도 아니라 할 이야기를 하도록 배려하면서 잠시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무수히 실패했을 것이고, 불가능성에 부닥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를 딛고서도 일상을 이어나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무수한 반복에 이골이 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홍은전은 그 솔직함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 실패했고 함께 사는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어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이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 192쪽~193쪽

 

교육과 일상 ; 오랜 시간 함께 하다, 재밌게 살다

 

그들은 징그럽게 같이 있다. 점심 무렵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술자리까지.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는 식사, 화장실 용변, 평균보다 훨씬 복잡하고 느린 대화와 소통이 있다. 그 시간을 함께 지내는 것이다. 그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노들의 성공에는 다른 비밀이 없다. 일상을 같이 한다는 것, 지치면 지치는 대로 다투면 다투는 대로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마모하고 소진시키는 나날이면서도 성장하고 자신을 깨뜨려가는 과정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무한반복으로 쌓아올린 두터운 시간의 지층이 이루어 준 것이 아니었을까. 장애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차별받았던 바깥 세계와는 확실히 다른 질의 일상을, 교사들은 기능적인 소모품으로 굴렸다가 끝내 폐기해버리는 바깥 세계와는 다른 질의 일상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속에서 떨어져나가고 배신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듯이 그 속에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본 이들은 결국 그들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또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투쟁하게 된다. 그 속에서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새롭게 조직하면서 그들은 성장했을 것이다. 홍은전은 투쟁하는 장애인 동료 최진영을 보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빼앗긴 자들이 그녀처럼 울지 않는다. 모든 차별받은 사람들이 그녀처럼 싸우지 못한다. 매일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기면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조직하는 인간만이 그녀처럼 살 수 있다. 울분을 터뜨리는 것은 한 두 번이면 족하다. 계속해서 울음을 울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자신의 증언으로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빼앗긴 자, 피해자가 아니라 당당한 주체로서 말이다. - 102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엄숙하기만 했을까. 아니, 그들의 엄숙함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개의 일상을 기율하는 그들의 원리는 재미였을 것이다. 단 하루 노들에서 지냈지만, 어디서든 그들은 잘 웃고, 서로 웃기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일상에는 유머가 있다. 그들이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을 늘이라는 노숙농성을 하면서 라면을 끓여먹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제목이 활동보조서비스 더 있었더-라면이란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살스러운 상장을 만들어주는 학생도 있고, 자신들이 만들어 배포하는 자료집 곳곳에는 장난끼가 넘친다. 홍은전이 처음 노들에 빠져들 때의 비밀은 일단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들은 사람을 조직하기 위해 재미를 발굴하기도 했지만, 엄숙하거나 권위적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웃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에 들린 사람들처럼 재미있게 굴었던 것이다.

 

박경석과 홍은전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휠체어를 탄 백발의 꽁지머리 아저씨, 오늘날 이 나라의 장애인 투쟁을 대표하는 활동가이자 노들야학 교장으로 십수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는 불세출의 활동가 박경석. 성남장애인복지관 총무과장이자 전장협 조직국장이던 시절, ‘도를 지나칠만큼 명랑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박경석은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야학에 자신을 묶은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노들 최초로 무급의 전업 활동가가 되었고, 장애인들의 삶과 투쟁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지금껏 십수년의 풍찬노숙을 이어왔다.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홍은전의 평가로 치자면 멀리 떨어져서 보면 너무 좋은 사람인데, 가까이서 지내면 정말로 미웠던사람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벌이고, 사고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단다. 그는 사적인 시간, 사적인 욕망까지도 장애인운동으로 수렴하는, ‘청춘의 한 마디를 끊어서 야학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길에 야학을 얹어 본그런 사람이었다. 그와의 술자리는 유쾌했다. 웃기려고 무진장 애쓰는 것은 나와 너무 비슷했는데, 성공률은 나보다 더 낮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사람들을 웃기려 들었다. 내가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 쌓여온 주민들의 벌금 걱정을 했더니 그는 걱정하지 말라, 다 된다고, ‘우리도 지금껏 벌금 수억 맞았는데, 다 갚고 삼천삼백만원밖에 안 남았다며 자신이 터득한 비법을 전수해주기도 했다(물론 나도 그걸 결행해볼 참이다). 그날 송전탑 강의를 하면서 밀양 어르신들의 투쟁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휠체어에 앉은 채 청중석에 있던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멋진 책을 저술한 홍은전이 남았다. 그는 경쟁이 체질에 맞지 않았고, 데모하고 술마시고 세미나하던 대학시절을 지나 임용고사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안 돼서 괴롭던 시절 복음처럼 노들을 만났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탁월한 문장을 쓰는 그의 독서편력과 지적 체험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다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뿐이라고 답했다. 학창시절 그는 드러나는 것이 매우 싫었다고 했다. 공부를 잘했으나 아주 뛰어나게 잘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주목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번호가 들어가는 날짜, 그러니까 교사가 9, 19, 29번을 연달아 지명해서 발표를 시키는 날은 학교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했다. 그의 지향은 확실히 무명성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주 강한, 인간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대학 때, 학회 활동 하고 학생회 활동 하고, 3년 동안은 공부란 건 전혀 안 하고 매일 술 마시고 다녔어요. 세미나보단 뒤풀이가 좋아서. 그래서 학기 끝나고 나면 세미나 뭐 했고 기록하는데, 제가 학회장을 하는데,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세미나와 뒤풀이를 모두 기록했어요. 사람만큼 재밌는 게 없었고,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었어요. 저는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기록도 해두거든요. 인상 깊었던 멘트들 다 기록해요.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 나는 이것이 홍은전의 이 놀라운 책을 있게 했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3년의 쉼 없는 일들, 잠시 들어왔다 일을 도운 뒤에 원래 가려 했던 길로 돌아가리라 했으나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송전탑과 탈핵, 주민운동의 최일선에서 나는 조금씩 내 존재가 이전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존재이전에도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교육과 상관없는 일에, 체질에 맞지 않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가끔 떠올라 나를 괴롭히곤 했다. 거친 투쟁과 때로는 인신의 구속과 때로는 인명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던 일에 나는 왜 불려들어온 것일까? 누가 나를 이 길로 부르기는 했던 건가? 내가 들어와서 스스로 내 발등을 내가 찍은 이 일에서 이전의 내 삶과 이후 펼쳐질 다른 삶을 이어줄 알리바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둘은 이어져 있으며 결국 하나일 것이라는, ‘특수가 아닌 보편의 언어로 표현될 형식 논리가 필요했던 나는 내가 겪었던 밀양송전탑 투쟁의 이야기와 여러 대목에서 너무나 유사했던 노들야학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성장과 세상의 변혁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 누구라도, 그리고 불가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오늘날 공교육 안팎에 걸쳐 있는 그 누구라도 노들장애인야학 20년이 일구어낸 이 소중한 기록을 한번쯤은 검토해 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소개하면서 물러가고자 한다. 힐링의 문장이라고 해도 좋을, 그러나 요즘 넘쳐나는 싸구려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교육현장에서든, 무언가 의미를 찾는 일들에서 피로와 권태로 지쳐가는 이들에게든 모두 통용될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을, 아름다운 문장.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싸워도 괜찮아요. 무서우면 같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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