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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농성 2년을 맞아
최옥란 열사를 기억하며
빈곤사회연대 윤영
‘사람이 법을 만드는데 이럴 수 있소’
2012년 여름, 거제 시청 앞에서 독극물을 들이킨 이 씨 할머니의 소식이 전해졌다. 할머니의 유서에는 ‘살아가기 힘든데 기초생활 지원금 지급이 중단된 게 원망스럽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법이 할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였으나 사위의 소득증가로 수급에서 떨어졌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부양의무자가 있을 때에는 부양의무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할머니는 사위에게 부양받을 수 없음을 수차례 읍소했지만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라는 완곡한 거절을 들었을 것이다. 수급에서 탈락한 뒤 혼자 사는 셋방 월세조차 밀렸던 할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생긴 비극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2011년 4월에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권을 받지 못하던 김 씨 할머니는 폐결핵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원을 오가다 거리에서 객사했다. 같은 해 7월, 남해 노인요양시설에서 생활하던 70대 노인과 청주의 70대 노인은 부양의무자의 소득으로 인해 수급 탈락 통보를 받고 자녀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고민하다 투신했다. 2012년 2월엔 양산의 지체장애 남성은 자녀 소득으로 수급 탈락하자 집에 불을 내 자살했고, 9월엔 치매부인의 기초생활수급 탈락을 염려한 서울의 노인이 요양병원에서 투신했다. 11월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수급권조차 없던 할머니와 손주는 촛불로 추위를 녹이다 화재로 사망했다. 2013년 9월, 신장투석 환자였던 부산의 한 아버지는 딸의 취업으로 인한 수급 탈락 통보를 받고 딸에게 병원비를 부담시킬 수 없어 자살했다.
이들은 모두 가족이 있었으나 가족에게 부양받지 못했거나, 부양받고 싶지 않아 했다. 매몰찬 한국의 복지는 이들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했다. 이 씨 할머니는 아침 일찍 거제 시청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시청 앞마당을 빙빙 돌다 모든 직원이 퇴근한 뒤 해질녘이 되어서야 제초제를 들이켰다고 한다. 하루라는 긴 시간 동안 할머니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우리는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등급으로 장애인의 복지를 제한하는 장애등급제, 가족의 책임으로 복지를 떠넘기는 부양의무제는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삶을 억압하는 ‘족쇄’임을 선언하고, 이 두 가지를 없애야만 복지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요구를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으로부터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동맥 세종로 한복판에 외면 받는 장애인, 빈민들의 작은 거처가 생겼다.
2년간 한결같이 광화문 광장 지하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일들이 광화문 역사 안에서는 일어났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로 고통받는 이들이 모여 이를 없애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나의 가족과 친구가 장애인이다, 기초생활수급자다 이야기하며 흔쾌히 서명에 응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왜 폐지되어야 하냐고 묻고 두 시간에 걸친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회사원도 있었고, 오가는 출퇴근길 간식이나 음료수를 전달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이들도 있다. 우리의 요구를 자신이 해결하겠노라 찾아와 플래시 세레를 받고 떠난 정치인도 있었고, 우리를 내쫓으려고 안달하다가 정치인 앞에선 화색을 감추지 않던 광화문 역장의 얼굴도 보았다. 2년의 시간 동안 함께 투쟁하다가 화마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있었고,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기억하며 슬퍼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기도 했고, 명절마다 함께 차례를 지내기도 했다. 명절 아침 홀로 거리를 지나는 외로운 사람들과 기꺼이 명절 밥상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짙은 농도의 2년이 훌쩍 지났다.
광화문에서 2년간 농성을 하며 가장 많이 떠올린 얼굴은 나와는 생전 아무런 면식이 없는 ‘최옥란’이라는 한 사람이었다. 최옥란 열사는 장애인이고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여성이었다. 도시에 사는 빈민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전에는 청계천에서 작은 좌판을 여는 노점상이기도 했다. 2000년 12월, 명동성당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제대로 만들어 달라’며 본인의 한 달 기초생활급여 28만 원을 국무총리에게 반납하고 농성을 했던 최옥란 열사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그녀의 얼굴이 그토록 떠오른 이유는 광화문 농성장에 모여드는 우리가 바로 최옥란들이었기 때문이다.
시행된 지 1년 만에 제도 개정을 요구했던 최옥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이들의 삶을 날카롭게 고발했다. 장애인과 노점상, 빈민, 여성의 삶이 한 사람의 몸에 중첩되어 있을 때 생존은 그 자체로 너무나 버거운 것이다. 낮은 수준의 최저생계비가 옥죄는 일상,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복잡하고 강경한 수급자 자격 요건, 현실과는 동떨어진 수많은 행정 규칙 등 최옥란이 맞닥뜨린 높은 장벽은 10년이 지난 지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생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사회에 나오고 투쟁했던 최옥란은 농성을 마친 다음 해 3월,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수없이 겪어야 했던 좌절이 그녀를 결국 집어삼킨 듯 했다. 2년간의 농성 동안 빼곡히 늘어선 영정사진들을 보며 최옥란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은 왜 이렇게 우리와 가까운가.
흔히 빈곤층을 ‘취약계층’이라고 한다. 광화문 농성장까지 오기 위해 잘 오지 않는 저상버스를 기다리고,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고, 가난한 지갑을 털어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근처 밥값이 너무 비싸 맛있는 가게들을 옆에 두고도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워야 했던 우리는 확실히 취약했다. 광화문 농성장을 알리기 위한 유인물을 만들 때에도 얼마의 돈이 들지 수없이 계산해야 했고,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뻔뻔한 얼굴로 지인들에게 후원을 요청하고 티셔츠를 강매했다. 이런 정성이 모인 농성장이 성과 없이 끝나면 어떡하나, 불안함과 죄책감을 갖는 것마저 스스로의 몫이었다.
취약계층은 선택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거리의 턱 때문에 갈 수 없는 휠체어 타는 장애인이,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돈이 없어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몸이 아파 할 수 없는 환자와 노인을 비롯한 약자들이 취약계층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취약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악법이다.
농성장에서 만났던 한 장애여성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혼 후 아이를 혼자 키우던 장애 남성은 헤어진 부인이 부양의무자라며 분개했다. 경기도에 사는 한 40대 여성은 엄마가 재혼을 했는데, 새아버지 재산 때문에 수급탈락 위기를 겪게 되었다며 새아버지는 부담감 때문에 자신을 피하고, 엄마는 ‘내가 죽어야 한다’며 목 놓아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농성에 들어가기 전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한 장애남성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제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부모님은 평생 모아 마련한 집 한 채까지 팔아서 저를 부양해야 합니까? 저 하나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가난해져야 합니까? 저는 어느 누구의 삶도 억압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경남 거제의 이 씨 할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낡고 작은 셋방에 몸을 누일지언정 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할지언정 누구의 삶도 억압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망에조차 귀 기울여주지 않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가. 부양의무자 기준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가난은 언제나 재난이다.
최옥란은 2001년 12월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돌입하며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비록 지금은 저 혼자 텐트 농성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하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2년간 이어진 광화문 농성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너무 우직한’ 일일 수 있다. 투입 대비 산출을 매 순간 고민해야하는 ‘효율’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서 이렇게 비효율적인 일은 없을지 모른다. 변화를 요구하는 좀 더 혁신적이고 세련된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서명을 요청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이 2년의 시간을 지나며 단단해졌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기적 같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광화문을 채워왔다. 최옥란 열사가 이야기했듯, 그녀와 같은 사람들은 분명 많았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광화문에서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0년 최옥란 열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억압하는 세상을 끝내기 위해 광화문은 앞으로도 그 자리에 굳건히 살아남으며 희망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 글은 2014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농성2주년 분홍배문학상 우수작 커피공방상 수상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