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 추모
시설 수용에 저항한 장애인 故 김진수를 기억하며
조은별
노들야학 동문.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김포장애인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김진수, 직접 그가 정한 별칭은 진돗개. 한 번 물면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2009년 6월 4일, 20년간 살았던 장애인 거주시설을 두고 지역사회에 나왔다. '탈시설'을 물은 채로.
1989년, 39세에 들어왔던 석암재단 베데스다요양원(현 프리웰재단 향유의집)을 59세가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마로니에공원에서 62일간 노숙농성을 하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거주시설의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싸웠다. 김진수를 포함해 8명의 장애인이 시설을 박차고 나왔고 우리는 그들을 마로니에 8인이라고 불렀다. 김진수, 황정용, 주기옥, 김동림, 김용남, 홍성호, 하상윤, 방상연. 마로니에 8인의 투쟁으로,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을 것 같은 한국 땅에서 탈시설 제도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우리만 나와서 살 게 아니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차리고 야학도 하고, 시설에서 못 나오는 사람들을 나오게 하자. 김포에서 장애인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보자."
김진수와 그의 동료들은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이 8명의 자립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베데스다요양원이 위치했던 김포 지역에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김포장애인야학'을 만들었다.
나는 그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모두 나에게 '진수아저씨'라고 소개해줬기 때문에 진수아저씨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김포 지역에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총괄하면서 장애인야학의 교육청 등록을 추진할 활동가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면접을 보러갔다. 진수아저씨는 그 당시 부소장이었고 소장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는 그를 보며 '한 번 같이 해보지 뭐'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2017년 2월 1일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진수아저씨는 2월 17일 총회를 통해 선출되어 3월 1일자로 소장 임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7년 6개월간의 동행이 한순간에 결정되어 시작됐다.
사실 처음에는 그와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진수아저씨는 대범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리고 예민했으며 상처도 잘 받았다. 한 번은 활동지원사업의 운영 방식을 두고 이견과 오해가 있던 상황에서 소장을 그만둔다며 3일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집에 직접 찾아가 설득해 오해를 풀고 그가 그만둔다는 말을 철회하도록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기도 했다. "까짓 것, 한 번 해보지 뭐!"는 그의 유행어였고 덕분에 나는 활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하고싶었던 일들을 맘껏 펼쳐볼 수 있었다. 그의 결단과 포부가 아니었다면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김포장애인야학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단단한 성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탈시설을 어떤 사업보다도 우선한 사업으로 세우고 자립생활체험홈과 주택 외에도 탈시설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김포 지역의 임대 아파트에 입주하면 자립지원을 했다. '솔터마을' 지역에 모여 사는 장애인이 지금도 20명이 넘는다. 지금은 복지부 탈시설시범사업 같은 것이 있어서 지원주택 운영과 비거주형 주거서비스 모델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서비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예산도 없었고 예산의 부재는 업무의 과중으로 몰렸다. 보통 주택 코디네이터 1명이 2명의 장애인을 지원하지만 우리는 많으면 10명의 장애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진돗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이었으니까. 탈시설을 얘기할 때 빛나던 눈을 본 사람은 모두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포장애인야학은 2017년에 바로 교육청에 등록할 수 있었고 2018년부터 지원을 받아 안정적 운영을 할 수 있었다. 등록할 당시 학생 수가 34명이었는데, 지금 78명이 됐다. 입학 상담이 끊이지 않았고 다른 기관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찾아와 야간 수업을 개설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모두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진돗개'의 마음으로 그가 지역사회 활동을 펼친 덕분이다.
그런 그가 조금씩 몸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이틀을 쉬게 되었고 어느 때 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도 못나오게 된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병원도 너무 많이 다녀서 5~6개 과를 다니느라 일주일 내내 병원에 다니기도 했다. 안과, 신장내과, 순환기내과, 소화기내과, 정형외과, 피부과 등 너무 많아서 세기도 어려웠다.
그의 몸이 그렇게 점점 안좋아졌고 올해 5월부터는 신장 투석까지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무감각했다. 몸이 안좋다는 말을 가끔 들을 때는 걱정됐지만 매일 아프면서는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조금 더 불편해졌다고만 생각했다. 6월 척추 재수술을 한다고 했을 때도 2주 후에 만나자는 그의 말에 수술 잘 받고 오라는 말 외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수술의 후유증이 진수아저씨를 결국 집어삼키게 될지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6월 19일에 입원해 척수수술을 받았고, 6월 31일 심근경색이 발생했다. 의사는 척수수술이 출혈이 많은 수술이라 혈전이 생겨 심장을 막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중환자실로 내려갔고 시술 이후 회복해 다시 일반 병실로 올라왔다. 그렇게 퇴원할 수 있을줄 알고 그의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해놓고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퇴원하는 날 특장차로 모시러 오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심근경색 이후 폐렴으로 폐기능이 떨어졌고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나오지 못했다. 향년 75세. 그렇게 나와 7년 6개월을 활동한 진돗개와 이별했다.
진돗개, 진수아저씨, 소장님. 잘 가요. 당신과 함께 했던 이 무모한 활동을 정말 잊지 못할 거에요. 당신이 있었기에 이 무모한 탈시설 투쟁을, 앞뒤 재지 않고 함께 들이받아주는 동지들이 정말 많이 생길 수 있었어요. 고통과 통증없는 세상에서 잘 쉬시기를, 못다한 말은 제가 가는 그 날 만나 나눠요. 그 시간까지 탈시설 운동을 잘 지켜주세요.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안녕.
(2023년 8월 1일, 주기옥 동지가 우리와 소식이 닿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습니다. 마로니에 8인 중 3명이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정용, 주기옥, 김진수 세 동지의 평안한 안식을 바랍니다.)
故 김진수 동지 약력
1950년 7월 21일 출생
1963년 2월 용산초등학교 졸업
2007년 11월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결성
2008년 7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
2009년 3월 제7회 석암재단생활인비상대책위원회 정태수상 수상
2009년 6월 4일 시설퇴소 후 탈시설자립생활정책을 요구하며 62일간 노숙농성
다큐멘터리 『시설장애인의 역습(2009, 박종필감독)』 출연
2012년 7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운영위원 및 동료상담가 활동
2015년 3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부소장
2016년 8월 김포장애인야학 교장
2017년 3월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2017년 3월 사)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이사
2019년 ~ 2023년 2월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2021년 3월 제19회 정태수상 수상
2022년 탈시설장애인당 후보
2022년 3월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
2023년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고문
2019년 6월 4일, ‘석암투쟁 10주년’ 기념 문화제에서 석암투쟁이 만든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진수 소장님. 사진 비마이너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
조은별 국장이 영정을 어루만지며 엉엉 울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