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야학교사 연행되던 날 현장수업 “대추 샘을 석방하라”
창현
일하는 성소수자
11월 20일 노들야학의 상근교사이자 동료인 대추 샘이 연행되었다.
왜 죄가 없는 대추 샘을 연행했지? 우리가 무슨 죄가 있지?
권리를 이야기하고 요구하는 것이 죄인가?
‘박누리 교사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들야학 학생들
‘박누리 교사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들야학 학생, 교사들
나는 아침부터 권리를 요구하고, 이야기한 동료와 같이 있었다.
소식지를 나눠주고 소리통으로 권리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그리고 외쳤다.
나는 20일 당일 발언을 할 예정이었다. 서울교통공사 직원들과 경찰이 난무한 현장에서 발언문을 작성했다. 발언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집회를 다녔는데 발언은 가장 큰 용기를 가지게 된다.
동료의 연행에 난 더 큰 용기를 가지고 발언문을 작성하고, 시청역과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발언했다.
■ 발언문 (출처: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랑’ 11월호) ■
저는 노들야학에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전담인력으로 일하고 있는 창현입니다. 노들야학에서 일한 지는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년 1월 1일이 되면 해고자가 됩니다. 오세훈 시장님 덕분입니다.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2020년 서울시에서 최중증장애인을 우선으로 고용하는 일자리입니다. 노동자들 중에는 최중증장애인 400명이 있습니다. 장애인시설에서 평생 갇혀 살다 반세기 만에 탈시설해서 노동하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 있습니다. 노동을 하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현장은 장애인 투쟁의 성과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서울시의 진일보한 걸음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노동능력이 없는' 최중증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수혜적인 제도 너머, 장애와 손상의 상태를 고려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노동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정책을 바꿔나가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제도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당신은 노동자들을 단칼에 해고하지는, 삶을 빼앗고 부숴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울시장은 약자와 동행한다고 외쳤지만, 정작 저와는 악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년 저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무상급식을 시행하기 직전까지 고등학교를 다녔죠. 저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학교급식을 먹는 건 남의 일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무상급식을 시행한다고 할 때, 당시 오세훈 시장은 무상급식이 무상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민은 당신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아실 분들은 알겠지만, 발언을 통해 많은 사람 앞에 커밍아웃 한 건 처음입니다) 오세훈 시장은 2023년 6월 13일 ’약자와의 동행‘ 행사에서 성소수자가 포함돼 있느냐는 질문에 ’성소수자라고 해서 성소수자가 하는 모든 행사가 약자로서의 배려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에 찬성할 수 없고 반대한다는 입장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세상이 저만치 변하고 있는데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세훈 시장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전담인력으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노동권을, 중증장애인 동료들의 생계를 빼앗겠다고 합니다.
약자와 동행한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저를 비참하게 만들고 존재를 부정하더니 이번에는 삶을 빼앗아 갑니다. 저의 권리를, 최중증장애인의 노동의 권리를, 시민의 권리를 갈라치기 하지 마십시오. |
난 발언을 통해 커밍아웃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발언을 많이 했지만 노들야학의 상근자로서 성소수자로서 나 자신 그대로 정체성을 알리면서 한 시민으로 사회에 차별받는 또 다른 소수자의 한사람으로 연대를 했다.
오늘 갈 수 없는 길을 내일이 온다고 갈 수 있을까? 어렵고 힘든 길 그래도 가야 한다.
동료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나 자신을 위해 앞으로 투쟁!
*2023년 11월 20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55차 출근길 투쟁에서 노들야학 박누리 교사가 연행되었습니다. 이에 노들야학은 교실이 아닌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참여하며 현장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박누리 교사는 다음 날인 11월 21일 석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