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웹진 48호_2014.4 - [Wz048_한겨레 21 기고글] 장애여성으로 살아가기_김상희

by nodeul posted Nov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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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여성으로 살아가기


한겨레 21 기고글 / 사회적기업 노란들판 노동자 김상희



일곱 딸 일곱 달, 막내, 장애인

나는 일곱 딸 중 막내로, 일곱 달 만에 태어났다. 아들을 손꼽아 기다리던 부모님이 너무 실망하신 탓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집으로 온 내가 황달을 보이며 경기를 반복했지만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병원 치료를 하지 않았다. 돌이 지나도록 '정상적'인 성장이 안 되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병원을 찾아갔고 나는 장애진단을 받았다.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온 가족의 삶에 불쑥 등장한 나는 점점 '짐' 같은 존재가 되어 갔다. 머리 모양 하나 내 맘대로 결정하지 못했고 언니들의 결혼식과 부모님 환갑 같은 큰 가족 행사에도 초대 받지 못했던 기억은 아직까지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다. 나는 장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불평불만이 쌓여갔고 참 많이도 싸웠다.


답답한 가족 안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책을 읽을 정도만 되면 학업을 중단시키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고 선생님들이 설득해주셔서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특수학교가 지방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중학교 진학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학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저항하여 집에서 가까운 일반 중학교 진학을 '쟁취'하게 되었다. 장애인 통합교육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특수학교 출신인 내가 학교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말을 대놓고 했다. 한 선생님은 수업시간마다 나를 째려보면서 야단을 쳤다. 똑바로 앉아라, 너는 왜 교복치마를 입지 않느냐, 머리 길이가 학교 규정과 맞지 않다, 등 나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꼬투리 잡으며 다양한 이유로 나를 괴롭혔다. 어떤 선생님은 시험을 볼 때 옆에 있던 친구에게 내 답안지를 대필하도록 시켰다. 내 답안지를 보고 자신의 답안지를 고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 때 하도 많이 울어서 지금은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다.

같은 반 아이들 역시 처음에만 호기심으로 잘 대해 주다가 나중에는 나약하고 소심해진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결국 1년 만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긴 사춘기 시절을 집 안에서만 갇혀 지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문제에서 막히다.

스물두 살, 우연히 검정고시라는 제도를 알게 되어 장애인 야학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엔 야학이 많이 낯설었다. 야학에서는 장애가 개인이 짊어지고 갈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바꿔나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을 만나면서 내가 겪어 온 차별이 그들의 경험과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야학을 통해 장애여성운동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점점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설득 한 끝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했고, 처음으로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면서 책임을 갖고 역할을 해냄으로써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활동을 거듭할수록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연대회의에 가서는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말해야 될지 몰라 어디론가 숨고 싶었고, 가끔씩 기획안을 써야 했을 때는 국어사전을 열어놓고 밤새 낑낑대어도 만족스런 기획안을 쓰지 못했다. 새로운 도전은 계속되었지만 번번이 배움이 짧다는 피해의식과 비장애 활동가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나는 저렇게 멋진 생각과 말을 못 할까.’ ‘ 왜 나는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였다. 더 이상 활동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동료들이 아무리 지지를 보내와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활동은 나를,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다가 장애로 인해 생긴 목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목숨을 걸고 받아야 할 만큼 위험한 수술이었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으니 큰 기대 없이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때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쌓아온 경력과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결심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중증장애를 가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직업전문학교는 혼자 신변처리가 가능한 경증장애인 위주로 모집을 했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인연이 있었던 분과 연락이 닿아 현수막업체의 디자이너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기존 사회에서 배제당해 온 장애인들의 노동권에 대한 고민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기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윤을 내어 운영해야 하는 곳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 맞는 노동력과 생산성이 담보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언어장애가 있어 고객과 직접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이 더 오래 걸리기도 하고, 내가 디자인을 늦게 해서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다른 동료에게 그 부담이 이전된다.

어쩌면 활동가로 살 때보다 더 고단하고, 나의 부족함과 더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애여성운동을 할 때는 장애여성인 내가 활동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로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실수를 하면 바로 고객에게 불만을 듣고, 내 잘못은 회사의 금전적 손해로 이어지는 등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쳐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내가 만든 현수막이 거리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따금씩 '장애여성의 독립적인 삶을 보장하라!' 같은 현수막을 디자인할 때는 여전히 나의 활동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안도한다. 또한 이 회사는 중증장애인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이 되기 위해 다양한 고민과 시도를 하고 있어서 거기에 동참한다는 기쁨도 크다. 기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장애인과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비장애인들이 모여서 단순히 노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삶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하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고달픔에 지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들과 함께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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