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학교' 노들야학의 서른 해
노들장애인야학 30주년 개교기념제 현장 취재기
강혜민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비마이너〉 기자
쿵쿵차카차카, 이것이 노들의 리듬이다
“안녕, 하세요, 우리느은-!”
그다음 이어지는 소개는 악기 연주로 대신한다. 팀명은 ‘노들쿵쿵차카차카’.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짓고 싶어서”(김유미 교사) 악기 소리를 따서 이름 지었다. 북소리 “쿵쿵”, 슈깔류(브라질 악기)를 흔들면 나는 소리 “차카차카”가 팀명이니 정확하게 자신을 소개한 셈이다.
연주자들은 나무북채를 서로 딱딱딱 맞부딪치며 공연 시작을 알렸다. 화면에 “노들비트”라는 붉은 글자가 뜬다. 마치 ‘이것이 노들의 리듬이다’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듯하다.
노들쿵쿵차카차카팀이 공연을 하고 있다.
첫 곡이 끝나고 김유미가 마이크를 잡는다. “다음 곡 소개해 주세요.” 유호진(학생)에게 곡 소개를 청한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 멈추며 오른손을 내밀어 손가락 네 개를 펴는 행동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긁적이고 멈추고. 긁적이고 멈추고. 반복에는 리듬이 생긴다. 유미가 묻는다. “쌈바가 몇 개?” 긁적이다 멈추고. 긁적이다 멈추고. 멈출 때마다 손가락 네 개가 꽃처럼 펼쳐진다. 유미가 원하는 답은 그의 등 뒤에서 나온다. “쌈바레게(네 개)” 검은 바탕에 붉은 글자가 떠오르자, 사람들은 그제야 “아~”하며 환호한다.
이날 무대에 오른 열 명의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은 ‘서울시 중증장애인 맞춤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다. 대부분 탈시설한 중증발달장애인이다. 이렇게 공연 있는 날엔 무대에 올라 공연하고 노래 부르면서 야학에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며 산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삶이다.
2023년 노들야학 학생회장단이 인사를 하고 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노들야학의 서른 해
2023년 8월 8일 오후 7시, 노무현시민센터에서 노들야학 30주년 개교기념제가 열렸다. 노들야학 30주년 슬로건 ‘노들오래대다노들좋다노들쭉가자’는 최원균(학생)이 지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많이 틀린 문장”이지만 “늘 크고 당찬 원균의 목소리, 야학을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잘 느껴”져서 선정됐다.
1993년 8월 8일,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정립회관의 탁구장을 빌려 노들야학은 문을 열었다. 학생이 다섯 명이었는지 열한 명이었는지 제각기 기억은 다르지만, “교사 열한 명에 학생 열한 명”으로 우선 기록하기로 한다. 초창기 야학 학생 대부분은 장애인근로사업장 정립전자의 직원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장애인들은 낮에는 정립전자에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야학에서 공부했다. 여섯 시에 시작된 수업은 밤 열 시가 되어 끝났다.
교사는 대부분 비장애인 대학생이었다.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이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의 이동지원과 활동지원도 교사들의 몫이었다. 수업을 하기 위해 교사들은 우선 학생들을 야학까지 데려와야 했다. 봉고차를 운전해 학생들 집을 돌았다. 수동휠체어는 접어서 봉고차에 싣고, 계단 있는 집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학생은 업어서 봉고차에 태웠다.
교실 속 수업 장면이 장애인은 탈 수 없는 버스를 가로막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로 촉발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제일 앞줄에는 노들야학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휠체어)와 버스를 쇠사슬로 동여맸다.
2008년 노들은 정립회관에서 쫓겨난다. 그들은 추운 겨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천막을 치고 ‘천막야학’ 생활을 시작한다. “길바닥에 나앉아도 수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현수막이 천막 정수리 위에서 펄럭였다. 농성 끝에 노들야학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마로니에공원 뒤편에 있는 지금의 건물에 입주한다. 노들이 탈시설 투쟁에 적극 결합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나온 ‘마로니에 8인’의 탈시설 투쟁을 지원하면서 야학에는 점점 탈시설 장애인들이 찾아오고, 야학은 그들과의 일상을 고민해야 했다.
2017년 5월부터는 장애인거주시설 인강원에서 생활하는 중증발달장애인들이 노들야학의 봉고차를 타고 나와 야학에 춤추러 왔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에게도, 야학에도 새로운 시간(발달장애인의 탈시설)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전에는 지체·뇌병변장애인이 다수였던 야학의 구성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탈시설한 중증발달장애인이 늘어나면서 야학 수업은 달라져야 했다. 새로운 도전의 나날이 이어졌고,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내야 했으며, 그 고민은 현재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로 이어졌다. 노들야학은 이 사회 제도를 바꿔냄으로써 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리를 이 세계에 만들어 냈다.
노들테크노전사음악대가 공연하고 있다.
세상에 없던 학교를 짓다
노들야학은 교사에게도 새로운 배움이 열리는 공간이었다. 야학에 자원활동하러 온 교사들은 학생들과 일상을 함께 하며 그 전엔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다. 그것은 ‘장애인이 차별받는 세상’이었다. 일상에 교집합이 생기자 비장애인들의 감각도 변했다. 교사와 학생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관계는 교육과 투쟁이 어우러지는 “세상에 없던 학교” 노들야학을 만들어 낸다.
물론 매일이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머물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노들야학의 세 번째 교장으로 24년(1997~2021년)간 교장으로 재직한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은 “분필 살 돈도 없던 때, 공간이 없어 거리에 천막을 쳤던 때, (갖은 투쟁으로) 사람들한테 많은 욕을 먹던 때보다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때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떠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밀물과 썰물이 반복하는 시간에도 1993년 야학이 개교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노들야학의 공동교장 중 한 사람인 김명학. 그는 야학 학생이면서 교장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집회 현장에서 노들야학이 어디 있는지를 찾으려면 김명학을 찾으면 된다. 그는 늘 노들야학 깃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김명학은 지난 30년의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투쟁이 함께 하는 집회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지금도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김명학 공동교장이자 학생이 이야기하고 있다.
노들야학을 30년간 다닌 이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김명학은 “나의 장애는 바꿀 수 없지만 비장애인중심의 사회환경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저상버스가 도입되는, 조금씩 나아지는 역사를 함께한 경험이 그 믿음의 근거다.
집에서 41년, 시설에서 15년을 살다가 자립한 이수미에게 야학은 꿈을 안겨줬다. “제가 보시다시피 중증장애인이라 꿈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하게 되고 검정고시 패스해 올해는 대학까지 마쳤습니다. 꿈을 다 이뤘는데, 지금 또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큰 꿈이 있습니다.”
꿈을 가져본 사람은 계속 새로운 꿈을 갖게 된다. 그는 지하철 투쟁, 버스타기 투쟁에 가장 많이 나오는 학생 중 한 명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제도들인데, 권력자의 한마디에 장애인제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참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투쟁하면 다음 세대가 좀 더 편하게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의 새로운 꿈은 무엇일까. 이수미는 내일의 모습이 그 스스로도 궁금하다. “‘노들야학 40주년이 되면 다시 토크쇼에 초대해 주세요. 그때 제가 얼마만큼 성장했을지, 저도 제가 궁금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과 같이 보고 싶습니다.”
김명학과 함께 공동교장을 하는 천성호는 야학이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노들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야학이 없어져야 한다, 야학은 없어지기 위해 투쟁한다고 하지만 야학이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모순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야학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노들야학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존재하는 한 30년, 50년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들의 미래는 과거처럼 밝다.
노들야학 30주년 토크쇼. 왼쪽에서부터 이수미 학생, 박유리 교사대표, 수어통역사, 사회를 맡은 고병권 교사, 천성호 공동교장, 김명학 공동교장
공간 비용과 운영비 마련 위해 ‘노들방탄기금’ 모집
노들야학이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낮아진 턱만큼 시설과 집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세상에 나왔고, 야학을 찾아왔다. 과거 10여 명이었던 학생은 80여 명으로 늘었다. 기역니은을 배우며, 지하철과 버스를 점거하는 방법을 배웠고, 투쟁을 통해 ‘장애인도 사람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이에게 노들은 처음 만난 세상이었고 환대의 공간이었으며 해방의 공간이었다. 해방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화장실에 가고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일상이며, 장애인도 한 번 꿈을 가져보는 것이자, 차별을 차별이라 말하며 친구를 만나 고민을 이야기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해방의 길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면 곰팡이를 걱정하고 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받아낼 바가지를 가장 먼저 구해야 한다. 매년 조금씩 오르는 월세를 걱정하고, 내년에 오르는 보증금 3,000만 원 모금 방법을 궁리하며, 운영비가 없어 전전긍긍해야 한다. 지금 노들야학은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고 또 한 시절을 버티기 위한 ‘노들방탄기금’을 모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컴컴한 내일을 껌뻑거리는 빛에 기대어 복잡하고 천진하게 달려온 삼십 년, 다시 내일을 기약한다.
노들야학 30주년 개교기념제를 마무리하며 사람들이 노들 30주년 슬로건 ‘노들오래대다노들좋다노들쭉가자’를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