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겨울 136호 - [노들은 사랑을 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제작합니다 / 조상지

by 루17 posted Apr 15, 202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노들은 사랑을 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제작합니다

 영화반의 노들야학 30주년 축하 영상 제작 일기

 

 

 조상지

노들장애인야학 부총학생회장

 

 

 

 

  『노란들판의 꿈』은 노들야학 20주년을 맞아 홍은전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올해 30주년을 맞아 『노란들판의 꿈』처럼 대단하지는 못하겠지만, 노들야학 총학생회는 30주년을 축하하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은전 쌤 말씀처럼 꼴 보기 싫은 사람들도 간혹 있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노들야학을 사랑하니까. 나중에 40주년이 됐을 때, 홍은전 선생님이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를 낸 것처럼, 노들야학 총학생회도 30주년을 맞아 ‘뭔가 했다’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다.

 

조상지1_정립회관시절노들_2002년8월노들야학상반기졸업식.jpg

정립회관 시절 노들 _ 2002년 8월 노들야학 상반기 졸업식

 

 

  2023년 총학생회는 여러 번의 회의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축하 현수막을 걸고, 학우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가사로 재구성해 「노들 해방가」를 만들어 같이 부르고, 선생님들의 축하 영상을 만들어 개교기념식 때 상영하기로 했다. 영상 내용은 개교 때부터 30년 동안 공부만이 아니라 활동지원과 이동지원 등 학생들의 손발이 되어 주고 장애인들의 권리를 함께 외쳐주셨던 선생님들의 노력에 대해,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섭외하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는 기획이었다. 이 글은 영상 제작 중에 영화반이 없어질 수도 있었던 어마어마한 갈등 속에서, 위기를 극복해가며 영상을 완성한 영화반의 제작 일기다.

 

  2022년 4월 상지, 홍기, 지호가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학생회 차원에서 영화 자조 모임을 시작했다. 천성호 공동 교장 선생님께서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영욱 쌤을 지도교사로 영입해주셔서 본격적으로 영화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에 세 시간 동안 진행했던 5회 미만의 수업과 배움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식으로 보내며 한 해가 지나갔다.

 

  영화 자조 모임이 올해 특활반으로 승격하고 매니저로 정수 쌤이 들어오시면서 영화반 어벤져스의 그림은 그려졌지만, 인터뷰이 섭외, 촬영, 편집까지 하기에는 시간도 촉박했고, 실력도 좀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주년 행사 때 상영할 인터뷰 영상을 반드시 만들어내겠다는 모두의 다짐으로 영상 제작에 들어갔다. 교사 동문 명단을 받은 후, 선생님들에 대한 정보를 천성호, 한혜선 선생님께 얻고, 홍기, 지호, 상지, 지우 네 명이 세 분씩 섭외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과정을 정수 쌤이 메이킹 촬영을 하기로 했다.

 

  섭외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홍기는 섭외해야 하는 선생님이 거주하시는 경주까지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부담스러웠는지 간곡히 거절하셨다. 섭외 대상 세 분이 모두 인터뷰를 거절하는 바람에 성격 급한 홍기는 어떡하냐면서 휠체어를 끌고 유리빌딩을 돌아다녔다. 지호가 본인 인터뷰이 외에 박경석 고장 쌤을 추가 섭외했다는 얘기를 듣고, 박경석 고장 쌤 인터뷰를 양보하라면서 지호를 쫓아다녔다. 결국 커피 한잔에 인터뷰권을 넘겨받고, 홍기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 지우는 선생님들과 인터뷰 시간이 안 맞아 두 분 선생님께 셀카 영상을 받고, 한 분은 상지가 대신 인터뷰를 했다. 상지는 은전 쌤이 영상 인터뷰는 절대 안 한다는 정수 쌤 얘기를 듣고, 은전 쌤을 섭외해주는 조건으로 상지 엄마 인터뷰를 유미 쌤에게 섭외해주고 은전 쌤과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촬영 역시 쉽지 않았다. 지호는 양평에 있는 임영희 선생님 댁에서 인터뷰 후 삼겹살까지 대접받았는데, 영상만 녹화되고 음성은 녹음이 안 돼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영희 선생님께 상황 설명 후 셀카를 부탁해서 음성이 들어있는 영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배승천 선생님 인터뷰에서도 녹음이 튀어 영상을 쓸 수 없어서 정말 속상해 했다. 홍기는 이라나 선생님 인터뷰 시간에 지각해서, 상지가 대신 이라나 선생님을 맞이하여 음료부터 접대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박경석 고장 쌤의 바쁜 일정으로 첫 번째 인터뷰가 취소되면서, 두 번째 인터뷰도 어떻게 될지 몰라 2층을 휠체어로 왔다 갔다 안절부절못했지만, 정확한 시간에 고장 쌤이 큰 소리로 홍기를 부르며 나타나셔서 홍기 얼굴에 하회탈 같은 웃음꽃이 피었다. 상지는 중부대학교에서 정수 쌤과 함께 김기룡 선생님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 선물까지 받아들고 당당히 중부대학교를 나왔는데, 저상버스 리프트가 고장 나 30분 가까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찌는 듯 더운 여름 한낮에 정수 쌤과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는 끝냈지만, 다음에 넘어야 할 산은 편집이었다. 그것도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도비 프리미어’로 편집을 해내야 했다. 노들야학에서 프리미어 1년 구독권과 노트북을 대여해주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토요일에 3시간씩 2주간 외부 강사를 초대해 배움을 시작했다. 상지와 홍기는 본인의 노트북으로, 지호는 노들야학 노트북으로 프로젝트 만들기부터 시작했다. 인터뷰한 영상에서 각자 중요한 얘기와 축하의 말을 뽑아내어 마지막에 정리하기로 계획을 잡고, 영욱 쌤과 정수 쌤의 도움으로 편집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약속한 상영 시간은 20분이었다.

 

  편집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유미 쌤으로부터 10월 ‘노란들판의 꿈’에서 20분 상영시간을 줄 수 있으니, 노들야학 30주년 기념식에는 5분짜리 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선생님들의 많은 말씀을 담고 싶었던 우리의 바람은 ‘노란들판의 꿈’으로 미루고, 정수 쌤의 메이킹과 선생님들의 30주년 축하 인사말만 추려 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무리 편집을 하신 정수 쌤의 멋진 고집으로 5분이 아닌 ‘6분 38초’ 분량의 영상이 완성되었고, 노무현 재단 스크린에 영화반이 만든 첫 영상이 상영될 수 있었다. 이후 노란들판의 꿈에 상영될 20분짜리 영상을 만들기 위해 추가 인터뷰와 편집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미 쌤이 할 얘기가 있다며 다가왔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예쁜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시간이 안 된다면서, 공연 시작과 끝에 공연팀들이 ‘올라가는 2분, 내려가는 2분’ 동안 틀 두 개의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노래방 배경 영상도 아니고 선생님들 인터뷰가 얼마나 중요한데 시간을 그렇게 주냐고, 이건 노들야학이 영화반을 무시하는 게 확실하다면서 만들지 말자고 했지만. 노들야학에서 어도비 프로그램과 노트북 지원을 받은 죄로, 결국 우리는 요구대로 2분짜리 영상 두 개를 만들어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반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반 자체적으로 상영회를 하자’는 의견이 모여, 노들야학 30주년 선생님들 축하 인터뷰와 영화반 구성원들이 각자 만들고 있는 영화를 모아 12월 29일 겨울 방학식 날 상영회를 하기로 확정지었다. 선생님들의 인터뷰 영상은 지금 편집 중이다.

 

  그리고 여기, 영상에 다 담아내기 어려웠던 많은 얘기를 『노들바람』의 지면을 빌어 정리한다. 서툰 인터뷰와 촬영을 애정으로 반겨주시고, 소중한 시간 내주신 선생님들에게 영화반 성원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

 

1.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관계

 

- 정민구: 덕민이 형은 음성 꽃동네에서 한평생을 사셨던 분이에요. 집이 월계 사슴아파트였는데 수업 끝나면 형이 ‘야~ 우리 집에 가자’면서 교사들을 우루루 데리고 갔어요. 족발에 소주 같은 항상 먹는 코스가 있었는데 자주 먹고 놀고 그랬어요. 탈시설 1세대로 되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형이에요.

 

- 노유리: 제가 영애 언니 활동보조도 하면서 언니가 야학에 다니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거든요. 많은 준비와 어려운 과정을 뚫고 야학에 오고, 배우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즐거워하시고 좋아하셨어요. 조용필 콘서트에 같이 갔던 경험들이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2. 우리들의 아주 특별한 수업

 

- 이라나: 나이 들어 힘들게 온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가야 되는데 저랑 신경전 벌이면서 수업에 안 들어오려고 하셔서 처음에는 ‘여기 뭐 하는 곳이야? 공부 안 할 건가?’ 이런 생각 했거든요. 시간이 지나서 ‘이곳에 오는 과정 자체가 이 사람들에게는 되게 큰 공부고, 도전이고, 경험이고, 그리고 우리가 이 공간 안에서 부딪히는 모든 과정이 교육’이라는 홍은전 교사님 말을 듣는데 되게 머리가 띵~ 하더라고요.

 

- 류승화: 처음에 특활반 수화 강사로 왔는데 수요일 집회 때문에 수업을 별로 하지 못했어요. 집회 후에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경우들이 있어서, 수업을 못 하는 날이 많았거든요. 학생분들이나 교사분들이 수업을 못 하게 되더라도 절대 미리 얘기해주는 법이 없어요. 퇴근 후에 허겁지겁 야학에 가서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나중에는 또 익숙해지더라고요.

 

- 고병권: 10월 2일은 좀 특별한 날이에요. 현장 수업이라고 서울시 교육청으로 오라고 문자가 왔어요. 공정택이라는 교육감이 장애인 교육 지원 예산을 40%인가 삭감한다고 해서 학생들하고 교사들이 서울시 교육청으로 몰려가서 싸움이 났어요. 전동휠체어로 들이받고 싸우고 그래서 수업 안 하는 줄 알았어요. 저녁 7시가 되니까 저에게 수업하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전경도 있고, 서울시 교육청 공무원들도 있고,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싸우는 야학 학생들도 있었는데 가로등 밑에서 수업했어요. 경찰도 듣고, 서울시 공무원도 듣고,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들으시고 퇴근하던 사람도 듣고, 다 들었어요. 10분 전까지 막 싸웠는데 그 자리에서 강의를 하고, 수업을 하고, 같이 책을 읽고, 생각을 한다는 거잖아요. 뭐라고 말하기 좀 어렵게 분위기가 되게 뭉클했어요.

 

 

3.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시간에 늘 함께했다

 

- 임영희: 활동지원이나 특별교통수단이나 지하철 이런 것도 지금 같지 않을 때여서 야학의 봉고차가 집과 야학을 이어주는, 집과 집 밖을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학생분들이 있었어요. 봉고차를 타고 같이 집에 가서 모시고 학교에 가고, 야학이 끝나면 다시 집에 데려다 드리고, 등하교를 같이 했었던 학생들이 제일 기억이 나요.

 

- 한혜선: 처음에는 학생들이 수동 휠체어를 탔었는데, 몇 년 있다가 전동휠체어를 한 대, 두 대 타게 됐어요. 지금처럼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많지 않아서 한 명씩 교사들이 이동지원을 했어요. 지나가는 분들 네 명을 모아야지만 전동휠체어를 들 수 있거든요. 원래는 더 무거워서 여섯 명, 일곱 명 모아야 되는데, 잡을 때가 없어서 네 명을 모았어요. ‘안녕하세요. 여기 좀 들어 주실 수 있어요?’ ‘네’ 대답하면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렇게 한 명, 한 명. 네 명이 모여지면 같이 들었어요.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그게 정말 위험하고 그랬어요.

 

- 김기룡: 그 당시에는 활동지원 서비스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학생분들 등하교를 위해서 119를 불렀죠. 119를 통해 오시고, 가실 수 있도록 하거나, 그게 좀 어려운 곳은 직접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집에 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4. 나 때는 말이야~ 투쟁이란 말이야~

 

- 김기룡: 저는 노들야학에서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노동절에 깃발 들고 나가는 것도 처음 해보고, 이동권 투쟁할 때 점거하고 기습 시위도 해보고, 경찰에 잡혀 가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할 수 있었어요.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하는데 아무도 면회를 와 주지 않아서 배신감을 느껴보기도 했구요. 그런 심각하고 치열한 투쟁 때문에 저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 권순성: 첫 번째 버스 타기 하던 날, 되게 걱정을 많이 하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동권 투쟁하시던 장애인 동지들 다음에 우리 노들야학 동지들이 휠체어를 탄 채로 타시더라고요. 굉장히 놀랐습니다. 첫 번째 버스 타기 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고, 가끔 가다가 ‘나 때는 말이야’처럼 후배들이나 제자들한테 이야기도 해주곤 합니다.

 

 

5. 이게 된다고? 안 될 것 같은데? 정말 되네!

 

- 한혜선: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맨날 노들야학은 종로구에 가야 된다고 하셨어요.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비싼 데를 우리가 어떻게 가나? 저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많은 사람이 안 된다고 했는데 박경석 교장 쌤은 진심이었던 것 같아요. 진짜 그걸 만들어내서 이 유리빌딩에 들어왔잖아요. 변두리에 있던 중증장애인들이 진짜 서울 한복판 종로구에 들어오게 되더라구요. 가장 기쁘고, 기억에 남는 날이에요.

 

- 홍은전: 2009년에 ‘탈시설 권리’라는 말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을 때, 시설에서 사람이 살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되고, 무엇을 권리로 보장해야 되고, 그걸 구체적인 목록으로 확인을 했을 때 그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마로니에 두 달 농성했더니 체험홈이라는 게 생기더라고요. 그게 제도적으로 보장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의 씨앗 같은 일이 생겼고, 요구한다고 된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활동지원서비스도 이미 시범사업처럼 많이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그 서비스를 모든 장애인들에게 제공하는 게 가능하다고? 한강대교 기어가고, 막 농성하고 이랬더니 서울도 되고, 대구도 되고, 인천도 되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너무 신기한 경험들이었죠.

 

조상지2_마로니에공원천막야학시절.JPG

마로니에 공원 천막야학 시절

 

 

 

6. 술을 함께 세상을 배운다

 

- 권순성: 야학 수업 끝나고 내려오면 아차산역 옆에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그래서 하루도 안 빼놓고 거의 매일 포장마차에서 지하철 막차가 오기 전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수업 보강한다고 주말에 야학에 와서 수업은 짧게 하고, 또 내려가서 턱이 없는 포장마차에서 낮술 하던 생각이 납니다. 수학 시간에 숫자 세기가 안되던 분이 계셨는데, 포장마차 술자리에 가니까 남아있는 소주병을 잘 세시더라고요. 소주병 몇 병을 먹었는지를 또박또박 세시는 걸 보고 되게 놀랐어요. 딱딱한 수업보다 술자리 같은 일상생활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 김기룡: 저는 20대 초반이었고. 수업하시는 분들은 다 이제 30, 40대 분들이 많으셔서 ‘기룡아, 이제 수업 고만하자’, ‘야식이라도 좀 시켜 먹고 수업하자’면서 되게 자유분방했던 것 같아요. 10시에 끝나면 항상 학생과 교사들이 뒤풀이도 하고, 수업하러 저녁에 오면 집에는 아침에 갔던 것 같아요.

 

조상지3_노란들판의꿈합창공연.JPG

노란들판의 꿈 합창공연

 

 

 

7. 노들의 30년을 촘촘히 채워준 선생님들, 수고하셨습니다

 

- 류승화: 노들의 힘이라고 한다면 지금 노들과 함께하면서 노들을 굳건하고 든든히 지키는 분들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노들을 보며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 권순성: 저에게 노들은 큰 배움을 주었고,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인권 문제라든지 장애인 사회에도 큰 배움과 깨달음을 주고 있는 곳입니다. 건강하게 30년 투쟁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투쟁하는 공간이었던 것처럼, 앞으로 30년 더 나아가 60년, 계속해서 장애인 인권을 위해 열심히 배우고 투쟁하고, 투쟁하며 배우는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박경석: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돈이 없다거나, 경찰들한테 잡혀 간다거나, 탄압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들진 않아요. 그런 건 감당할 수 있는데,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떠나는 멀어짐에 대해서 아직도 익숙하지는 않아요.

 

- 홍은전: 저는 노들야학을 떠나는 사람들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어요. 너무 서운해서, 사람들이 떠나니까 너무 밉기도 하고, 나만 남겨놓고 다 떠나는구나. 이런 마음 때문에 너무 원망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그렇게 계속 같은 자리에 있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마음이 힘들었는데, 제가 떠날 때가 되니까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알겠더라고요. 30주년을 축하하는 말이기도 하고. 노들을 떠난 모든 사람들, 그러나 그 30년을 아주 촘촘하게 채워주었던 그 모든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