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우리의 힘
2023년 기후정의행진
서한영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아슬아슬
첫눈 오던 날. 내리는 눈에 온통 마음을 뺏겨 와아, 감탄하고 있었다. 옆 자리에 있던 야학 선배 교사가 작게 읊조렸다. “오늘이 수요일이라 다행이야.” 그 옆자리에 앉은 다른 교사가 이어받으며 “이런 날 밖에 나오려면 아슬아슬한 학생들이 있지.”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냥 와아, 하던 나는 움찔했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집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등굣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로니에 공원을 가로질러 야학으로 걸어오고 있을 학생들의 발가락 끝에 몰려있는 아슬아슬한 감각이, 전동휠체어를 움직이는 손끝에 고여 있을 아슬아슬한 감각이 교차했다. 눈 덮인 우와, 한 광경이 아슬아슬한 감각의 풍경으로 차올랐다. 그해 겨울은 유난했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래로 가장 추운 겨울이 지속되었다. 북극에서 부는 바람을 가두는 제트기류가 온난화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온 탓이었다. 야학 화장실 물이 얼기도 했고, 교실에서도 발끝을 자주 움직여야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 북극이었다.
위기-재난-참사
2022년 8월 8일에서 9일. 10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관악구 신림동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 3명이, 동작구 상도동에선 기초생활수급자 발달장애인 1명이 반지하 자택에 고립되어 세상을 떠났다. 장애인, 주거취약계층, 기초생활수급자, 불안정노동자 등, 기울어져 있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따라 빗물도 아래로 흘러 가장 낮은 곳을 덮쳤다.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여의도성모병원 인근에 모였다. 매미 우는 소리가 유난한 8월 11일 여름의 밤이었다.
“불평등이 재난이다”라는 현수막 아래로 여러 단체의 문장들이 발언되었다. “이 무참한 폭우는 기후위기의 얼굴 그 자체”이고(기후위기비상행동) “모두가 인지하다시피 이번 폭우는 기후재난이다”(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기후위기로 인한 자연재해이자 재난 대응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회적 참사”이다(재난불평등추모행동). “동일한 재난을 경험하더라도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그 재난의 악영향은 더 크다”(전국장애인부모연대). “가난한 사람들도 반지하가 아닌 안전한 공간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국가가 장애인 가족에게 부양의 의무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제대로 된 역할을 했더라면, 비 때문에 물에 잠겨 사람이 죽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한국피플퍼스트). “재난 상황이 노인, 여성, 장애인, 경제적 취약 계층의 삶을 훨씬 급격하게 붕괴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재난 근본대응과 불평등사회 대전환을 촉구한다!”를 함께 외치며 추모 집회를 마쳤다.
재난은 ‘취약성’과 자연적·사회적 위기가 만났을 때 발생한다. ‘재난’ 뉴스의 맨 앞자리에 ‘취약한’ 기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지구 거주자들이 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0년 한국에서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나왔던 청도대남병원은 그 취약성의 지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첫 번째 코로나 사망자였던 그, 는 20년 넘게 그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갇혀있던 사람이었다. 이후 수용자의 대부분인 122명이 확진되었고, 6명이 더 사망했다. 이후 정신병원, 정신요양시설, 장애인거주시설 등 집단시설 내 감염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재난은 이미 재난-화된 거주시설에서 터져 나왔다. 이는 “장애인이어서 감염병에 취약한 것이 아니라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협소한 공간에 집단 감금하는 시설의 구조가 감염병에 취약한 것”이다(이진희, 세계인권도시포럼 발제문 중에서). 즉, 취약함은 불평등한 배치에 따른 것이다.
취약-화된 자리로 쏟아지는 재난은 기후위기와 함께 일상 속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상 기온에 비가 쏟아지면 집에 물이 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삶, 그리고 폭염 속에 에어컨을 켜는 것조차 두려워 시간을 재가며 전원 버튼을 눌러가야 하는 열대야의 밤, 거리 두기의 실현이 불가능한 쪽방촌의 공간, 백신을 맞으면 나의 몸을 돌볼 곳이 없기에 주사를 맞는 것조차 두려운 노숙인들의 하루. 3만 명의 중증장애인의 시설에 정부의 감염병 대책과는 무관한 주거 이전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하루. 그 하루들에서 많은 중증장애인과 기저질환자들의 사망률이 치솟고 있는 현재 정부의 통계 속에서 이들에게 기후위기에 대한 현재 시나리오가 반영될 수 있을까?”(한명희, 기후정의포럼 토론문 중에서) 당신의 하루 속에 우리의 하루는 고려될 수 있을까?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도 장애인은 당사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2년 유엔은 기후변화협약 당사자 회의에서 기업, 환경단체, 농민에게 협상력을 갖춘 당사자 지위를 인정했고, 2001년에는 선주민단체, 2011년에는 청소년과 여성에게도 당사자 지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장애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엔은 기후위기에 취약한 인구로서 장애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하루가 취약하기 때문에 배려받는 것이 아니라 취약화하는 구조 속의 하루로 고려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22년 8월 신림동 반지하 참사 이후 기후정의운동과 장애해방운동의 교차점에 대해 말, 하기 시작했다. “장애인운동판과 기후운동판이 만나기 위한 첫 자리”라고 소개된 2022년 9월의 ‘기후정의행동×전장연 간담회’를 시작으로, 광주, 인천, 제주에서도 장애와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토론회와 포럼들이 연이어 열리며 말, 하기 시작했다.
생물다양성과 신경다양성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거주 불능 지구와 거주 불능 시설사회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논리와 정상성이 비정상성을 지배하는 논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신, ‘더 천천히, 더 가까이, 더 관용적이고 생태적으로’ 사는 수많은 방법”(기후정의선언, 47쪽)과 장애인 탈시설권·이동권·교육권·노동권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파국의 생태적 미래성과 치유의 불구적 미래성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말, 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넘는 차별을 넘는 수상한 우리의 힘
가로 약 2.5미터, 세로 80센티미터의 검은 바탕 현수막에 “위기를 넘는 차별을 넘는 수상한 우리의 힘”이라는 빨간색 글씨가 적혀있다. 글씨는 수상한 방식으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위기’라는 글자에선 ‘ㅇ’자가 두 개이고, ‘차별’이라는 글자에서 ‘ㅊ’은 X로 디자인되었고, ‘수상’이라는 글자에 포함된 ‘ㅇ’자는 두 개의 휠체어 바퀴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우리’라는 글자에서는 ‘ㄹ’자 두 개가 세로로 이어져 있다.
노들야학도 말, 하기 위해 준비했다. 올해 기후정의행진 참여를 위해 야학 차원에서 힘을 모았다. 과학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몇 차례 기후정의행진 기획회의를 진행하며 ‘기후정의’ 교양 수업과 행진 준비를 해보기로 했다. 우리의 기후정의행진 슬로건은 ‘위기를 넘는 차별을 넘는 수상한 우리의 힘’으로 교사회의를 거쳐 최종 결정되었다. 기후정의행진 슬로건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과 퀴어퍼레이드 때 노들야학이 올라탄 행진 트럭의 슬로건이었던 ‘퀴어한 몸들의 수상한 행진’을 포개어 지은 것이다. 우리 슬로건의 어금니 낱말은 ‘수상한’ 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사전적 의미로 ‘수상하다’는 보통과 다른 모양, 의심스러운 형상이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기후정의와 퀴어와 장애를 교차시킬 수 있는 낱말로 ‘수상한’이 딱, 이었다. 자연/부자연, 정상/비정상, 보편/특수와 같은 고정된 이분법적 질서에 논란을 일으키고, 경합 가능한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도록 하는 역량으로서의 ‘수상함’. 이는 예상치 못한 답변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밀도 높은 낱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11명의 단체 사진으로 앞줄에는 4명의 휠체어 이용자가 기후정의행진 선언서를 들고 있다. 뒷줄에 선 7명은 기후정의행진 선언서를 높이 치켜든 채 싱긋 웃고 있다.
기후정의행진을 사흘 앞둔 화요일. 청솔 2/3반 과학교사이자 베테랑 기후정의활동가이기도 한 히옥스의 교양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 이후 ‘○○○를 넘는 우리’로 이어지는 기후정의행진 참가 선언서를 학생들과 함께 작성했다. 오염수를 넘는 우리, 지구온난화를 넘는 우리, 줄넘기를 넘는 우리, 지구 파괴자들을 넘는 우리, 부양의무제를 넘는 우리, 더ㄱ사미ㅇㅅㅂ용궁역을 넘는 우리, 차별밥상을 넘는 우리, 선을 넘는 우리, 권리옹호예산삭감위기를 넘는 우리, 기다림을 넘는 우리, 없는 것을 넘는 우리 등등. 우리의 말, 을 대항로 건물 계단 복도를 따라 게시했다. 3, 4교시에는 기후정의행진 때 사용할 현수막과 노란 바람을 담아낼 노란색 봉지 피켓 위로 우리의 말, 을 쓰고-그리고-문지르고-흔들고-휘갈기고-색칠하며 가득 채웠다. 이제, 준비를 마쳤다.
우리의 함성, 우리의 저항, 우리의 사랑
단상 위로 기후정의행진 공식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네 명의 낭독자가 마이크 스탠드 앞에 서 있다. 낭독자들 뒷면으로 거대한 푸른 하늘색 화면이 띄워져 있다. 화면에는 ‘노들장애인야학 김명학’이라는 글씨와 함께 노들야학 공동교장 김명학이 하얀 수염이 그득한 얼굴에,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티셔츠를 입고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23년 9월 23일 토요일, 기후정의행진은 노들야학 공동교장 김명학의 ‘기후정의행진 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신림동 반지하 세입자와 태평양 섬나라 원주민, 뙤약볕 아래 농민과 발전소 비정규노동자 […]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척 석탄발전소 공사를 멈춘 행동과 민영화를 멈춰 세운 철도파업 […] 오송 참사의 책임을 묻는 싸움과 이동권을 위해 몸을 던지는 장애인의 투쟁, 이 모든 싸움들은 하나입니다.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연대가 곧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입니다. […] 저들의 권력이 사람을 착취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고 자연을 망가뜨려 왔다면, 우리의 힘은 서로를 돌보고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고, 생명을 되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깁니다. 우리의 노래, 우리의 함성이 이깁니다. 우리의 저항, 우리의 사랑이 끝내 이깁니다. 기후위기 한복판에서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새로운 길, 기후위기를 넘어 다른 세상을 여는 새로운 길, 그 길로 우리 함께 행진합시다.”
눈부시게 환한 구름과 하늘 아래로 3만 5천여 명과 함께 행진했다. 숨 쉬는 것 빼고 모든 게 차별이었는데, 미세먼지 시대에 숨 쉬는 것도 차별이 되어버린 세계를 향해 행진했다. “우리는 세계다. 우리는 미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력과 “우리는 다른 이들이 내버려둔 문명 과정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자들과 함께 행진했다. 하루에도 수백 종씩 멸종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 거주자들의 죽음 안으로(die-in) 10분간 누우니.
눈.눈.눈.부.시.게.환.환.한.하.하.하.하.늘.
2045년에도, 이 눈부신 하늘 아래 함께 있을 수 있기를.
50명 정도가 행진을 마치고 경복궁 인근에 모여 찍은 단체사진이다. 사진 중앙에는 “위기를 넘는 차별을 넘는 수상한 우리의 힘”이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있다. 그 뒤로 주먹을 움켜쥐고 “투쟁”을 외치고 있는 노들야학학생, 노들야학교사, 장애해방활동가들이 있다. 눈부시게 환한 하늘에 “노들”의 깃발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