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예술로 활동기 (2)
듣기 위해 기울여지는
자청(이선화)
참여예술인
“노들”의 이름을 알게 된 지는 꽤 되었다. 지금은 멀어진 친구가 야학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친구의 활동에 관해 이것저것 들었던 기억, 친구가 활동의 연장선에서 만든 다큐를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봤던 기억이 남아있다. 오래된 그때가 떠오른 건 최근 다른 프로젝트로 만난 노들 활동가와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 때문이다. 내가 막 사회운동의 세계를 기웃거리던 때, 예술에 질려서 다른 삶을 모색했을 때, 잠시 스쳐 지나갔던 장소를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파견예술인 사업에 처음 참여하는 나로서는 기관과 예술가의 관계 맺기 방식이 보통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니, 보통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팀원의 경험을 들어봐도 기관마다 요구하는 바나 협업하는 방식이 각양각색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간 살아온 궤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노들예술로에서 하게 된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예술과 활동의 경계에서 버티면서 동시에 미끄러지는 사람이다. 이제 스스로 활동가라고 부르기에는 살짝 민망하다고 생각하지만, 절실함, 비통함,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를 쉬이 잊거나 지나치지 못한다. 그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시위, 집회에 참석하고, 발언하고, 연명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목소리의 볼륨을 키울 수 있는 일을 함께 모색하는 정도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예술은 이 과정에서 뿌리와 가지를 뻗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해내는 일이 된다.
노들예술로 활동은 처음에는 낭독 영상을 만드는 예술 협업 작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내가 지하철 선전전을 가게 되고, 후원 주점에서 요상한 안주를 만들고, 광화문 대로를 구호를 외치며 함께 걸었다. 팀원들 모두 이런 활동에 거부감이 없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노들에서 초단기 노동자로 만나는 나를 아무 경계 없이 받아들이는 점도 신기했다. 노들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계단에서 지나치는 분들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인사하는 게 인상 깊었다. 마치 등산로에서 마주친 낯선 이에게 이 산에 잘 왔다고, 남은 험난함을 잘 헤쳐 나가라는 응원을 담은 인사와 닮아 있었다. 이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공유하는 감각이 있다는 가정 아래 건네진 환대가 있었다. 이 따뜻하고 감사했던 환대의 경험으로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난 여전히 노들을 잘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낭독자 한 분 한 분의 삶과 이야기에 대해 잘 모른다.
또한, “파견”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낸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을 생각하면, 이 노동 형태와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노들을 더 알게 되어서 기쁘면서도 복잡하다. 짧은 시간의 협업이 노들예술로와 노들 모두에게 예술로, 사회운동으로 유의미한 시간이었는지, 서둘러 마무리 지은 건 없는지 자꾸 질문하게 된다. 앞서 나는 ‘목소리’라는 표현을 썼다. 사회적 소수자의 발언에 관해 표현할 때 목소리라는 단어를 종종 쓴다. 그런데 목과 소리를 분리해서 소리로만 이뤄진 발언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건 시나 노래, 아니면 춤에 가까울까, 아니면 아직 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는 형식일까. 한글에 덜 익숙한 사람, 짧은 문장, 단어를 선호하는 사람 등의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다면 읽는 행위는 보편적이지 않은 행위가 된다. 내가 읽고 들어서 건져내는 세계는 아주 좁은 범위였음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낭독작업에 관한 초기 제안문 중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듣기 위해 기울여지는 몸짓에 관한 부분이다. 사람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말하고 듣는다. 듣기 싫을 때, 몸이 상대와 반대 방향을 향하는 모습 등이 그 예시이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소리든 언어가 되지 못하고 휘발된다. 노들과 다시 희미하게 연결된 이유는 “불법”이라고 딱지 붙이는 몸들이 내는 소리에 내 몸이 자꾸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몸도 불법인 존재는 없기에 나의 서투른 기울여짐은 계속될 듯하다. 앞으로 새로운 소리를 만날 때마다 긴장할 수도, 실수할 수도 있겠지만 노들 덕분에 망설임과 두려움은 줄어들었다. 정돈된 문장의 세계를 사랑하면서도 소리와 몸짓으로 이뤄진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 글이 낭독자의 언어에 의존하고 있듯이, 매일 지하철에서 나는 장애인의 몸짓과 소리가 만들어낸 세계와 제도에 의존한다. 짐이 많거나 몸이 무거운 날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몸들의 이야기를 이제야 제대로 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