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애인운동, 제네바에서 ‘해외 동지들’을 만나다
최한별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처럼 장판 운동이 뜨거울까?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해 어느덧 국제연대를 담당하는 한국장애포럼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고,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세계 방방곡곡의 장애인 투쟁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장애인당사자간담회
8월 21일, 우리는 제네바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탄 일행들의 얼굴은 설렘과 긴장으로 일렁였다. 제네바에 일주일이나 머물 예정이었지만 몽블랑이나 레만호 같은, 관광지를 둘러볼 생각은 애초에 접은 지 오래였다. 일주일간 빡빡하게 짜인 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장감까지 마음에 품고 비행기에 올라탄 ‘우리’는 한국장애포럼(KDF) 사무국을 비롯해 한국장애포럼 회원 단체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그리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 제27차 세션에 참여하는 이들이었다.
이번 세션에서는 한국 정부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 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아래 ‘협약’) 이행 현황을 심의하는 자리가 8년 만에 열렸다. 2006년, 유엔에서 협약이 만들어지고 한국이 2008년 가입한 이후 첫 심의가 2014년에 진행되었는데, 이때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가 담긴 ‘대한민국 1차 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Concluding Observations on the initial report of the Republic of Korea, 아래 ‘1차 최종견해’)’가 발표됐다.
1차 최종견해는 지난 8년간 장애계가 정부에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장애인권정책을 요구할 때 가장 든든한 ‘빽’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8년간 많은 것이 변했고, 우리에게는 또 새로운 과제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1차 최종견해를 통해 위원회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고 실제로 한국 정부는 지난 2019년 7월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위원회 권고를 따른 것이지만, 새로 도입된 장애인서비스종합조사표는 여전히 장애등급제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활동지원과 같은 주요 서비스 시간이 대폭 하락하는 새로운 문제도 갖고 있다.
위원회의 1차 최종견해와 권고가 한국 장애계에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듯, 새로이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최종견해를 받을 필요가 생겼고, 이를 얼마나 구체적이고 한국 사회 맥락에 적절하게 끌어내는가가 바로 시민사회에 주어진 중대한 역할이었다.
- 대장정의 시작, 비공개 면담(Private Briefing)
장장 20시간의 비행 끝에 지친 몸으로 우리는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숙소로 향해 20시간쯤 자고 싶었지만, 곧바로 꼬로나방(Coronavin) 기차역 인근의 호텔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CRPD NGO연대’ 대표단을 비롯해 장애인법연구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단법인 두루 등에서 참여한 변호사 그룹까지 약 40여 명이 심의 대응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유엔과 전 세계 각국의 장애인단체들을 연결하는 ‘NGO 포컬 포인트(Focal Point)’ 역할을 하는 국제장애연맹(International Disability Alliance, IDA) 역시 회의에 함께했다.
이날 회의는 앞으로 한국 심의가 끝날 25일까지 약 나흘간 효과적으로 심의에 대응하기 위한 방향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시민사회가 직접 자신들의 의견을 위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비공개 면담(Private briefing)’이 바로 다음 날인 22일 월요일 오전에 예정되어 있었기에, 미리 배정된 발표자들 중심으로 원고를 점검하고 보완하거나 추가할 내용은 없는지 점검했다. 한정적인 비공개 면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발언자를 최소화하고, 발언 역시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정리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또한, 위원들이 한국 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제출한 다양한 보고서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을 질문하면, 이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고 명확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회의는 4시간가량 진행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첫날이 지나고, 드디어 심의 대응 공식 일정이 시작되는 22일 아침이 밝았다. 대응단 모두는 긴장과 설렘을 가지고 심의가 이뤄질 유엔 팔레 데 나씨옹(Palais des Nations)에 들어섰다. 첫 공식 일정은 ‘비공개 면담’으로, 국가인권기구(한국은 국가인권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이 위원회와 만나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위원들이 장애인 당사자와 협약 독립 감시 기구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핑크빛’ 정부 보고서에 담기지 않은 장애인의 삶의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이다.
여담이지만, 비공개 면담과 한국 정부에 대한 심의가 이뤄진 곳은 E동의 19호 회의실(Meeting Room XIX)로, 한국과 일본 참석 인원이 대규모라서 기존에 배정된 곳보다 더 큰 회의장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일본은 협약 서명 후 15년 만의 첫 심의였기 때문에 관심이 더욱 높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은 두 번째 심의인데도 시민사회에서만 40여 명이 참여하면서 협약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했으리라 생각한다.
이후 진행된 다른 모든 일정이 그랬지만, 비공개 면담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았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많이 긴장했을 텐데도, 정해진 발언자들 모두 3분여의 짧은 시간에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 장애여성, 정신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 이동, 노동, 장애인 가족의 반복되는 죽음 등 훌륭히 각자의 발제를 마쳤다.
비공개면담 장면
이어진 질의와 답변에서도 참여자들이 빠르게 내용을 확인하고 답변 순서를 정하면서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위원들의 질문도 쏟아졌다. 전 세계 장애인권 전문가들이 모인 만큼, 발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세심한 부분들에 대한 질문들도 많았고(이주민에 대한 장애인 복지 체계, 장애여성 운동과 주류 여성 운동 간의 관계, 읽기 쉬운 정보 제공에 대한 정부의 조치 등), 한국 장애계에서 오랫동안 투쟁해 온 이슈들에 대한 질문들(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상황, 선택의정서가 아직도 비준되지 않는 이유, 법무부의 장애인 차별 시정명령 이행 확보 대책, 통합교육 현황 등)도 있었다.
대응단은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최대한 구두로 답변하고, 이에 관한 구체적 통계나 답변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별도 문서로 작성하여 질문한 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메일을 보냈다. 우리의 간절함이 위원들에게 닿길 바라면서.
- 제네바에서 ‘해외 동지들’을 만나다
제네바에 간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국 정부 심의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현지에서 다양한 단체들과 만나고 교류할 기회이기도 했다.
가장 반가운 건 온라인으로만 만났던 ‘해외 동지’를 직접 만난 것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전 세계는 장애인, 그중에서도 집단생활 환경인 시설이나 요양병원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더 많은 피해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외면받는 것을 목격했다.
한국장애포럼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단계에서부터 국제 장애계와 ‘긴급탈시설’ 의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협력하며 연대를 다져왔다. 특히 코로나19 시기 이전부터 유럽 내 탈시설 운동에 앞장서 온 단체인 ‘발리더티 재단(Validity Foundation)’의 스티븐 앨런 대표는 각종 공개 토론회, 평창장애포럼, 한국장애포럼과의 내부 간담회 등을 통해 꾸준히 한국 장애계와 협력해온 ‘해외 동지’ 중의 한 명이었다.
운명적이게도(!) 한국 심의 대응단이 제네바에 체류하는 동안 스티븐 앨런 역시 제네바에 체류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드디어 만난 스티븐 앨런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지고, 확신에 찬 활동가였다. 스티븐은 한국의 뜨거운 탈시설 투쟁을 높이 평가하며, “유럽에서도 거리로 나간 장애인 당사자들의 활동이 탈시설 정책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활동을 통해 정책입안자들은 더 이상 태연하게 ‘사람들을 시설에서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당사자의 직접 활동이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아동, 특히 장애아동의 시설수용률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설 거주 아동들이 인근 다른 유럽 국가들로 피난했을 때 이들을 위해 또 다른 시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은 “시설이 존재하는 한 시설은 사람들로 또다시 채워지게 된다”라며, 우크라이나 시설 수용 아동들이 전쟁 이후에도 시설로 돌아가지 않을 방안과 더불어 인근 국가들에서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수용한다는 명목하에) 시설이 새로이 만들어지지 않을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중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스티븐은 “탈시설에 대해 아주 분명한 확신과 큰 관심이 있는 한국 장애계가 유럽 내 새로이 등장하는 시설화 문제에도 연대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익숙한 친구와의 반가운 만남뿐만 아니라, 새로운 동지와의 만남도 있었다. 한국과 같은 주간에 일본도 협약 이행 현황 심의를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은 협약에 2007년 서명했지만, 국내법 정비에 6년이나 걸리면서 2014년에서야 비준을 하여 140번째 협약 가입 당사국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 8월, 비준 이후 8년 만에서야 첫 심의를 받게 되었다. 서명 이후로 따지자면 무려 15년 만의 심의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의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각오는 정말 대단했다. 이번 심의에 시민사회에서만 100여 명이 참석하면서 심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심의에 참석한 일본 장애계와도 만났다. 일본 심의가 끝난 직후였기에, 무척 피곤하고, 여전히 남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한국 장애계와의 만남을 위해 감사하게도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국가와 마찬가지로 탈시설이 시급하고 중대한 이슈라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초반, 탈시설 요구가 크게 일어났으나, 탈시설의 속도가 너무 느려 사실상 제대로 탈시설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탈시설한 인원은 약 1만 6,000명에 그쳤고, 2014년 협약 가입 이후에도 탈시설은 점차 더뎌져 사실상 멈춘 상태라고 일본 활동가들은 전했다. 한국과 유사하게, 특히 정신장애인의 장기입원이 시설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정부가 탈시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나 의지가 없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료계의 정치력이 매우 강한 점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위원회 심의에서 “일본의 거주시설에서는 (시설에 높은 담장이 없기 때문에) 봄이면 벚꽃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시민단체들의 야유를 듣기도 했고, 일본 의사협회 회장은 “일본에서 정신장애인 치료는 의료가 아니라 ‘가축화(또는 길들이기, domestication)’”라고까지 이야기했다고 일본 활동가들은 전해주었다.
이웃 국가의 착잡한 현실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열정적으로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의지를 설명하는 일본 활동가들을 보며 새로운 국제 연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한국 장애계 문제를 알리고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한 권고를 목적으로 제네바에 갔지만, 우리와 같은 고민과 문제를 안고 고군분투하는 다양한 국가의 ‘동지’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투쟁을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사회로 확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호에 계속)
한국장애포럼 유엔심의대응단
*이 글은 <비마이너>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