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21주기
다시, 버스를 타자!
한명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데에 파견된 2년차 신입활동가.
노들야학 모꼬지 같이 갈 생각을 자주 하며 삽니다.
가끔 뒤돌아보면 있는 노들야학이 내 뒷배.
2001년 1월 22일, 설을 맞이하여 귀성한 장애인 노부부가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올해는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지 21년이 되는 해이며,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함께 오이도역으로 찾아갔다.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곳곳이 오이도역이었고, 그렇게 장애인의 일상은 생존을 걸어야 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를 뱉어내는 일은 언제나 쓰다. 가슴에서 수십년간을 맴돌다 나가서일까,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이상적인 말이어서일까. 다들 당연한 가치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기반을 만들어왔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물음에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답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이를 위해 50여년 전 누군가는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고 노동의 존엄을 외치며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그후로 긴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광주지역의 어느 장애청년은 파쇄기에 몸이 빨려들어가 사망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뱉어내는 호흡처럼 조그맣고 연약한 그 소리들을 해마다 외면한 대한민국 사회의 어제들이 모여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오늘을 만들었다.
21년 전은 서울 시내의 262개 역사 중 엘리베이터 확보 역사는 36개(13.74%)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리프트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리프트의 구조 자체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리프트는 사방이 뚫린 판에 3~4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휠체어와 장애인당사자가 앉은 채로 올라가 이동하는 시스템이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는 리프트는 수평이 맞지 않거나 갑작스럽게 멈추는 경우가 잦아 이용자는 추락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도 매번 호출을 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동할 수 있다. 재난은 하나의 얼굴만을 하지 않는다. 21년 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이후, 2002년 발산역(사망), 2004년 서울역(두부손상 등 중상), 2006년 회기역(갈비뼈 골절 증상), 인천신수역(사망), 2008년 화서역(사망), 2017년 신길역(사망) 등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사건들은 과도한 폭력으로 대답해왔던 이 땅, 대한민국 정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만 아니라 유아차를 동반한 사람, 계단을 걷기 어려운 노약자,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했던 누군가의 이동은 그렇게 막혀만 왔고 이 응답은 항상 누군가의 길을 막았고, 삶을 잃게까지 만들었다.
2001년 오이도역 참사 이후 한국사회 우리의 삶 속에 처음으로 ‘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장애인당사자 한 명 한 명이 스스로 권리를 선언했다. 다른 누군가가 손에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움켜잡아야 했고 서로가 손을 맞잡고 거리에 나가 외쳐야 했다. 장애인도 안정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동권이 그렇게 이 땅에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관계를 맺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것, 그 기본을 만드는 것이다. 이동권 선언 당시인 2001년, 전체 등록장애인의 70.5%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이후 이동권 선언의 현실화는 가속화되는 듯했다. 2005년에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하 교통약자법)이 제정되었고 ‘이동권’이라는 말이 백과사전의 신조어로 등록되기도 한다. 교통약자법 제3조(이동권)에는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동권은 보편의 권리이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과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길은 곧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20년 동안의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그러한 가치의 길을 만들어왔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정작 ‘대중’에 속해지지 않았던 자들이 외쳐서 온 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은 생존 투쟁이 되고 있다. 교통약자법에 따라 정부는 2017년부터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5개년 계획’을 세워왔지만, 저상버스 도입률은 10년 전에 이미 달성했어야 할 계획치—2011년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31.5%를 저상버스로 전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으로 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밤 12시가 지나면 특별교통수단의 운행이 중지되어 휠체어를 타는 이가 밤에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단 한 대도 없는 지역이 존재하고, 휴일에는 감축운행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이동하면서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도 여전한데 전국 지역 간의 이동권 차별을 없애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큰 과제인 셈이다. 이 문제가 결국 생과 사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살고자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교통약자법의 지난 21년 역사를 담은 듯 쭈그러진 선전물을 휠체어 뒤에 주렁주렁 달고 간다. 지하철이라는 ‘대중교통수단’으로 매일 이동하는 나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쏟아지는 이목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내뱉을 때도 있었다. 몸도 불편한데 밖에는 왜 나왔느냐고 하는 질문을 숱하게 받은 이들도 있었다. 그것이 내가, 우리가 지하철에서 매일같이 겪는 특별하지 않은 하루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동길이 될 것 같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이들이 많다. 비장애인 20명이 한꺼번에 이동한다고 해서 서울 도심에 불편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몇천명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별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20명이 한꺼번에 지하철을 타면 그것은 왜 불법이 되는가? 그리고 왜 그것은 누군가의 불편을 초래하는가? 우리는 ‘시혜’와 ‘동정’을 권리로 삼아 이동하는 중이다.
오늘은 지하철에서 생전 목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던 자들이 누군가의 불편을 초래하는 자를 자처하려 한다.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마이크를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권리를 내뱉어내는 날이다. 지하철 3개의 칸에 200여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 노래를 불렀고, 정책을 나누었으며 박종필 감독의 [버스를 타자] 영화를 감상했다.
정부는 예산을 이유로 권리의 확보를 유예했다. 대한민국 정부 곳간을 움켜쥔 기획재정부 장관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신들이 말하는 예산의 논리 속에 누군가의 생존을 향한 일상의 외침은 누락되어 있다고. 그러니 오늘은 여느 하루와 다르지 않지만 조금은 특별한 출근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