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 책꽂이
'집회'의 존재론 :
금지된 신체들의 출현과
'장소'의 재구성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들』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정창조
노들 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장판'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장애인 노동, 장애해방열사들과 관련된 사유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 박종필추모사업회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투쟁하는 장애인의 활동지원 노동을 하고 있다.
모든 장소에는 모종의 규범(norm)이 작동한다. 신체들은 각 장소에서 ‘적합하게’ 배치되어야 하며, 그와 함께 권력도 매 순간 재생산된다. ‘그곳’에서는 어떤 장면이 상연되는 것이 적절한가? 어떤 신체가 나타나야 하고, 어떤 신체가 나타나서는 안 되는가? 어떤 신체가 더 불안정해지며, 더 취약한 상태에 놓이는가? 모든 장소는 이미 답을 품고 있다. 터키 앙카라에서 트랜스젠더들은 거리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두들겨 맞는다. 어느 교실에서는 특정 유형의 장애인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상황이 펼쳐진다. 파리 광장 한복판에서 히잡을 두른 채 다니는 무슬림은 그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일상에 젖은 감각은 이 기이한(?) 장면들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신체들의 습관적 마주침 속에서, 모두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서 ‘출현해야 할 것’과 ‘출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매 순간 판별하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어느덧 모두는 각기 처한 장소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이 된다. ‘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 ‘subject’인 것이다. ‘나’는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신민(subject)이자, 매 순간 권력을 구성 및 재생산하는 주체(subject)다.
그럼 ‘장소들’은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버틀러의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들: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분투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분투 속에서 집회가 실현하는 자유의 가능성에 깊이 천착한다. 단,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일한 의지를 표명하는 인민(people)의 집회가 아니라, ‘인민’의 경계가 열린 다양한 신체들의 복수성(plurality)이 인정되는 집회에서 말이다.
버틀러가 복수성의 공간에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동안 특정 장소에서 출현 자체가 금지된 신체들이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 장소의 “물질성이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장애학에 따르면, 모든 신체는 여타 권리들을 실행하기 위한 전제조건”(201쪽)이 되는 이동을 위해서 어떤 지지 기반들을 필요로 한다. 접근 가능한 길과 저상버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지하철역, 장애인 콜택시, 휠체어, 목발, 보청기, 안경, 렌즈, 약물과 타인의 돌봄 등.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자기 외부의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타인들 앞에 나타날 수 없다. 한편, 누군가의 출현을 가로막는 법적·제도적 조건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그 신체는 그곳에서 앞으로도 마냥 취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출현’을 가로막는 외부적 조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며, 타인들 앞에 출현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정치적 사건이 된다. 버틀러가 한나 아렌트의 입을 빌려, 출현이 금지되어 온 이들이 “행위하게 만들어주는, 혹은 우리 행위의 주요한 요소가 되는 바로 그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 투쟁”(108쪽)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심지어 이런 투쟁 공간은 향후 세계가 나아가야 할 지향을 이미 그 안에서 실현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시민권을 요구하며 영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모어로 미국 국가를 부르는 ‘미국 영토 내’ 장소는 어떠할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지하철의 운행을 막아선 장애인들이 꾸린 장소는? 광장과 거리를 메운 퀴어 퍼레이드, 첨단의 건물들 옆에 차려진 비정규직 노동자·빈민들의 허름한 천막은?
이 책의 고민들은 ‘집회의 장소’들이 갖는 의미와 가능성은 물론이고, 집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신체들의 존재 조건을 면밀히 파고들기에, 그 자체로 ‘집회의 존재론’(특히 소수자들의 집회의 존재론)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또한 만약 ‘정치’가 흔히 오해되듯 직업 정치인들의 의사 결정 과정, 희소가치에 대한 제도적인 배분 따위에 한정되지 않고, 이 세계에 대한 공적 염려와 참여 과정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신체들의 상호작용이자 자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이라면, 이 ‘집회의 존재론’은 그 자체로 ‘정치학’이라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행위가 수행되느냐에 따라 기존과 다른 장소성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억압과 배제란 특정 신체의 ‘정해진 본질’ 탓이 아님이 드러난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몇 차례 자신이 장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언급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버틀러의 입장은 장애학자들이 이미 적극적으로 수용한 내용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애인의 신체가 받는 배제와 억압들은 손상을 입은 신체의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본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종의 수행성(performativity)에 따른 효과일 수 있다.
‘수행성’이란 번역어가 다소 난해할 수 있지만, ‘performativity’는 말 그대로 ‘상연’과 관련되어 있다. 버틀러는 수행성을 “발화 순간에 무언가를 일어나게 하거나 어떤 현상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언어적 발화의 특성”(43쪽)이라 규정한다. 예컨대 탄생의 순간 누군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타인 내지 제도가 호명·기입함과 동시에, 그 존재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써 모든 이들은 자신을 호명하는 남성 혹은 여성의 특징을 사회가 기대하는 그대로 상연해야 하는 책무를 갖는다. ‘중립적·과학적 규정’처럼 보이는 발화·호명이 누군가에게 정해진 젠더 기준에 맞춰 매 순간 자기 신체를 상연할 것을, 즉 타자들 앞에서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것을 독촉받는 것이다.
‘장애인/비장애인’에 대한 호명과 기입도 마찬가지다. ‘장애인’들이 이동권의 완전한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 시위 탓에 어느 ‘비장애인’이 할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고서, 혹자들이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악마화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악마화에서는 장애인의 이동을 가로막는 외부적 조건 탓에, 어떤 장애인들은 그동안 친족의 임종을 지킬 수 있는 조건 자체가 가로막혀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상기되지 않는다. 이는 ‘장애인은 (생물학적으로) 몸이 불완전하다’는 ‘발화’와 함께, ‘애초에 장애인은 이동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즉 시위에 참가한 장애인에 대한 ‘악마화’란 곧 장애인이 이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규범적 반응 중 하나다.
그러나 사실 ‘악’이란 ‘지하철에 누구와 함께 머물 것인지를 결정’하는, 그러므로 실은 ‘누가 그곳에 함께 머물 수 없는지를 암묵적으로 결정’하는 그 장소의 규범에 따른 수행성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인간 삶에 주어진 ‘함께 거주하고 있음(cohabitation)’의 조건을 부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동안 끊임없이 누군가의 삶을 앗아 왔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나치 공무원 아이히만 역시 유대인 학살에 공모할 때, 비슷한 논리를 품고 있었다. 버틀러는 이런 차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살 수 없는지에 대한 그 어떤 선택도 대량 학살을 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164쪽).
이렇듯 각 신체의 생물학적 조건은 항상 각 시대의 역사적 조건과의 작용을 통해서, 그리고 수행성 속에서 구성된다. 외따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본질은 없다. 몸이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한, 몸은 그 자체로 철저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버틀러가 다른 몸들이 출현하는 집회 자체가 기존의 수행성이 가능했던 권력관계의 지형도를 바꿀 수 있다고 본 것도 그래서다. 억압받았던 자들이 기존에 부여되었던 자신의 역할과 다른 것들을 집회를 통해 상연할 수 있을 때, 그 수행의 효과로 그 사회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상연은 꼭 언어의 형태로 나타날 필요도 없다. 때로는 침묵과 단식이, 때로는 말 없는 점거가, 비장애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장애인의 외침과 아무 말 없이 지하철 문을 막아서는 몸짓들이 그 자체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정치 행위가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딱히 집회에서 거창하고 위대한 행위를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시도할 필요도 없다. 어느 장소에서 출현이 금지되어 온 이들이 “그저 거리를 걷는 것, 그런 사소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 때로는 특정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 된다.”(202쪽).
취약한 자들의 윤리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정치적 행위로서의 집회가 기존의 권력관계를 바꿔낼 수 있더라도, 인간이 삶과 미래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는 이 인간 조건의 한계 탓에 결국 불안정하며, 취약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불안정성, 취약성은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향후 더 강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의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혹자들이 오해하듯)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다. 상호의존은 언제든 ‘예속의 조건’이 될 수 있으며, 자유를 향한 몸짓들이 도리어 향후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지금의 학살과 전쟁, 착취, 시설수용 등 역시 실제로 인간이 상호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아닌가?
버틀러는 그렇다고 해서 상호의존 상태를 완전히 극복할 것을 촉구하거나, 취약성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지는 않는다. 버틀러가 아렌트를 인용해 말하듯, 애초부터 함께 살아갈(cohabitation)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서 그것은 도무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오히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취약성을 인정하며, 그 취약성이 광범위한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서로 간 의존성의 연대의 에토스를 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연대의 에토스를 꾸리는 것도 좋고, 복수성이 인정되는 공간을 꾸리는 것도 좋은데, 왜 그 소중한 시도들은 ‘단일자’로서의 인민의 주권적 의지에 그리도 쉽게 패배하곤 하는가? 출현이 금지되어 있던 기존의 장소에 기를 쓰고 출현하려 하는 행위들조차 왜 대중들 대다수에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가? 버틀러뿐 아니라, 상호의존성에 기반한 윤리학을 고수하는 이들은 대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심스레 회피한다. 여전히 그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버틀러가 추구하는 윤리학/도덕철학의 전제들은 앞으로의 ‘집회’들을 더 확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삶은 방대한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고, 만약 그것이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사실상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의 삶은 내 것이 아닌 삶, 단지 타자의 삶이 아닌 더 넓은 사회적·경제적 삶의 조직에 의존한다”(301쪽). ‘나의 삶’이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내가 잘 산다는 것/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심지어 내 신체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존재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관계 속에서 나의 행위를 고민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혜화역(동대문역 방면) 승강장 5-3은, 노량진 수산시장 앞 육교는, 용산정비창은, 복직을 한 김진숙과 여전히 복직하지 못한 김진숙들은, 한반도 동부지역의 산불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은 왜 ‘나’의 삶이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