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비마이너
가난한 자, 불쌍한 자, 위험한 자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서구 장애의 역사에서 중세는 독특한 시기다. 장애 관념은 시대마다 독특하기에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중세를 독특한 시기라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세에는 장애 관념이 없었다. 앙리-자크 스티케(Henri-Jacques Stiker)는 『장애: 약체들과 사회들』(그린비, 2021)에서 이렇게 썼다. 장애의 역사를 탐구하는 이들은 중세에 이르러 “역사의 긴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고.
그러나 침묵이 의견을 표하는 일이고, 누군가의 빈자리가 그의 존재를 보여주는 일일 때도 있지 않던가. 중세적 장애 관념의 독특함은 여기에 있다. 장애에 대한 중세의 침묵과 부재는 장애에 대한 발언이자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장애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았다는 데서 중세의 독특함을 읽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스티케에 따르면 서구의 중세는 장애아의 탄생을 신의 경고로 해석했던 고대 그리스와 달랐고, 정상과 비정상을 낮과 밤처럼 나누었던 근대(고전주의 시기)와도 달랐다. 중세적 ‘정상성’은 단색이 아니라 다색이었다. 오늘날 장애인으로 묶이는 다양한 사람들은 여러 색깔들 중의 하나에 해당했고 그런 한에서 ‘비정상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애인들이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장애인들은 사회의 변두리에 자리한 ‘가난한 자’의 무리 속에 있었다. 불구자, 병자, 부랑자, 극빈자 등이 뒤섞인 무리였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신의 뜻에 따라 존재하며, 기형의 인간일지라도 신이 지휘하는 “거대한 심포니”에는 꼭 필요한 소리라는 게 중세인의 사고였다. 게다가 중세적 사고의 근간인 성경은 (장애 관념이 포함된) 가난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복음서들은 구원의 길이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에게 더 넓게 열려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교부와 성자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청빈하고 금욕적인 삶을 일종의 이상으로 찬양했다.
이 점에서 브로니슬라프 게레맥(Bronislaw Geremek)은 『빈곤의 역사』에서 중세 사회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계명”을 가졌다고 했다. 하나의 계명은 자기부정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요구이다. 신의 아들이면서도 권력과 부를 버린 예수처럼 자발적 가난과 고행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계명은 빈민을 구제하라는 요구이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부자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이 세상에 빈민들을 존재하게 하셨다.” 부자는 빈민에 대한 적선을 통해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양립할 수 없다. 첫 번째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부를 포기해야 하지만, 두 번째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부자들은 대부분 첫 번째 길로 가지 않았다. 그 길은 소수 영웅들의 길이었다. 다수의 부자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후자의 길이었다. 더욱이 후자의 길은 부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해석을 가능케 했다. 신이 “부자를 속죄하기 위해 빈민을 두었다”는 말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부자를 두었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으면 부자는 신의 빈민 구제 사업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 적선을 통해 부자는 영혼의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를 정당화하고 미화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에 대한 미화가 가능하다면 가난한 자에 대한 경멸로 나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리상으로는 가난이 찬양의 덕목이었지만, 현실의 빈민은 부자의 적선에 의존하는 ‘불쌍한 자’에 불과했다.
왜 부자의 적선이 빈민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었는가. 일단은 중세 기독교의 빈곤에 대한 찬양이 영적인 것이었지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발적 가난 및 고행에 나선 사람과 현실의 빈민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게레맥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의복과 삶의 방식 등의 외적 유사성 때문에 사람들은 이따금 성인(聖人) 개념을 빈민들까지 확장”하였지만, 실제로 “자발적 가난의 찬미자들과 빈곤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었다”. 기독교 교리에 따라 자발적 가난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숲속의 은자가 될지언정 빈민과 어울려 살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청빈하고 금욕적이었지만 그들의 수도원은 부유했다. 그들의 청빈과 금욕은 개인적인 삶의 결단이었지 빈민들과 나눔의 실천이 아니었다.
물론 예외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그랬다. 그는 정말로 가난한 자들 ‘처럼’ 살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의 공동체에서 세상 구원의 길을 찾고자 했다. 중세의 주류 집단은 그의 행동을 위험천만한 짓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적선이 아니었다. 스티케에 따르면,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도 아시시 당국도 그의 행동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적선 시스템은 부자와 가난한 자, 동정하는 자와 동정받는 자의 구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프란체스코의 행동은 이 구분을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세의 적선이 교회만 살찌우고 빈민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적선 시스템이 가능하려면 ‘가난한 자’가 ‘불쌍한 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가 동정의 대상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프란체스코의 행동은 가난한 자를 선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중세의 적선 시스템은 중세 후기 곳곳에서 일어난 가난한 자들의 봉기로 고장나버렸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일어서자 적선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자’가 ‘불쌍한 자’에 머무르지 않고 ‘위험한 자’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신비로운 찬미는 사라졌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
점차 가난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현실의 치안 문제가 되었다. 대체로 15세기 이후부터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분이 치안(security)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노동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이 중요해졌다. 노동할 수 있는 자는 노동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도록 훈육되었고, 노동할 수 없는 자는 진정한 동정의 대상,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나 존엄성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로 전락시켜버렸다. 이렇게 해서 다른 가난한 자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존재, 또 노동과의 관계가 끊어진 존재로서 장애인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가 끝났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내가 이 짧은 글에 중세 장애의 역사를 일별한 것은 우리 시대에도 그것의 잔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생겨난 진동도 현재의 사물을 흔들 수 있듯이, 적선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장애와 관련해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한다. 교회나 사찰 등 종교 기관이 운영하는 시설들에는 적선 시스템이 아직도 작동한다. 적선을 통해 부자들은 마음의 구원을 얻고, 시설은 부를 얻으며, 불쌍한 자는 삶을 얻는다. 다만 불쌍한 자가 얻는 삶이란 불쌍한 자의 삶이다.
우리 사회 장애인 시설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적선 시스템은 현재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도 중세의 시스템이 무너진 이유와 같다. 적선의 대상인 장애인들이 감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가 ‘불쌍한 자’로서 연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위험한 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