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아 안녕
취중고백
임미경
‘아,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어두운 방 한쪽으로 햇빛이 밝아오면서 어렴풋이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술 몇 잔에 취했던가? 자기소개는 또 얼마나 호기롭게 써제낀 것인가...
사표를 냈음에도 놔주지 않는 전 직장에서 또 다시 코로나로 쪼여오는 압박에 스트레스 받으며 남몰래 새로운 일과 직장을 알아보느라 마음만 고되던 어느 날 밤,
혼술 하면서 여느 때와 같이 인터넷을 어슬렁거리는데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덜컥 눈앞에 나타난 ‘노들장애인야학’이란 곳에 교사지원을 해버린 것이다.
이대로는 이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괴감이었을지, 이제 더 이상은 당장 직장이 없더라도 눈앞의 돈보다 정말 하고 싶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게 먼저라는
알량한 취기였을지, 일복을 자처하면서 스케쥴을 꽉꽉 채워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버릇 탓일지 아직도 그 날의 용기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불 킥을 몇 번이나 날리고 여전히 드러누워 지난 날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몇 번의 충동적 순간들을 떠올렸다. 어떤 것은 나름 잘 한 것도 있었지만 어떤 결정은 남겨진 시간을 후회와 책임감으로 메꿔가며 꾸역꾸역 버틴다는 기분으로 살아오게 했기에 과연 이 결정은 앞으로 어떤 기억으로 기록될지 걱정 반 기대 반이 되었다.
그러나 두근두근 떨리던 내 기대와는 달리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일 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없었다. 괜시리 멀리서 동경하던 짝사랑한테 취중고백하고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모르는 전화가 왔다. 개학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셨다. 아, 그랬구나. 히히.
면담하기로 한 날 마로니에 공원을 가로지르며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만약 장애인 학생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움찔하거나 놀란 표정이
얼굴에 스쳐 지나가 불편하게 해드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도착해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중증장애인이라는 것과 연세가 많으시다는 것에 저으기 놀랐다. 가장 놀란 건 2층을 가득 메운 코로나도 막지 못한 학구열? 아니 출석률이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써왔던 자원봉사라는 말 대신 자원 활동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도 머리를 망치로 맞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면담 후 당장 참여할 수 있는 수업 보조 활동도 의미가 있지만 1학기 참관을
시작으로 2학기부터 수업할 수 있는 신입교사 과정을 선택했다.
언젠가는 학생들과 플레이백씨어터 수업도 하고 싶고 오랫동안 생업이었던 수학을 ‘가르치는 건’ 나름 자신이 있어서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참관 수업 후 나의 이 ‘가르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깨달았다. 수업해야 할 내용, 전달하는 방법, 학생들의 상태까지도 전부 새롭게 공부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 하루 참관을 할 때마다 학생분들의 이야기와 표정에서 배우는 것이
엄청 많았다. 뭉클한 날, 즐거운 날, 참관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마치 우키요에의 파도처럼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의 파고가 한껏 높아지곤 했다.
6월 길라잡이 교육 때는 지금껏 모르고 혹은 외면하고 살아온 사회의 민낯을 들춰볼 수 있었고 그럼 내게 남은 날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한 번 더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지금이라도 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어 수업을 시작한 요즈음.
아직도 수업 전에 긴장은 되지만 수업을 할 때마다 설레고 마냥 기분이 좋다.
10월 ‘평등한 밥상’을 앞두고는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하면 학생 분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한다.
노래를 해볼까? 시 낭송을 해볼까? 같이 예술 한번 하자고 하면 받아주실까?
어쩌면 그 날엔 다시 또 취기를 빌려 한 번 더 고백을 할지도 모르겠다.
노들을 만나서 정말 행복하다고.
문득 노들에 온 첫 날 본 문구가 떠오른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