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은 사랑을 싣고]
지리산 마을에 자리잡은
최근정 님
진행, 정리 김유미
최근정 쌤을 처음 만난 지 십년쯤 된 것 같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야학에 자원활동하러 온 모습이 참 새로웠습니다. 어떤 힘이 그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근정쌤에 대한 궁금함이 뒤늦게 생겼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고, 근정 쌤 가족은 네팔로 떠났습니다. 종종 메일로 네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러다 몇 달 전 다시 한국에서 연락을 해온 근정 쌤은, 야학에 양파와 감자를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온가족이 지리산 실상사 마을에 왔고, 거기서 직접 농사지은 것들이라고요. 반가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1. 저는 근정 쌤이 아기 ‘린’이를 안고 야학 교사회의에 오셨던 기억이 나요. 처음 야학에 오셨을 때, 기억을 나눠주세요. 언제 어떤 계기로 오셨는지요.
저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다 해봐야 열 댓 가구도 안 되던 우리 마을에는 한 쪽 눈이 안 보이는 상철이의 할아버지가 계셨고 말이 어눌했던 종규 삼촌, 아이처럼 굴었던 뒷집 어른 창호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저는 제 오빠가 있었고요. 욕 잘하던 미애 할머니나 한쪽 눈이 먼 상철이 할아버지가 서로 달라 보인 적 없었고 몸도 불편했던 종
규 삼촌과 경운기를 잘 몰던 은정이의 아버지가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습니다. 서로 섞여 살고 잘 돕던 마을에서 자란 덕분에 함께 도우며 사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라면서 좀 미안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제가 오빠보다 잘 뛰는 게 좀 미안했습니다. 우리집 강아지, 오빠, 저 이렇게 셋이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저는 일부러 오빠보다 못 뛰는 척 해서 오빠가 2등이 되게 한 적이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오빠는 뛰고 싶어도 아픈 다리 때문에 못 뛰는 거니까 그렇게 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제 마음이 그랬어요. 말썽부려 혼나거나 도시락을 못 싸오거나 공부를 못 따라오는 그런 친구들이 늘 마음이 쓰였어요. 어려서 잘은 몰랐지만 왠지 그건 그 친구들만의 잘못은 아닌 거 같았고 뭔가 함께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고 어렴풋하게 생각이 들곤 했어요. 어른이 되어 이런 저런 일도 하고 공부도 좀 하면서 어렸을 때 제가 했던 그 생각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걸 알았고 또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삶의 연장이 노들을 찾게 했던 거였어요. 제가 살던 낙산 마을 바로 아래 노들야학이 있다는 걸 알고 아장아장 걷던 린이를 유모차에 태워 삼십 분을 밀며 닿았던 곳이 바로 노들야학이었어요.
2. 아기 ‘린’이는 지금 몇 살이 되었나요?
린이가 여전히 아기일 때 네팔로 가셨던 것 같아요. 네팔에선 얼마나 계셨던 건가요?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최 린은 이제 열 살이 되었습니다. 린이가 세살 때 우리 가족은 네팔로 갔어요.
저는 네팔 카트만두에서 NGO와 학교에서 일을 했습니다.
네팔에는 한국 NGO 30여 단체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저는 청소년 교육, 지역민 의료, 한국어 교육을 했습니다.
또 한 동네에 몇 년을 살다 보니 그 마을이 조금씩 보였는데 부모들이 돈 벌러 나가야만 하는 집 아이들은 자주 길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일 나간 엄마를 해바라기처럼 기다리던 아렵, 아려따 오누이
나 뿌자, 루자 자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던 염 엄마나 자신의 문자를 가지지 못한 문맹자로 빨래와 설거지로 20년을 산 우르밀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결혼 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사 놓았던 자그마한 땅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단칸방보다 넓다며 도서관에 와 뛰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해,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네팔은 무려 다섯 달 동안이나 나라 전체가 봉쇄 되어 아이들 학교는 물론 어른들도 밥벌이가 아주 어려운 사정에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 청년들과 함께 노숙자 무료급식을 한 달 반 정도 하였고 동네 아이들 간식을 아침마다 해서 날랐습니다, 그 때는 한국의 제 지인들께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주신 4백여 만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2015년 4월의 네팔 강진 때도 한국에서 해주신 모금 덕분에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동네를 찾아 쌀, 소금, 콩, 홍차 등을 나눴는데 그 때 노들 야학에서도 큰돈을 모아 보내주셨습니다.
그 때 아주 고마웠습니다.
3. 최근에 다시 한국에서 연락을 주셔서 놀랍고 반가웠는데요. 요즘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희는 여기저기서 사는 게 어렵지 않은 가족^^입니다. 어디든 솥단지를 걸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사는데 셋 다 아픈데 없이 건강한 덕분에 그럴 거예요. 고마운 일입니다.
최 린은 이제 산내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린이가 세 살 때 네팔로 떠났다가 일이년에 한 번 한국에 다니러 오곤 하다가 최근 코로나로 네팔에 있기가 어려워져서 저희 가족 셋이 모두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되었어요. 지금 살고 있는, 사방이 산이고 특별히 지리산의 품안에 있는 산내 마을은 어찌 보면 네팔 같기도 하고 제가 나고 자란 고향 마을 같기도 합니다. 알게 모르게 제 마음엔 산으로 둘러 싸인 이런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저는 산내 마을에 있는 실상사라는 절의 공양간에서 일합니다. 절의 부엌을 공양간이라고 하더군요. 실상사는 스님들과 일반 활동가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곳입니다. 손 모내기도 하고 감자나 고구마, 양파, 콩, 고추 등 여러 농사를 지어 웬만한 건 자급자족합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씩 수행의 날이 있어 공부하며 수행하는 삶을 삽니다.
이곳에서 함께 일하며 수행하는 삶이 제겐 맞춤합니다.
4. 야학으로 농사지은 감자와 양파를 한 상자 보내주셔서 맛있게 나눠먹었어요. 농사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보내 드린 양파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실상사공동체 농장에서 함께 농사 지은 양파예요. 제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엔 스님들, 재가자들이 모두 모여 운력을 합니다. 그 중 농삿일이 큰데 봄엔 모, 고추 등을 심고 여름엔 양파며 감자, 고추를 수확합니다. 저야 농사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함께 따라하며 배우고 있어요.
하루는 모내기를 마친 논 한 귀퉁이에 허옇게 뜨는 게 있어 그게 무엇일지 알아 맞혀 보라는 퀴즈를 저희 공동체 농장 담당하시는 분이 카톡방에 올렸길래 제가 답을 올렸더니 정답은 아니었지만 성의가 고맙다며 양파 한 자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희집엔 이미 양파가 있어서 이걸 어디에 보낼까 잠깐 생각하다가 저녁 한 끼를 위해 투쟁하시던 노들야학이 생각나서 보냈습니다. 약 친 것 하나 없는, 맛있는 양파를 노들 야학 사람들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맛있고 좋은 음식을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도 골고루 잘 먹을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5. 근정쌤에게 노들은 어떤 곳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해요.
그 때, 장애학 공부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유모차에만 있지 않으려는 두 살바기 린이가 있었기에 망설여졌었어요. 그 때 노들야학의 교사들께서는 아무 상관 없다며 린이와 함께 와서 편하게 수업에 참가해도 된다고 했어요. 린이는 자주 아장거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저는 그러한 ‘허용’을 감사하게 느끼며 노들을 드나들곤 했어요.
휠체어에 탄 어른이 유모차에 탄 린이의 손을 잡아 주기도 했고 린이는 휠체어의 바퀴를 밀어봤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네팔로 떠났어요.
뭐랄까요..정들 시간도 없이 헤어져 버린 아쉬움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마음 같은 게 있어요.
6. 노들 사람들이나 이 <노들바람>을 보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전해주세요.
린이네 학급 문고에 꽂혀 있던 책 중에 박경석 교장선생님 사진이 나온 게 있었나 봐요. 친구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이고 만난 적도 있고 팔씨름도 같이 했다.’고 말했지만 친구들은 믿지 않았다고 해요. ‘이 분은 자신을 괴물이라고 했다.’라는 말까지 했는데도 친구들이 안 믿어줘서 속상했다며 우리가 박 교장선생님을 만난 게 진짜 맞지 않냐며 제게 확인을 한 일이 있었답니다.
제가 만난 세상과 린이가 만날 세상이 같아서 좋은 것도 있겠지만 달라져야 좋은 게 더 많은 거 같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노들 사람들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야학을 이끄는 그 때의 은전, 신행, 유미, 사랑, 준호 같은 분들이 고맙고 이름을 거의 알지는 못 하지만 얼굴을 보면 기억이 날 거 같은 야학의 학생들께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살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온기가 전해지고 사랑이 느껴져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