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사진전 |
장애인이동권 투쟁, 20년의 기록
제3조(이동권)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
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2005. 1. 27. 제정]
[2006. 1. 28. 시행]
이동권_2021년 종로1가 버스정류장.
활동가들이 버스의 이동을 막고 버스 위에 올라가거나 버스 옆에 서서
'비장애인만 타는 차별버스 OUT' 현수막을 들고 있다.
2001
2001년 8월 2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네 시간의 버스 점거 투쟁.
활동가들이 버스 위에 올라가 _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_ 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버스 창문에도 버스 타고 싶다는 글자가 한 글자씩 붙어있다.
photo by 최병선
2002년 장애인이동권연대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국가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이 보장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판사들은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똑똑한 사람들’이 ‘그 두꺼운 법전’을 몇 날 며칠씩이나 뒤져서는
고작 밝혀냈다는 사실이 ‘장애인이 이동하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국가의 책임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애인이 탈 수 없는 버스는 ‘합법’인데 버스를 막은 장애인은 ‘불법’인,
그것이 법이었다. 장애인을 배제하고 내달리는 전철은 보내주고
거북이처럼 느린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그것이 질서였다.
평생 ‘법’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어길 것도 없었던 삶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서지 않는 그것들을 붙들기 위해
장애인들은 도로로 뛰어들고 선로를 점거했다.
버스를 세우고 지하철을 막았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언제나 경찰들만 달려와 시위대를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사람들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휠체어와 몸을 쇠사슬로 묶었고, 다시 서로와 서로를 연결했다.
그것은 이동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평생토록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채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늘어나 수십이 되고 수백이 되었다. 그러자 그들 사이를 잇고 있던 사슬은 질긴 담쟁이가 되어
억압과 질곡의 벽을, 법과 질서의 벽을 집요하게 타고 넘기 시작했다.
이동권 투쟁은 지하철 연착 투쟁, 버스 타기 투쟁, 선로 점거, 버스 점거,
도로 점거, 쇠사슬 시위, 단식 농성 등의 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3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던 100만인 서명운동은
집안에서만 지내던 중증장애인들이 대중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었고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2005년 1월, 마침내 이동권을 인권의 관점에서 명시하고
저상버스를 의무화한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다.
비로소 전국의 수많은 장애인들을 위한 길과 이동수단이 마련된 것이다.
『노란들판의 꿈』, 홍은전, 봄날의책, 2016
2001년 10월 31일 서울 종로. _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_ 6차 행사 중
경찰이 행사를 막자 장애인 활동가들이 도로로 나가 버스 운행을 막아서고 있다.
photo by 최병선
2001년 서울 광화문역. 「장애인이동권 보장하라」라고 적힌
선전물을 몸에 걸치고 발언하는 박경석 당시 장애인이동권연대 대표
photo by 이창길
2001년 서울역. 활동가들이 장애인추락사고가 빈번히 발생한 지하철역
휠체어리프트를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박경석 대표가 휠체어리프트를
붙잡고 발언하고 있다. photo by 최병선
2001년 서울역. 지하철역 벽과 바닥에 스프레이로 「더이상 죽을 수 없다!
장애인이동권 보장하라!」 등의 글자가 쓰여 있다.
전동휠체어를 탄 활동가가 바닥을 바라보며 있다. photo by 차진호
2001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역(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환승장.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위한 서명전. photo by 이창길
2001년, 서울 종묘공원. 장애인 활동가가 버스정류장에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라고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photo by 차진호
2002
2002년 8월 29일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발산역 휠체어리프트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한 서울시장의 공개사과를 촉구하는
단식농성장을 지키는 한 장애인 활동가. photo by 차진호
2002년 9월 11일 서울 시청역.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지하철 운행을 막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by 이창길
2002년 9월 11일 서울 시청역.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지하철 운행을 막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by 이창길
새로운 학생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이동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야학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낳았고 이 열망은
다시 이동권에 대한 요구를 낳았다.
그러던 중 지하철역 리프트에서 야학 학생 한 명이 추락하는 일이 일어났다(또 다른 역에서는 장애인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 일은 배움에 대한 열망과 이동권 제약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야학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때부터 노들야학은 본격적인 길거리 투쟁에 나섰다.
학생과 교사들은 버스를 가로막았고 철로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학교조차 갈 수 없다는 것,
사회 전체를 새로 배우게 하지 않고서는
야학에서의 작은 배움도 불가능하다는 것.
『묵묵(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난 배움의 기록)』, 고병권, 돌베개, 2018
2002년 종로.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 참사 1주기 집회.
휠체어를 탄 장애인 4명이 목에 사다라를 걸고 행진 대열을 이끌고 있다.
photo by 최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