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청년노동자 故김재순의 아버님,
김선양 동지와의 1박 2일 투쟁기
정창조
노는 게 제일 좋지만, 차마 놀지 못하고 여러 활동을 한다. 자는 게 제일 좋지만, 깨어있어야 하는 게 괴롭다.
다음 학기 노들야학 복직을 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될까 의심이 들어서 우울하다.
5월 28일 오전 10시,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위반 및 과실치사로 기소된 조선우드와 조선우드 사업주 박상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이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조선우드는 작년 5월 22일 장애인노동자 김재순이 노동을 하다가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은 곳이다. 사고 당시 비상정지 장치인 리모컨도 없었고, 2인 1조 작업도 지켜지지 않는 등, 산안법상 안전조치는 전혀 없었다. 장애인을 고려한 노동 조건? 당연히 마련되어 있었을 리가 없다.
1심 선고 날 새벽, 나는 광주로 향했다. 겨우 제 시간에 맞춰 광주지방법원에 도착하니, 김재순의 아버지 김선양 동지가 금속노조 동지 한 분과 함께 “살인기업 조선우드 사업주를 법정 구속해 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쓰인 피켓을 들고서 출근투쟁을 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면서도 장기 휴가를 내고, 2주 째 이어온 출근 투쟁이다. 5월 내내 각종 투쟁 현장들에서 유난히 많이 만나고 통화도 자주했던 터였건만, 날이 날인지라 만남이 영 어색했다. 자식의 죽음 후 1년 여 간 투쟁해 온 이에게는 이런 날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 걸까? 별 수 없이 김선양 동지와 함께 조용히 피켓 시위를 이어가다가, 재판 전에 담배나 한 대 함께 피자는 제안에 법원 옆 골목길로 그를 따라나섰다.
“긴장되시죠?” 물으니, 김선양 동지는 그제서야 허허 웃으며 “참 그르네요. 잘 되어야 할텐데...” 끝말을 흐렸다. 그렇게 곧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코로나19를 핑계로 기자들은 물론 함께 연대 온 동지들 대부분이 재판정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긴장된 순간들이 재판정 바깥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몇 분 후, 드디어 재판정 문이 열렸다. 김선양 동지는 경직된 걸음걸이로 쭉 걸어 나와선 벽을 살며시 내리쳤다. 그 때 살포시 울려 퍼지던 충돌음과 김선양의 꽉 진 주먹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다. 눈치 없이 성실하기만 한 기자들이 건조하게 재판 결과를 물어왔지만,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재판정에 들어간 변호사와 한 동지만이 조용히 재판결과를 기자들과 바깥 동지들에게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업주 박상종 징역 1년 법정구속, 조선우드 벌금 1천만원.’
산안법 위반 등, 산재 죽음으로 인한 재판에서 사업주가 법정구속을 당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또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첫 사업주 법정구속이라 의미가 있는 결과긴 했지만, 지난 3월 내려진 구형 징역 2년 6개월에 비하면 가벼운 형량에 불과했다. 그리고 김선양이란 사람에게 그것은 곧바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을 게다. 그는 재판 후, 내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의미있는 결과죠. 정말 의미있는 결과죠. 아마 노동운동하는 분들이나 장애인운동 하는 분들이 함께 안 싸워줬으면, 나 혼자서는 못 얻어냈을 성과에요. 그런데 그 새끼. 박상종 이 새끼. 사과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저 자식 죽여 놓고 빠져 나갈 궁리만 해요. 저게 사람입니까? 6년 전에도 유사한 사고가 일어났던 공장인데 말이죠. 그 상황을 그대로 둬서 사람을 또 죽게 둬요? 사과를 안 하니 도무지가 용서할 래도 용서할 맘이. 하.”
그의 어깨가 오랫동안 떨려왔다. 걸음걸이는 재판정 들어가기 전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눈물은 흐르지가 않는다고 했다. 비단 이번 사건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다 보니 눈물 자체가 말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김선양 동지는 참 고단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안정하고 위험한 노동을 여럿 경험한 바 있고, 안정적으로 한 현장에 머문 것도 그리 길지 않다. 산재로 아들을 잃은 본인 역시 산재로 인하여 손에 장애를 입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참 오해를 하더라고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게 슬프지 않다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닌 건데. 내가 웃기라도 하잖아요? 그럼 또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 봐요. 밝은 모습 보이는 거 보니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나.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럼 언제나 울상이어야 하는 건가? 아니잖아요. 즐거운 때도 있어야 계속 싸울 힘이 생기지. 산재 유족들과 제가 자주 만나서 모임도 하고 연대활동도 하고 그러는데, 산재 유족들에 대한 그러한 시선에는 진짜 문제가 있어요. 나쁜 놈들이 그런 시선이 발생하도록 유도하는 걸 수도 있고.”
그에게 김재순 싸움이란 어느덧
장애해방, 노동해방 세상을 위한
싸움이 되어 있었다
변호사, 금속노조 동지들과의 잠시의 대화 후, 그리고 짧막한 간이 기자회견 후, 경직된 걸음걸이로도 그는 유난히 서둘렀다. 아직 기차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아마도 오늘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장 연대를 하러 떠나야만 한다는 각오가 서 있던 탓일 게다. 하긴 며칠 전부터 내게 재판이 끝나는 날에 자기는 꼭 세종시 투쟁에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세종시에서는 각종 장애인 권리 요구들과 함께, 누리콜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김선양에게 이미 김재순 싸움은 김재순 한 명의 죽음에 대한 처벌의 싸움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김재순 싸움이란 어느덧 장애해방, 노동해방 세상을 위한 싸움이 되어 있었다. 하긴 이게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전면적인 해방 투쟁으로 세상을 변혁하지 않는다면, 해결될 문제인가.
광주송정역으로 향하는 내내, 우리 둘은 비장함에 가득 차 있었던 같다. 하필이면 우울하게 비는 쏟아졌고, 또 마침 둘 다 우산은 없었다. 우리는 함께 비를 맞고 걸으며, 박상종을 규탄했고, 기만적인 민주주의를 규탄했다. 범위는 점점 더 커져 장애인 차별을 규탄했고, 자본주의를 규탄했다. 비장함은 기차 시간이 남아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 잔을 나눠 마셨을 때서야 비로소 조금은 풀렸다. 김선양은 알코올이 입술에 닿고 나서야 오늘은 처음 보는 편한 웃음을 내비쳤다. 이젠 서로 농담도 건넸고, 살아온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전에도 개인적인 대화를 아예 안 나눠본 건 아니지만, 역시 나눠 마시는 술의 힘은 강했던 것 같다. 그때서야 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우정이 샘솟았다. 급작스레 투사가 된 분, 그저 강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저 현장에서만 만나는 ‘동지’인 분으로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이 분 참 오래된 친구처럼 귀여우시다! (김선양 동지! 이런 표현 써서 죄송합니다) 분노로 경직된 어깨와 몸짓 하나하나가 풀려가면서, 날카로운 눈매도 잠시 동글동글해졌고, 세종시에서 단식 중인 강태훈 대표님의 안부를 물으며 단식 경험자로서 걱정을 하는 모습이 유난히 친근했다.
광주에서 세종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한 시간 반 가량 걸려 세종시청에 도착하여 김선양과 함께 강태훈 대표님이 있는 단식농성장 안에 자리 잡고 앉았다. 친근한 동지가 단식 중인 모습에, 그리고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재판 결과를 방금 전 겪은 이가 바로 그 곁에 앉아 있는 모습에, 처음엔 마음이 좀 먹먹했는데 조금 지나니 어째 두 동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 든든했다. 1년 새 투사가 된 두 장애인 노동자 동지라니! 그것도 단지 자기 싸움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싸움을 다른 억압받는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만들어가는 동지들이라니! 어쩌면 노들의 정신이 이 두 동지의 투쟁에서 관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실은 김선양 동지가 습관처럼 말하는 “재순이가 나에게 투쟁하는 삶을 선물하고 갔다”는 말에는 이미 이 선언과 비슷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다소 어색했던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김선양 동지는 이내 세종시 동지들과도 농담을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 김인숙 대변인은 물론, 마침 그날 농성장을 찾은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님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눠갔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고, 단식 중인 강태훈 대표님이 잠을 청하자, 우리 둘은 (강태훈 대표님에 대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농성장을 사수하면서 ‘몰래(?)’ 술을 조금 더 나눠 마셨다.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마 김선양 동지도 그랬던 것 같다. 오늘에서야 처음 술자리를 함께 하는 이건만 어째서인지 오래 간 못 만난 친구 같았다.
“제가 투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1년 새 싸우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더라고요. 노동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노동은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에요. 그걸 경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그래서 목숨까지 빼앗아 가는 놈들. 나는 이 사람들 용납할 수가 없어요. 예전에 바름이(노들야학 바름이 맞음. 김선양은 바름 교사님을 아들처럼 생각함)가 제게 묻더라고요. 노동 안 해도 되면, 그런 세상이 오면 어떨 것 같냐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니라고. 노동을 안 하면 나도 죽고 세상도 죽는다고.”
은연중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장애인들을 노동에서 배제하려는 놈들은 삶에서, 이 세상에서 장애인들을 배제하는 거라고.”
두 시간 남짓 잠들었을까. 김선양 동지는 막 잠에서 깬 강태훈 대표님 농성장에 앉아 감잎차를 한 잔 나눠 마시고는 또 새벽부터 길을 떠났다. 아침에 평택항 고 이선호 노동자의 아버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 날 오후에는 구의역 김군 5주기 추모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떠나면서 자신의 다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장애인들을 노동에서 배제하려는 놈들은 삶에서,
이 세상에서 장애인들을 배제하는 거라고.
“다음 주 6월 3일에 세종시에서 결의대회 있죠? 6월 2일에 동조단식하러 와서 하루 더 농성장 사수하고, 결의대회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창조 동지. 강태훈 동지 오늘 잘 모시고!”
올해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이 산재를 줄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정작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하청업체의 사고로부터 원청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끔 되어 있고, 산재의 온상인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아예 적용하지조차 않는다. 관련 공무원 처벌 조항도 빠졌고, 중대재해의 80% 이상이 발생하는 50인 미만 기업에 대해서는 3년 동안 법 적용이 유예되었다. 10인이 일하는 사업장에서 일했던 김재순이 다시 죽더라도, 사업주는 이 법으로 당장 처벌받지 않는다. 그야말로 누더기 법이다.
자본은 이윤 창출을 위해 착취할 수 있는 자를 착취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뽑아먹으면 그만이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생산성 기준을 정해두고선, ‘착취할 수 없는 이’를 노동 영역에서 아예 배제해 버리면 그만이다. 노동자의 목숨이나 건강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다. 노동자의 목숨 값보다 소중한 건 자본의 증식이다. 그러니 누가 죽거나 다쳐도 죄책감보다 먼저 찾아오는 건 억울함일 게다. 왜 하필 내 사업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서. 잘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유족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박상종은 곧바로 항소를 했고, 곧 재심 공판이 열린다. 법은 이번에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것을 불안해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모순은 없는가?
김재순은 어쩌면 이미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의 상징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과 죽음은 (당연히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이미 숱한 장애인 노동자들의 미래를 그 자체로 예견하고 있다. 아니, 실은 김재순의 삶과 죽음이 이미 반복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 장애인 임금 노동자 중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가 40.2%나 되고,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37.6%나 된다.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어 왔다가 겨우 일자리를 구하여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로 내몰린 수많은 장애인들은 법조차도 그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김선양은 지난 1년 투쟁을 하는 동안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한다. 산재 유족들과 함께 가치를 나누고 세상에 자신들의 생각을 알리는 데, 글쓰기만큼 좋은 게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가 또박또박 쓴 문장 하나하나에는 특유의 자부심이 서려 있다. 세종시청 단식농성장 뒤에 붙은 누리콜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이춘희 시장과 세종시를 규탄하는 각종 위트 있는 포스트잇 사이로, 김선양 동지는 자신의 짧막한 글을 붙여 두었다. 6월 3일 결의대회 후 마주한 이 문구는 저 홀로 궁서체로 적혀 있어 유난히 매력적이었다.
“노동은 살아 있다는 의미이고 노동은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다.
- 재순아비 김선양.”